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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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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고립이 되기 전에

엄마는 양준일, 안지연씨는 바람의 나라, 나는 몽덕이를 통해 느슨한 연대를
등록 2021-01-12 12:42 수정 2021-01-15 10:44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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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나 바쁘다.” “아빠는 뭐 하셔?” “몰라.”

엄마(70)는 외롭지 않다. 코로나19 탓에 신발 한 번 안 신고 일주일을 보내지만 답답하지 않단다. 가수 양준일 때문이다. 엄마는 양준일의 신곡 <로킹 롤 어게인> 유튜브 동영상을 50개 묶음으로 틀어놓고 잠든다. 조회수를 올려주려는 거다. 아침에 일어나면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 알람을 체크한다. 양준일 팬들 채널에 도움이 될까 일일이 댓글을 단다. 양준일을 팔로하려고 인스타그램 계정도 팠다.

엄마가 피자와 샴푸를 산 이유

“전화 끊어. 나 투표해야 해.” 양준일이 광고 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는 각종 사이트에서 벌이는 인기투표란 투표는 다 한다. ‘별’이 있어야 투표할 수 있는데 사이트에서 ‘별’을 무료로 쏠 때를 기다린다. “지금이야.” 그 적정 시기를 알려주는 건 엄마의 단체대화방 친구 애자씨다. 양준일 때문에 단체대화방에 모인 또래 세 사람은 원래 잘 모르는 사이다. 만난 적도 없다.

“매일 이 친구들하고 한 시간은 카톡 할걸. 양준일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지. 애자는 요즘에 덕질이 더 심해졌어. 코로나 때문에 손주도 못 보러 가니까. 이번에 양준일 담요 샀다고 자랑하더라. (엄마도 담요를 사고 싶다는 분위기다.) 나한테 반복 ‘스밍’(스트리밍) 안 한다고 난리야. (반복 ‘스밍’하는 법을 알려달라는 분위기다.)”

애자씨 냉동실엔 양준일이 광고한 피자가 쌓여 있다. 엄마도 세 판 샀다. 브로마이드 받으려고 샴푸 세트도 샀다. “양준일은 집을 못 샀는데, 코로나로 콘서트까지 다 취소돼서 어쩐다니.” “엄마, 딸이나 걱정하세요. 코로나 때문에 나도 손가락 빨고 있잖아!”

사실 그 가수가 나보다 엄마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 대개 다들 나보다 엄마에게 더 큰 기쁨을 주지만. “요즘에 양준일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니. 노인이 돌아다니면 더 욕먹을 거 같아서 지하철 타기도 눈치 보여. 우울증 걸렸을 거 같아. 덕질 하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몰라. 인스타그램도 하고 내 세상이 얼마나 넓어졌는데.”

엄마에게 양준일이 왜 그렇게 좋냐고 물었다 후회했다. “그 사람은 철학자야.” 엄마는 목소리까지 바꿔가며 달달 왼 양준일 어록을 읊었다. 전화기를 든 내 손에 땀이 찰 때까지.

서로의 개 이름을 부르는 모임

‘하루 필수 대화량’이 있다. 40년 동안 고립을 연마해온 나 같은 기술자도 며칠 인간에게 말을 못하니 개한테 인생 고민을 다 털어놓는다. 대화는 음파탐지기 같다. 그 소리가 상대에게 부닥쳐 나는 반향으로 내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반응이 없을 때는 달콤한 고독은 공포스러운 고립이 된다.

혼자 사는 ‘집콕’의 대가 안지연(35)씨는 ‘사회적 거리 두기’ 선행 학습을 마쳤다고 자부했지만, 몇 달째 필수 대화량을 채우지 못하자 자신이 이상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우울해지더라고요. 대화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을 주고받는 행위 자체가 소중한 거였어요. 시시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사회적 존재임을 느껴왔던 거예요.”

요즘 지연씨가 고립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받쳐주는 건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 문파 사람들이다. 모르는 사이다. 지연씨는 이를 “느슨한 연대”라고 한다. “그냥 우연히 매일 게임을 같이 하는 사이예요. 기대도 위계도 없어요. 편안해요. 게임하다 가볍게 서로 응원해주는 정도의 느슨한 연대 덕분에 코로나를 겪는 제가 한 사람, 사회적 존재라는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거 같아요.”

내 말에 반응하는 상대가 없다면 내 존재도 흐릿해진다. 반응이 공감이면 금상첨화겠지만 지금 같은 대화 춘궁기엔 동문서답이라도 그립다. 오가는 물리적 자극이 절실하다. 연결을 향한 열망은 허기처럼 물리적인 필요다. 개모임이 없었다면, 나는 코로나가 아니라 외로움 탓에 앓았을 거 같다. 모임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비슷한 시간에 산책하는 사람들이 오다가다 만나는 식이다. 서로 개 이름으로 부르는 아는 얼굴들이다.

개들은 항상 문제가 있기 마련이니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요즘 개가 똥을 먹어요.” “우리 개는 아토피예요.” 개들끼리 노는 걸 멍하게 쳐다보고 각자 갈 길 간다. 내 개가 ‘앉아’를 잘한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다른 개가 더 잘 뛴다고 부러울 일도 없다. 시추는 시추고 잡종은 잡종이고 진돗개는 진돗개니까.

“흰둥이 소식 들었어요?” 요즘 개모임의 핫이슈는 유기견 진돗개 흰둥이다. ‘작닥이’라는 잡종개를 키우는 20대 청년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발견했다. 이 청년은 유기견을 끄는 마력이 있다.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사실 볼품없는) 작닥이도 청년이 쓰레기 분리배출을 하다 발견했다. 태어난 지 한두 달 됐던 작닥이는 종이상자에 담겨 떨고 있었다.

1년 뒤 새벽 1시께 고속도로 휴게소에 빨간 차 한 대가 서더니 태어난 지 넉 달 정도 돼 보이는 흰둥이를 내버리고 냅다 꽁무니를 빼버렸다. 이 모습을 하필 목격하고 만 청년은 흰둥이도 데려왔다. 청년은 투룸 빌라에 혼자 살았는데 방을 빼야 할 처지였다. 여기저기 흰둥이 입양처를 알아보다 실패한 그는 흰둥이를 보호소에 맡겼다. 보호소에서 2주간 입양 갈 집을 알아봐주기로 했다. 청년은 흰둥이 소식을 매일 알려달라 신신당부했다. “개를 두고 오는데 마음이 찢어질 거 같았어요.”

흰둥이에게 있는 ‘연대’의 흔적

“흰둥이가 (캐나다) 밴쿠버로 가게 됐대.” 다들 안심했다. 그리고 며칠 뒤 오다가다 만난 개모임 사람이 새 소식을 전했다. “코로나 때문에 밴쿠버에 못 가게 됐대.” 다들 안타까워했다. 때가 꼬질꼬질한 분홍색 옷을 입고 입양 행사에 나간 흰둥이는 그 누구에게도 낙점받지 못했다. 2주가 지나도록 가족을 찾지 못한 흰둥이가 안락사 될 거란 얘길 듣고 청년은 결국 흰둥이를 맡았다.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오다가다 만난 흰둥이는 그새 뒷다리에 근육이 붙고 귀가 섰다. 발랄했다. 흰둥이에겐 ‘느슨한 연대’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흰둥이가 입고 있는 겨자색 옷, 메고 있는 하네스(반려동물의 어깨와 가슴에 착용하는 줄), 먹고 있는 수제 간식은 개모임 사람들이 주섬주섬 챙겨준 것들이었다. 내가 “흰둥아” 하고 다가가니 개가 쓰다듬어달라며 배를 깠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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