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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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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는 가축이 될까

여우개부터 반려여우까지…

진화의 변곡점을 지나는 여우
등록 2018-10-13 09:01 수정 2020-05-02 19:29
왜 어떤 동물은 가축이 되고 어떤 동물은 가축이 되지 못했을까? 얼룩말은 가축이 되지 않은 대표 종이다. 영국의 박물학자 월터 로스차일드는 얼룩말을 런던으로 가져와 마차를 끌게 하기도 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왜 어떤 동물은 가축이 되고 어떤 동물은 가축이 되지 못했을까? 얼룩말은 가축이 되지 않은 대표 종이다. 영국의 박물학자 월터 로스차일드는 얼룩말을 런던으로 가져와 마차를 끌게 하기도 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는 죽기 전에 한번 가보고 싶은 도시다. 일생의 여행지로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에 올려놓고는 유럽행 비행기에서 창문 귀퉁이 아래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시베리아의 광막한 평원에 외로운 점처럼 찍힌 이곳에 내가 주목하는 이유는, 그 옆에 아카뎀고로도크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사회주의 과학의 전초기지로 과학기술의 최첨단 영역을 개척했으나, 구소련 몰락과 함께 쇠락한 과학도시. 하지만 이 도시의 러시아 세포유전학연구소는 몇 차례 위기를 떨쳐내고 연구를 계속한다. 세포유전학연구소가 반세기 동안 번식시키며 연구하는 것은 단 하나의 동물. 이 동물에게서 다음과 같은 행동이 나타나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① 아는 사람을 보면 꼬리를 흔든다.

② 이름을 부르면 다가온다.

③ 쓰다듬어달라고 위를 올려다본다.

‘개’를 만들어내다
러시아 세포유전학연구소에서 순한 개체끼리 교배해 탄생한 여우. 얼룩이 생겼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러시아 세포유전학연구소에서 순한 개체끼리 교배해 탄생한 여우. 얼룩이 생겼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런 행동을 한 동물이 개였다면, 연구소는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여우를 번식시켰다. 그리고 불과 4~5세대 만에 여우를 ‘개’로 만들었다.

1959년 여우 연구를 시작한 드미트리 벨랴예프에 이어 그의 제자 류드밀라 트루트가 세포유전학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그들이 사용한 방법은 육종(Artificial Breeding), 그러니까 ‘인위선택’이었다.

여우의 체형, 골격, 털빛 등 외양은 무시한 채 오직 성격만을 봤고, ‘순한’ 개체만 선택했다.

맨 처음 에스토니아에서 시작해 아카뎀고로도크로 이어진 여우농장에서 두 과학자는 인간에게 살갑게 구는 개체들만 선택해 그들끼리만 교배시켰다. 여우는 1년에 한 번 번식한다. 몇 세대를 거치자 여우가 ‘개처럼’ 행동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사실 동물의 가축화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크게 두 가지 질문이 베일에 싸여 있다.

첫째, 왜 어떤 동물은 가축이 되었는데, 어떤 동물은 야생 상태로 남아 있는가? 의외로 우리가 길들여 인간의 문화로 데려온 동물은 그리 많지 않다. 개·고양이 같은 반려동물, 식용 목적으로 끌어들인 소·돼지, 그리고 꿀벌 같은 곤충을 합해도 가축이 된 종은 수백만 종 중에서 수십 종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 수수께끼는 가축이 된 포유동물은 이상하게도 비슷한 특성을 지닌다. 귀가 늘어지고 꼬리는 동그랗게 말리며 얼룩무늬가 생긴다. 큰 눈과 짧은 주둥이, 평평한 얼굴 그리고 장난스럽고 귀여운 행동 등 유형성숙(Neotony·어른 동물이 어린 동물의 특징을 가진 것)의 특징을 보인다.

