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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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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11개월간 지하철역이 사라졌다

엘리베이터 공사한다며 ‘인접역’ 이용하라는 지하철 영등포시장역
등록 2020-04-25 06:34 수정 2020-05-0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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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5호선 영등포시장역은 제가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역입니다. 홈리스로 사는 동안 의지했던 쉼터, 무료급식소, 저렴한 찜질방, 피시방, 중고품 재활용 매장, 값싼 먹거리가 모두 이 근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노숙인 지인들과 약속은 여전히 이쪽에서 잡을 때가 많습니다.

영등포시장역은 깊습니다. 영등포구청역 방향으로 가려면 지하 5층, 신길역 방향은 지하 6층까지 내려가야 승강장이 나옵니다.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있지만 노인과 특히 장애인은 아무래도 엘리베이터에 의존하게 됩니다. 특히 휠체어를 타는 사람에겐 엘리베이터는 지하철과 지상을 이어주는 단 하나의 수직 통로입니다. 그런데 올해 이 엘리베이터는 전동휠체어를 타는 장애인과 노인에게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영등포시장역은 이들에게만 접근 불가 통보가 내려진 채 운영되는 실정입니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의아한 독자를 위해 제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자, 이제 저는 전동휠체어를 탔다고 상상합니다. 오목교역 근처 단골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고 지하철을 타려 합니다. 오목교역은 지하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승강장까지 내려갈 수 있습니다. 승차 태그도 거기서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때맞춰 들어온 열차를 타고 양평역, 영등포구청역을 지나 5분 뒤 영등포시장역에 내립니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이동하니 사람 키보다 큰 배너 하나가 서 있습니다. “전동휠체어 이용고객은 인접역 이용 바랍니다!” 이게 뭔 소린가 싶지만 눈앞의 엘리베이터 문이 곧 열립니다. 얼른 잡아타고 지하 6층에서 지하 1층까지 순식간에 올라갑니다. 내려서 하차 태그를 하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또 다른 엘리베이터를 찾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지난해까지 분명히 있었던 엘리베이터가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있던 자리에 아까 밑에서 본 배너가 또 놓여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더 자세히 읽어봅니다. ‘외부 엘리베이터 이설공사 2020년 1월~2020년 11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기가 막힙니다. 하루이틀도, 한두 달도 아닙니다. 무려 11개월간입니다. 2020년은 휠체어 장애인에게 영등포시장역이 사라진 해입니다. 영등포시장역 근처가 집이고 이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일터에 나가고 외출해야 하는 휠체어 장애인은 올해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 상황이 누구에게도 거센 항의를 받지 않고 4개월째 이어진 현실이 좀체 믿기지 않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역 근처 공원 벤치에 가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기분을 좀 바꿔보려고 아까 오목교 쪽에서 산 소설집을 꺼내 훑어봅니다. 단편소설 뒤 작가노트에 적힌 한 구절이 눈에 꽂힙니다.

“요즘 소설 외에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분야는 장애학이다. 장애학에서는 몸의 손상이 장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상과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구조가 장애를 만든다고 말한다. 특정한 형태의 몸에 맞추어 설계된 세계가 어떤 종류의 몸을 장애화하는 것이다. (…)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접근 가능한 미래’가 있는지 묻게 된다. 기술이 약속할 미래는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동시에 접근 불가능한가.”–김초엽 작가노트– 글·사진 이상훈 광화문 희망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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