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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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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입을 막는 물음 “진짜 성범죄 피해자 맞습니까?”

심판관 자처하며 성폭력 가해자 아닌 피해자에게 묻기,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것
등록 2020-07-25 06:19 수정 2020-07-28 01:35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힌 메시지들. <한겨레> 젠더데스크의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를 메모지에 옮겼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힌 메시지들. <한겨레> 젠더데스크의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를 메모지에 옮겼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서울시장 비서로 일하면서 위력(힘)에 따른 성희롱·성추행으로 고통받았다고 호소하는 피해자에게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4년이나 참았다가 왜 이제 말하냐’ ‘결정적 한 방을 내놓으라’며 피해자에게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여러 요인 중 하나는 성차별, 성적 괴롭힘을 인지하는 민감성(성인지 감수성)이 성별·세대별로 다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겨레21>이 설문조사업체 ‘오픈서베이’에 의뢰해 7월22일 전국 20~59살 남녀 500명에게 한 ‘직장 내 성평등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외모에 대한 칭찬도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질문에 20대 여성 37.1%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50대 남성은 3.2%에 그쳤다. “업무 외 사적인 메시지 전송은 성적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항목에서도 20대 여성 38.7%가 ‘매우 그렇다’고 했지만, 50대 남성은 14.5%에 그쳤다.

성인지 감수성의 격차가 큰데도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심판자를 자처해 ‘나는 옳은 판단이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은 2차 가해로 이어질 수 있다. _편집자주

“4년 동안 뭘 하다 이제 와서 갑자기 김재련 변호사와 함께 세상에 나서게 된 건지도 너무 궁금하네요.”(7월14일 <청정구역 팟캐스트>, 방송인 박지희씨)

“지금 피고소인(박원순)의 인생이 끝이 났어요. 그런데 자기(고소인)는 숨어서 말이야.”(7월15일 <이동형TV> 유튜브 방송, 작가 이동형씨)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자를 향한 비수 같은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는 비판과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런 입장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50살 남성인 박아무개씨가 그렇다.

“그 사람(피해자)은 공무원이라면서요. 계약직 공무원은 (시장이) 얼마든지 내쫓으려면 내쫓을 수 있는데, 이 사람은 아니잖아요. 사기업도 아니고, 공공기관은 고용 불안도 없을 텐데 (성적 괴롭힘을) 4년이나 참았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요. 몇 년 전에는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이었으니 그때 피해를 폭로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파급력이 컸을 텐데요, 지금 와서 얘기한다? 의도를 가진 변호사가 옆에서 부추긴 것 아닐까요?”(박씨)

그는 피해자가 더 ‘명확한 증거’를 내놔야 한다고 했다.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보냈다는 속옷만 입은 사진이 도대체 어떤 사진인지, 비밀대화방에서 보낸 메시지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아 불필요한 논란만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쪽에서 (피해를) 다 까기로 각오했으니 기자회견도 한 것 아닌가요?” 박씨가 되물었다.

피해자는 답할 의무가 없다

7월22일 피해자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와 한국여성의전화·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지원단체는 2차 기자회견을 열어 “2016년 이후 4년 동안 서울시 관계자 20명에게 성추행 등 피해 사실을 알렸으나 묵살·회유당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의 호소에 ‘남은 30년 공무원 생활 편하게 하도록 해줄 테니 다시 비서로 와달라’ ‘(뭘) 몰라서 그래’ ‘예뻐서 그랬겠지’ 같은 반응이 나왔다. 결국, 사법절차를 밟기로 했지만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으로 그는 ‘여론 재판’에 끌려나왔다.

피해자 쪽은 이번 사건을 박 전 시장의 개인적 문제를 넘은 “권력에 의해 은폐, 비호, 지속된 조직적 범죄”라고 규정하고, 공공기관 성희롱 등의 조사·구제 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성추행 의혹, 서울시의 성차별적 업무 환경, 문제제기와 묵살 과정, 업무상 불이익을 조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결정적 한 방’은 나오지 않았다. 김재련 변호사는 “‘증거를 공개해야 피해자가 덜 공격받을 수 있다’는 말이 있는 걸 안다. 증거 자료는 수사기관에 제출했으며 추가로 확보되는 자료가 있으면 그 역시 수사기관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피해자가 구체적인 피해를 말하면 그것을 이유로, 피해자가 구체적인 내역을 제시하지 않으면 그것을 이유로 피해자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 없는 피해자에 대한 책임 전가”라고 했다.

