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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얹는 법

설렁썰렁
등록 2019-08-10 13:49 수정 2020-05-03 04:29
한겨레 백소아 기자

한겨레 백소아 기자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다. ‘보통 남이 하는 일에 편승해 무임승차해 이득을 보려 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사회 전반에서 숟가락 얹는 사람들에 대해 눈살을 찌푸린다. 더구나 정부나 정치인들이 숟가락 얹는 행위에는 시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물론 ‘좋은 일’에는 숟가락 얹는 이들이 하도 많아 그러려니 넘어갈 때도 많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맞서 자발적인 일본 제품 불매운동 등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여기에 ‘숟가락을 얹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정치인들의 행태에 시민들이 제동을 걸었다. 8월6일 중구청은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서울 명동과 청계천 일대를 포함한 중구 전역에 ‘보이콧 재팬’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는 글귀가 담긴 1100개의 ‘노 재팬’ 깃발을 걸었다가 시민들의 반발에 반나절 만에 철거했다. 여의도 정치인 출신인 중구청장은 “관군, 의병 따질 일 아니다”라며 ‘노 재팬’ 깃발의 당위성을 주장했지만 “불매운동은 국민들이 합니다. 공무원은 정공법으로 하세요” “일본인 관광객들 다 막을 생각인가, 소상공인 다 죽는다” “자발적인 불매운동 취지를 훼손하지 말라” 등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 무릎을 꿇었다.

‘숟가락 얹기’는 중구청 외에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시민들의 싸늘한 반응과 마주했다. 성추행 의혹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정봉주 전 의원은 “한-일 전쟁이 시작된 마당에 뒷짐 지고 있을 수는 없다”며 ‘일본 가면 KOPINA(코피나)’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고 ‘코피나 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다. 그는 “일본 후쿠시마 방사능·세슘 오염으로 코피가 나는 일본인들이 많다. 방사능 오염은 일본의 아킬레스건이다”라고 나름의 ‘진정성’을 강조했지만 “이 틈을 타서 정치를 재개하려 하냐”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을 희화화하지 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들을 막아선 성숙한 시민의식 덕에 ‘개와 늑대의 시간’(빛과 어둠이 뒤섞여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시간이라는 뜻)이 가고 반일 운동 대상이 일본 전체가 아닌 아베 정권, 즉 ‘노 재팬’이 아니라 ‘노 아베’로 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본 시민들도 이에 화답한다. 일본 우익과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의 일본 미술관 전시가 중단된 가운데, 일본 시민들 사이에서 ‘작은 평화의 소녀상을 확산하는 캠페인’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지고 있다.

이제는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다’는 표현의 명예를 회복할 때다. 앞서 14년 전 한 영화배우가 숟가락을 얹는 모범적인 자세로 공감을 얻어낸 바 있다. 정부 관계자나 정치인들은 숟가락을 얹기 전에 이 배우의 말을 되새겨보면 어떨까. 참, 이 와중에 사회 안전판인 환경·노동 규제를 대폭 완화하려고 숟가락을 얹으려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저는 사람들한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왜냐면 60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저는 그럼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제가 다 받아요. 그게 죄송스러워요.”(배우 황정민, 2005년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블라블라


할미꽃 전쟁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할미꽃은 줄기가 굽어서 노인의 등을 연상시키니 붙인 이름일 것이다. 무덤가에 피어나는 것도 죽은 할머니를 연상시킨다. 늙은 몸을 의탁하러 갔으나 박정한 손녀한테 쫓겨나 죽음을 맞는 전설도 그렇게 하여 만들어졌을 것이다. 꽃잎을 덮은 하얀 털을 덜어내면 선명한 붉은색이 젊은 날의 추억처럼 쓸쓸하다. 학명 ‘풀사틸라 코리아나’(Pulsatilla Koreana)를 보면 한국 자생식물임이 확실하다. 열매가 부채인 ‘미선’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름이 붙은 미선나무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식물이다.
그중에서도 동강할미꽃은 석회암 지역에만 자생하는 희귀종이다. 2000년 한국특산 신종으로 지정됐고, 강원도 광하교 하류 지역에서 기준 표본이 채집됐다. 영월댐 건설 취소는 이러한 환경평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2년 환경부 조사를 보면 동강에는 동강대극, 정선황기, 너도바람꽃, 세잎승마, 터리풀, 털댕강나무, 고려엉겅퀴, 암차즈기 등 총 64분류군의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동강할미꽃 자생지 주변으로는 표지판을 붙여 자생지임을 알리고 입장료 1500원도 받았다. 사진가들이 꽃을 잘 찍기 위해 주변을 훼손하고 그것이 할미꽃 생장 저해로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돼 언론에 나오기도 했다.
영화 가 이 동강할미꽃을 멸종시켰다는 글이 한 환경보호단체 이름으로 유포됐다. 경고를 무시한 채 촬영을 강행했고 전투 장면을 찍기 위해 여러 차례 화약을 터뜨렸고 그 결과 동강할미꽃이 멸종됐다는 가짜뉴스였다. 영화 촬영지는 자생지와 동떨어진 것으로 나중에 정정됐다. 강원도로부터 촬영 허가를 받았지만, 원주지방환경청이 문제를 제기하자 재촬영했다. 영화 개봉 전 퍼져나간 소문에서 유포자로 등장한 환경단체는 “악의적인 목적에 환경이 이용당한 듯하다”고 말했다. 영화제작사 쇼박스는 영화감독조합과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의 위임을 받아 영화 촬영현장의 환경윤리 가이드라인 제정 작업을 하기로 했다. 모든 인간사를 초월해 할미꽃은 내년에도 동강의 봄을 알리며 피어날 것이다. 해피엔딩이라 다행이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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