드미트리 벨랴예프가 연구를 시작한 이유는 야생동물이 가축이 되는 과정을 재연해봄으로써 수수께끼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축화된 동물에게는 일반적인 특성이 있으리라고 봤다. 여우농장에 사는 여우 중 인간과 잘 어울리는 ‘엘리트’군을 선별해 개체를 늘려나갔다. 4세대에서 한 여우가 꼬리를 흔들었고, 8세대에서 꼬리가 뒤로 말리는 개체가 나타났다. 그의 제자 류드밀라 트루트는 ‘푸신카’라는 여우를 집 안에 들여 키웠다. 집 밖에서 낯선 낌새를 눈치챘을 때, 푸신카는 개처럼 짖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여우는 개와 비슷한 행동 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연구는 이들의 유전자가 다른 ‘야생 여우’와 유전자 수준에서 다르다는 게 확인됐다.

1만5천 년을 불과 반세기 만에

개는 가장 먼저 가축이 된 종이다. 최소 1만5천 년이 걸렸고, 호모사피엔스가 내다버린 음식을 먹던 늑대(와 비슷한 종)가 인간 사회에 ‘합류’했다는 게 대개의 추측이다. 긴 시간 동안 인류는 대체로 특정 성향을 선호했을 것이고, 개 입장에서도 인간의 요구에 부합하거나 잘 어울리는 개체와 그의 자손이 좀더 많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벨랴예프는 반세기도 안 되어 ‘여우개’를 만든 것이다. 인간이 적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개입함으로써 유전자 선택에서 나타나는 비효율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세포유전학연구소가 만든 여우개는 외국의 일반 가정에 입양되기도 한다. 약 9천달러를 주면,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동물보호단체를 운영하는 에이미 바세트 부부도 그중 하나인데, 집 안 여기저기 하는 영역 표시와 그로 인한 역한 냄새,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 때문에 여우개가 개처럼 인간의 친구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확실히 매력적이고 놀랍긴 하지만, 여우는 여우입니다. 여우를 가축으로 만들었지만, 개로 만든 건 아닙니다.”

길들이는 것과 가축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길들이는 것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으로 행동을 끌어낼 수는 있지만, 유전자를 바꾼 건 아니다. 이를테면 돌고래쇼에 출연하는 돌고래는 인간에게 ‘길들여졌지만’(tamed), ‘가축이 된’(domesticated) 동물은 아니다. 그래서 돌고래는 감옥 같은 수족관에서 고통스럽고, 바다에 있어야 편안하다. 유전자적으로 그러하다. 반면 여우개는 상당 부분 가축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수준의 가축과 인간과 교감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개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나는 노보시비르스크 상공을 지나 지금 영국 런던의 남서부에 있다. 영국의 야생 여우는 도시에 진입해 청소동물로 살기 시작했다. 주 먹이는 야생 여우처럼 쥐 같은 작은 설치류지만, 음식물 쓰레기 같은 짭짤한 간식이 있다. 런던에만 1㎢당 8마리가 산다.

여우는 진화하는 것일까

유튜브에는 각종 기행을 부리는 ‘구미호’ 천지다. 지붕에 누워 고양이처럼 일광욕을 하거나 집 안에 들어와 태연히 먹이를 구걸하는 여우들의 태도에 사람들은 처음에 기막혀하다가 나중에는 혐오하거나 애정을 품는 유형으로 나뉜다. 여우를 애완동물로 맞아들이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실제로 분양업자들이 있고, ‘애완여우’ 영상 또한 유튜브에 천지다.) 물론 이들은 길든 것일 뿐 아카뎀고로도크의 여우처럼 유전자적 변화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주일에 두어 번 여우는 내가 사는 집의 뒤뜰에 다녀간다. 며칠 전에는 어른 주먹 두 개는 넉넉히 들어갈 만한 큰 구멍을 파놓고 갔다. 여우는 먹이를 가져와 숨기는 동물이다. 구멍을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여우는 자신들 진화 역사의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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