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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능적 멸종

설렁썰렁
등록 2020-01-13 02:13 수정 2020-05-02 19:29
EPA 연합뉴스

EPA 연합뉴스

코알라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만 사는 동물이다. 느리고 게으른 이미지 때문에 세상 편한 동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사 속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어왔다. 18세기 유럽인들에게 발견된 코알라는 부드러운 털 때문에 20세기 초까지 모피용으로 수백만 마리가 희생됐다고 한다. 사람들이 숲을 개발하며 코알라의 먹이인 유칼립투스 나무가 줄며 개체 수도 줄었다. 로드킬과 클라미디아라는 질병에도 수많은 코알라가 희생됐다. 호주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대형 산불도 코알라에겐 재앙이었다. 그리고 최근 5개월째 계속되는 최악의 산불로 8천여 마리의 코알라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개체 수가 줄어 생태계에서 본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기능적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전망이 조심스레 나온다.

산불로 코알라를 포함해 10억 마리의 야생동물이 희생되고 수십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산불에 그을리거나 희생된 코알라, 캥거루, 주머니쥐 등의 사진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불이 붙은 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다 포기한 듯 주저앉거나 소방관에게 구조돼 필사적으로 물을 마시는 코알라의 모습(코알라는 물을 잘 마시지 않는 동물이다)이 많은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참사의 주범은 결국 인간이다. 호주 정부는 방화를 하거나 조리 등을 위해 불을 피운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호주 경찰은 24명을 방화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이는 1차적 원인일 뿐 지구온난화로 인한 사상 최고의 고온과 수개월 동안의 가뭄이 이번 산불의 불쏘시개 노릇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2014 기후변화 종합보고서’ 등을 보면 현재보다 지구 평균기온이 2도 올라갈 경우 폭염, 폭우, 산사태, 가뭄, 해수면 상승 등으로 사람과 생태계에 큰 재앙이 닥칠 것으로 전망된다. 곤충 18%, 식물 16%, 척추동물 8%의 서식지가, 바닷속 산호의 99%가 사라질 수 있다. 코알라뿐만 아니라 지구 위에 사는 동물들이 ‘기능적 멸종’ 위기에 몰릴 수 있는 것이다.

그다음은 인간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언젠가 ‘인간의 기능적 멸종’이란 말이 나오지 않을까. 최근 과학자와 환경단체들이 ‘지구온난화’ 대신 ‘지구가열’이라고,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라고 부르는 것은 ‘기능적 멸종’이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는 경고다.

현재 코알라 장갑, 고양이 이불, 캥거루 주머니 등 동물 구호에 쓰일 직물 기부가 전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세계 각지에서 복구 지원을 위한 성금을 보내는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지구가열’과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행동도 더는 미룰 수 없을 듯싶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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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블라


리키가 부러워요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사 진진 제공

“Sorry, we missed you.” 영국 택배회사에서 부재중 수취자에게 남기는 메시지 카드 위 문구다. 켄 로치가 플랫폼노동자를 다룬 (사진)의 원제다. 리키는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택배회사에 취직한다. 성실한 그는 다른 사람이 그만둘 때 피해를 봐왔고, 자신이 노력한 만큼 버는 일이 좋다고 면접에서 말한다. 리키는 택배용 차량을 빌리지 않고 구입하는데, 선불금을 내기 위해 사회복지사 아내가 타고 다니던 차를 판다. 꿈에 부풀었기 때문이다. 주 6일 하루 14시간씩 눈 딱 감고 6개월만 일하면 일이 다 잘 풀릴 것 같다. 하지만 벌이에 벌금은 계산되지 않았고 소통 없는 가정도 계산 밖이었다. 아들은 학교를 빼먹고 그라피티(벽화)를 하러 다니고, 차가 없는 아내는 방문하는 집마다 지각한다. 다툼이 잦아지자 딸은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한다.
취업 첫날 동료는 플라스틱병을 건넨다. 소변통이다. 그는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니, 갓길에 차를 대고 소변통을 꺼내서 급하게 용무를 해결해야 한다. 자영업자는 허울일 뿐 운전석을 2초만 비우면 삑삑대는 스캐너의 노예가 되어간다. 하루 빠지면 벌금이 일당보다 더 많으니 빠질 수가 없다. 아들의 절도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들러야 하지만 갑작스러운 조퇴는 허용되지 않는다. 지친 리키가 휴가를 내러 가자, ‘단지’ 스캐너를 관리할 뿐인 매니저는 말한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대체기사 못 구했어? 다들 아내가 아프다, 누이가 집을 나갔다, 딸이 자살 시도를 했다, 치질이다 그러는데 왜 나한테 다들 그러는 거야?” 자영업은 ‘모두 자기가 책임진다’는 다른 말이었다.
한국에서 택배기사의 삶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리키가 미안해할지도 모른다. 리키의 배달량은 1t 차량을 가득 채우는 한국 택배기사의 할당량에 비해 상황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 리키는 시간 안에 배달해야 하는 택배 때문에 마음 졸이는데, 한국에선 새벽 3~4시에 배달하는 ‘새벽배송’이 대세가 되었고, 주문하면 바로 배달해야 하는 ‘배달슈퍼’도 등장했다. 미안해요, 리키. 한국 택배기사는 당신이 부럽대요.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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