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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동 거절 당했다” 서울시 ‘성폭력 지침’ 살펴보니

‘박원순 사건’ 국가인권위에서 조사… 서울시 대처 적절했는지도 조사할 듯
등록 2020-07-25 05:25 수정 2020-07-28 01:35
7월22일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의 지원단체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7월22일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의 지원단체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서울시장 비서로 일하면서 위력(힘)에 따른 성희롱·성추행으로 고통받았다고 호소하는 피해자에게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4년이나 참았다가 왜 이제 말하냐’ ‘결정적 한 방을 내놓으라’며 피해자에게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여러 요인 중 하나는 성차별, 성적 괴롭힘을 인지하는 민감성(성인지 감수성)이 성별·세대별로 다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겨레21>이 설문조사업체 ‘오픈서베이’에 의뢰해 7월22일 전국 20~59살 남녀 500명에게 한 ‘직장 내 성평등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외모에 대한 칭찬도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질문에 20대 여성 37.1%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50대 남성은 3.2%에 그쳤다. “업무 외 사적인 메시지 전송은 성적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항목에서도 20대 여성 38.7%가 ‘매우 그렇다’고 했지만, 50대 남성은 14.5%에 그쳤다.

성인지 감수성의 격차가 큰데도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심판자를 자처해 ‘나는 옳은 판단이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은 2차 가해로 이어질 수 있다. _편집자주

“피해자로서 보호되고 싶었고, 수사 과정에서, 법정에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자는 7월22일 이렇게 밝혔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단체가 이날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의 입장문을 공개했다. “그 어떠한 편견도 없이 적법하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과정이 밝혀지기를. 본질이 아닌 문제에 대해서 논점을 흐리지 않고, 밝혀진 진실에 함께 집중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인권위로 쏠리는 눈

또한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해당 사건을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진정하겠다고 했고, 곧이어 서울시가 “인권위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7월8일 피해자가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해 진상규명은 ‘강제추행 방조·공무상 기밀 누설 등의 혐의에 대한 수사기관 수사’와 ‘성희롱 진정 사건에 대한 인권위 조사’ 두 갈래로 이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윤설아 인권위 홍보협력과장은 “성차별(성폭력·성희롱) 진정 사건은 통상 차별시정국 성차별시정팀에서 조사한다”며 “(박 전 시장 사건의) 진정서가 들어오면 내용을 살펴본 뒤 조사팀에 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공공기관 종사자·사용자·노동자의 성희롱 관련 진정이 있거나, ‘(성)차별 행위가 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내용이 중대할 때’ 조사할 수 있다. 조사 결과 성희롱으로 인정되면 행위자에 대한 특별인권교육·손해배상 등 시정권고, 소속기관장에게 행위자 징계 등 인사 조처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손해배상 등을 권고한다. 관련 통계를 보면, 2019년 성희롱 진정이 303건 접수돼 283건이 처리됐다. 이 가운데 권고·징계권고 등으로 인용한 사건은 37건(13.1%)이며 기각과 각하가 37건(13.1%), 207건(73.1%)으로 나타났다. 시정권고 사례를 보면 “성희롱 예방 지침 개정” “성희롱 재발 방지를 위한 조처” “행위자에 대한 징계” 등이 많았다. 성차별 행위가 형법이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등에 따른 처벌이 필요할 경우 검찰에 수사 의뢰하고, 대한법률구조공단에 피해자에 대한 법률 조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성희롱 진정은 피해자가 아닌 제3자도 낼 수 있으며, 진정 대상도 행위자뿐만 아니라 행위자가 소속된 기관·기업(사용자)이 될 수 있다. 성희롱은 행위자와 사용자에게 모두 책임이 있을뿐더러, 구제 절차의 목적이 행위자 처벌보다는 “성차별적 의식과 관행 변화, 평등한 사회로의 정착”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권위는 성희롱 여부뿐만 아니라, 서울시가 피해자의 호소에 적절하게 대처했는지도 폭넓게 조사해야 한다.

