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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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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몸] 누가 나를 돌볼까, 나는 누굴 돌볼까

혼자 사는 이들의 노후 걱정, 혼자 남겨진 다른 이들의 돌봄으로 이어지길
등록 2020-06-27 06:55 수정 2020-07-03 10:22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뭘 이런 걸 사와. 혼자 사니 노후 걱정 많을 텐데.” 동네 개들 모이는 데 오렌지를 사들고 갔더니 웰시코기 풍이 아빠가 이런다. 뭐지? 이 급작스러운 동정의 일격은? 가족이 있으면 노후 걱정 안 하나? 속이 배배 꼬였지만 웃으며 오렌지 껍질을 깠다. 풍이는 내 반려견 몽덕이 친구다. 개 때문에 참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한테 구시렁거렸다. ‘그렇게 걱정되면 기부금이라도 내시든가.’

현생인류가 멸종하지 않은 건 순전히 ‘운’

별것도 아닌 풍이 아빠 말에 오래 분기탱천했던 까닭은 그가 내 불안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맞다. 걱정된다. 너무 무서워서 아예 생각을 안 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초단기 계약직이니 아프면 돈줄 바로 끊긴다. 누가 날 돌봐주겠나. 나는 사람으로 앓다 죽을 수 있을까? 확실한 건 나는 언젠가 반드시 아프고 죽을 거란 사실이다.

40대 중반에 접어드니 주변에 아픈 사람이 늘어난다. 친구는 중학생 때 육상 선수였다. 40대에 들어선 복싱을 배웠다. 크로스핏도 했다. 쿵쾅거리는 자기 심장 박동에 골이 울려야 만족한다. 살 빼려고 극기훈련 하는 게 아니다. “재밌어. 뭔가 한계를 넘은 거 같을 때 느껴지는 흥분 상태는 말로 설명 못해.” 그랬던 친구가 지난해 여름 삼차선 건널목을 다 건너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 서 있었다. 신호등이 바뀔까봐 마음을 졸였다. 한 걸음 떼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쳐들어온 류머티즘 관절염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 날 쳐다보는 거 같았어. 누가 곁에 있어줬으면 했어.”

친구가 앓는 류머티즘은 자가면역질환이다. 면역체계가 자기 몸을 공격하는 병이다. 이유 없는 오발탄이다. 네이선 렌츠가 쓴 책 <우리 몸 오류 보고서>를 보면 우리 몸은 결함투성이 구조물이다. 목구멍은 너무 좁다. 게다가 음식물과 공기 둘 다 같은 통로로 들어온다. 2004년 미국에서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숨진 사람이 5천여 명이다. 비타민C는 필수 영양소다. 이게 없으면 몸에서 콜라겐을 만들지 못하고 괴혈병에 걸린다. 그걸 우리 몸은 못 만든다. 비타민C를 만들 수 있는 유전자는 있다. 그런데 무작위 돌연변이로 망가져 작동이 안 된다. 아홉 가지 필수아미노산 합성 능력도 잃어버렸다. 자체 생성을 못하니 다른 생물에서 취해야 한다. 우리 몸에선 매일 10의 11제곱 번 세포분열이 일어난다. 그때마다 세포가 DNA를 복제하는데 수만 개 실수가 따라온다. 무작위 복제 오류 덕에 진화가 가능했지만 그 탓에 암에 걸린다. 진화는 목표 지점을 설정해 이뤄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뒤죽박죽으로 진행된다. 렌츠는 “현생인류가 멸종 위기에서 번번이 살아남은 것은 뇌 덕분이 아니”라며 “그것은 순전히 운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인간의 존엄을 확인해주는 돌봄

“우리는 취약한 생물이고, 인간들은 바로 이 취약함을 공유한다.”(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그런데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살아간다. 취약해지는 건 자기관리에 실패한 창피스러운 일이다. 모두 취약한데 안 취약한 척해야 하니 불안하다. ‘잘못 살아서 아픈 거다’라며 병에 도덕적 실패를 붙여 환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건 불안 때문이다. 두려움을 내쫓으려 자기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늙고 병든 몸을 혐오한다.

갑상샘암 등을 앓은 조한진희는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 화가 솟구쳤다고 썼다. 암에 걸리기 쉬운 성격 유형으로 일중독자, 완벽주의자 등을 꼽은 프로였다. “OECD 가입국 중 노동시간 1위, 산업재해 1위… 이런 노동환경에서 주말에도 업무를 생각하며 완벽하게 일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개인 성격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감정을 솔직히 표현해 질병을 예방하라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픈 사람들은 원래 인간이 취약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상기시킨다. 통제 가능한 몸을 효율적으로 써서 독립적인 존재로 쭉 산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나 의존한다. 그래서 심장마비와 암을 앓은 아서 프랭크는 “아픈 사람들은 이미 아픔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썼다. 그는 아픈 동안 몸의 경이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고통은 삶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이며 자신은 작지만 세상에 연결된 존재라고 느낀다.

홀로 사는 친구들에게 나을 가능성이 없을 만큼 아프다면,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는 연명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안락사가 가능한 나라로 갈 거야.”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런데 효율성이 떨어진 몸은 죽어도 된다면 나는 애초에 인간이었을까? 생산용 기계였을까? 돌봄을 받고 돌봐주며 우리는 서로의 존엄을 확인한다.

의사이자 간병을 연구해온 의료인류학자 아서 클라인먼은 치매에 걸린 아내를 10년 동안 돌본 경험을 책 <케어>에서 이야기한다. 중국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아내의 식은땀을 닦아주고 기저귀를 갈며 그는 자신이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갔다고 썼다. 그의 어머니도 “우리 아서가 인간 됐다”고 했다. 그는 “돌봄은 인간을 생 앞에서 겸손하게 한다”고 고백한다. “돌봄은 행동이고 실천이고 수행이다. 우리 안의 인간애를 온전하게 깨닫게 하는 실존적 행위이다. …돌봄은 사회를 하나로 잇는 보이지 않는 접착제다.”

클라인먼이 돌봄에서 성찰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까닭은 조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매 말기에 앞도 못 보고 인지능력도 잃은 그의 아내를 데리고 나와 햇볕을 쬐어준 이는 의사가 아니라 최저임금을 받는 아이티 출신 여성 간병 노동자였다.

혼자 남겨졌을 때, 혼자 남겨진 사람을 위하여

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노동은 폄하되나? 클라인먼이 “관계의 핵심”이라고 말한 돌봄은 사소한 일로 취급당한다. 사소하니 여성 몫이고 여성이 주로 하니 사소하다. 가족 안에선 딸이나 며느리, 어머니가 독박을 쓴다. 밖에선 50대 이상 저임금 계약직 여성노동자들이 맡는다.(‘사회서비스 산업 노동시장 분석’ 연구보고서) 인정받지 못하고 끝이 없는 고독한 노동이다.

전희경 등은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책임이자 권리인 돌봄을 시민으로서 정의롭게 나눠야 한다고 제안한다. 헌신을 당연시하지 않고 서로 개별성을 알아봐주는 돌봄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지려면 공공의 역할을 늘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동시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논의는 윤리적이지 않을뿐더러 유의미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류머티즘을 앓는 친구는 증세가 나아지자 교육받고 장애인 활동지도사가 됐다. “건널목에서 걷지 못해 혼자 남겨졌을 때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게 됐거든.” 친구가 함께하게 된 장애어린이를 10년 동안 홀로 돌봐온 엄마는 친구를 처음 만난 날, 오래 울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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