성범죄 사건이 불거지면 우리 사회는 가해자에게 ‘왜 그랬냐’ 묻는 대신 피해자에게 ‘왜 말하냐’ 묻는 데 익숙하다. 게다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면 피해자에게로 향하는 의혹과 비난은 한층 거세진다. 박 전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4년 동안 뭐 했냐’란 질문이 대표적이다. 김재련 변호사가 박근혜 정부에서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장, 화해치유재단 이사를 지냈다는 이유로 “정권과 민주세력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려 한다”는 실체 없는 음모론을 거론하거나, “페미니스트인 제가 추행했다고 말했으니 추행”(진혜원 대구지검 부부장검사)이라며 피해 주장을 축소 해석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진짜 피해자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에서 피해가 입증된 게 아니니 ‘피해자’가 아닌 ‘피해 호소인’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피해자가 놓인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지워버린 채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답지 않다”며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피해를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필요하다며 피해자에게 ‘결정적 한 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진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러한 질문에 피해자가 답할 의무가 없다”(<미투의 정치학>, 2019)고 했다. 피해 여성이 폭력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사자마다 다르고, 그것은 제3자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피해자와 가해자란 용어는 위력을 활용한 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통상적으로 써왔던 단어다. 가해자 혐의에 유죄가 확정되지 않아도 피해자는 피해자로, 가해자는 가해자로 불렸다. 이 사건에서만 엄중함과 치밀함을 요구하는 건 피해자 입을 막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피해자를 피해자로서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라 부르는 것과 형사재판 절차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죄를 단정짓지 않고 그 방어권을 보호하기 위한 ‘무죄 추정의 원칙’은 양립 가능하다.

조사대상: 20~50대 남녀 500명 조사방법: 2020년 7월22일 온라인 조사 조사기관: 오픈서베이 단위: % (명)

조사대상: 20~50대 남녀 500명 조사방법: 2020년 7월22일 온라인 조사 조사기관: 오픈서베이 단위: % (명)


안희정 때보다 더 큰 충격과 파장

피해자를 둘러싼 수많은 말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성희롱·성추행 사건에서 흔히 발견되는 전형적인 2차 가해 모습과 유사하다. 2차 가해란 ‘성폭력 피해로 발생하는 직접적인 신체적·정신적 후유증 이외에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에 의해 불이익을 당하거나 심리적 고통을 겪는 것’을 말한다(한국성폭력상담소).

직장 내 성희롱이 일어나면 △가해 행위자와 주변인 △사용자나 상담자 △동료와 조직 구성원 등 다양한 주체에 의해 2차 가해가 발생한다.(2018년 여성가족부가 발간한 ‘성희롱·성폭력 피해자 지원체계 개선방안 연구’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 동료나 조직 구성원은 주로 피해자에 대한 허위 사실이나 악성 소문을 퍼뜨리고 피해자를 따돌린다. 사건에 대한 관용적 태도나 섣부른 판단, 피해자의 대응 태도를 평가하는 행위도 일삼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성희롱 피해자 25명을 심층 면접해보니, “조직 구성원에 의한 2차 피해(가해)가 가장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발생”하는데, 피해자는 “적대적인 사내 분위기, 구성원의 시선”을 가장 힘들어한다고 분석했다.(‘성희롱 구제조치 효과성 실태조사’, 2019년)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그 직원 조심해라. 걔한테 말 잘못했다가는 우리도 걸릴 수 있다. 쟤한테는 말도 함부로 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2차 가해가 계속 따라다니더라고요.”(ㄱ씨)

“소문이, 1년 전 건데 왜 이제 신고했어? 둘이 사귀다가 헤어진 거 아니야? 헤어지니까 피해자가 앙심에 그런 거 아니야? 그 사이에 온갖 소문이 가공돼서 떠다니는 거죠.”(ㄴ씨)