피해자 쪽은 2016년 이후 4년 동안 피해 사실을 인사 담당자를 포함해 서울시 관계자 20명에게 밝히고 이에 따른 조처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울시 관계자의 행위는 ‘서울특별시 성희롱·성폭력 예방지침’(성폭력 지침)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특별시의 성희롱·성폭력 예방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정”해 놓은 이 지침은 2019년 5월 한층 강화됐다. “#미투 운동의 사회적 확산을 계기로 안전하고 평등한 직장문화를 조성하고자 성희롱 예방 시스템 제도의 미비점을 개선·보완”한 것이다. 지침은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자, 신고자, 조력자, 대리인에게도 (피해자 보호가) 적용된다”(제2조 2항)고 했다. 실제 피해가 있었는지 확정되기 전일지라도 피해자 보호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서울시는 성폭력 지침 지켰나

인권위 조사는 서울시가 성폭력 지침을 준수했는지 주로 따져볼 가능성이 크다. 우선 서울시가 ‘피해자 등 보호 및 비밀유지’(제10조) 조항을 지켰는지다. 이 조항은 “시장(인사, 복무 등 권한을 시장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를 포함)은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자 및 조사 등에 협력하는 자에 대해 고충의 상담, 조사 신청, 협력 등을 이유로 불이익한 조치를 하여서는 안 된다”(제10조 1항), “피해가 발생한 기관·부서의 장은 피해자와 피해를 주장하는 자의 의사를 고려하여 행위자와의 업무·공간 분리, 휴가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2차 피해를 방지하고 피해자의 근로권 등을 보호해야 한다”(제10조 2항)고 돼 있다.

그러나 피해자 쪽은 “소극적, 적극적인 방식을 통해 4년간 꾸준히 (성추행 피해 사실을) 이야기해왔고, 부서를 이동시켜줄 것도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 이야기와 요구를 듣고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고 밝혔다. 또한 “피해자가 성고충을 인사 담당자에게 언급하기도 하였고, 직장 동료에게 불편한 내용의 텔레그램 문자 보여주고, 속옷 사진 보여주는 등의 고충을 호소하였으나, ‘남은 30년 공무원 생활 편하게 하도록 해줄 테니 다시 비서로 와달라’ ‘몰라서 그래…’ ‘예뻐서 그랬겠지’ ‘(인사이동 관련) 시장에게 직접 허락받으라’고 답변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폭력 지침 위반이라 볼 수 있다. 서울시 지침의 ‘피해자 보호’(제10조) 내용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내용을 상당 부분 옮겨왔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이 조항을 위반할 경우 대부분 사업주가 과태료를 내도록 한다. 하지만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신고한 노동자, 피해 노동자 등에게 불리한 처우를 한 경우”에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으로 형사처벌하도록 돼 있다. 성희롱 사건에서 ‘2차 가해’를 엄중히 조처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은 성희롱 사실을 신고한 노동자와 그를 조력한 동료 직원에게 불이익한 조처를 한 혐의로 기소된 르노삼성자동차 직원들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바 있다.

‘2차 가해’도 엄중 처벌

인권위 시정권고 사례도 비슷하다.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3명이 신규 임용된 공무원에게 “우리 모텔 갈래?”라고 말하는 등 언어적 성희롱을 했음에도 소속기관은 피해자를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게 하는 등 2차 가해가 이어졌고, 피해자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 진정 사건에서 인권위는 ‘가해자의 부서전환·보직변경 등의 조처를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도록 성희롱 예방지침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2014년 11월) 또한 인권위는 계약직 여직원에게 추행과 언어적 성희롱을 한 중간관리자를 소속기관이 징계할 것과,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공간에서 일하지 않도록 인사상 분리 조처해 2차 가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권고도 했다.(2017년 10월)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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