이같은 2차 가해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조직 내 지위와 권한 격차가 클 때, 특히 가해자의 지위가 매우 높을 때 극심해진다. 여성학자 권수현 박사는 “피해자에 대해 관리 책임이 있는 사람이 이런 (2차 가해) 행동을 했을 때 가해자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해결이 쉽지 않다”며 “가해자와 그 측근들이 쌓아놓은 조직 네트워크가 있고 (구성원들이) 그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국 시민운동의 선구자, 대한민국 제1도시를 이끄는 서울시장이자 대권 후보였던 박 전 시장의 경우 그 영향력의 자장은 서울시청 담장을 훌쩍 넘는다. 위력을 이용해 수행비서를 성폭력한 혐의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비교해도 충격과 파장이 더 크다. 박 전 시장이 진보 진영에서 위치했던 도덕적 위상, 사회적 존경을 고려할 때 ‘그런 사람일 리 없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과보다 공이 많다’는 인식이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의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청한 성평등 교육 전문가는 “조직 내에서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불거지면 모두 심판관인 듯 사건을 속속들이 알아내려는 경향이 있다”며 “그러나 심판관이 되려고 하는 순간 2차 가해를 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고 지적했다. 정부나 조직에 대한 불신 탓에 ‘내가 직접 판단하겠다’는 문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차별과 지위·위력(힘)이 현실화하는 방식은 공적 관계나 맥락, 상황마다 각기 다르기에 누구라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나는 옳은 판단이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뭐만 하면 2차 가해냐, 피해자 주장은 합리적 판단과 시비가 불가능한 성역이냐’고, 2차 가해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한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민낯 드러낸 진보 지식인들

진보 지식인들이 직간접으로 2차 가해에 가담했다는 비판이 일면서 혼란은 더 가중됐다.

“삶을 포기할 정도로 자신에게 가혹하고 엄격한 그대가 원망스럽다”(조희연 서울시 교육감)거나 “박 시장이 맑은 분이라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다”(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는 발언은 논란을 일으켰다. 성희롱·성추행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교육감의 이름으로, 국회의원의 이름으로 가해자로 지목된 박 전 시장을 두고 ‘맑은 사람’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라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처럼 미화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박원순 같은 사람은 당장 100조원이 있어도 복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시장의 죽음이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 제고와 권력에 의한 성폭력을 근절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만, 이 사람이 죽음으로써 우리 국가와 사회가 입은 피해, 사회적 약자들이 앞으로 입을 피해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7월14일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도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를 지나치게 가볍게 치부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여성민우회는 7월22일 카드뉴스를 내어 박 전 시장의 업적을 부각하는 언론 보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전 시장의 업적이 일방적으로 부각된다면, 피해자가 입었다는 성희롱·성추행 피해는 그 업적에 비해 사소한 오점 혹은 결점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진보 인사들이 ‘추모’를 앞세워 2차 가해성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 박 전 시장과 사회운동을 일궈온 586(50대·80년대 학번·1960년대생) 운동권의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진단도 나왔다. 박권일 칼럼니스트는 “이른바 86세대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 세대는 자신과 박원순의 삶을 겹쳐서 보는 것 같다. 그의 업적과 삶, 염원이 포개어져서 박원순에 대한 공격은 곧 자신에 대한 공격이 된다. 거악과 싸우는 것을 민주주의라 생각해온 사람들에게 여성의 권리, 생태, 환경운동은 주변화된 가치로 밀려났다. 그 우선순위의 차이가 충격적 사건을 계기로 드러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여성학자 허민숙 박사는 “높은 도덕의식을 표방하던 진보 인사들은 성평등을 차별적, 상징적 가치로 내세워왔는데 이번 사건으로 그 실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고 진단했다.

차분히 지켜보는 게 최선

전문가들은 차분하게 경찰 수사, 국가인권위원회 조사 과정과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게 최선이라고 말한다. 말들의 범람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이 사건을 지켜보는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의도치 않은 시그널까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다움’의 통념을 벗어나는 피해자는 진짜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피해를 호소하면 2차 가해에 시달리게 된다는, 그래서 침묵하라는 메시지 말이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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