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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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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사랑한 돌고래 ‘오포’

뉴질랜드 오포노니마을에 나타난 돌고래,
오포는 인간들과 놀기 위해 얕은 물까지 왔는데
등록 2020-05-04 15:16 수정 2020-05-08 01:19
어느 날 뉴질랜드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찾아온 돌고래 ‘오포’는 어린이들과 즐겁게 놀았다. 인간과 동물의 평화가 유지되던 여름날이었다. 뉴질랜드국립박물관 제공

어느 날 뉴질랜드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찾아온 돌고래 ‘오포’는 어린이들과 즐겁게 놀았다. 인간과 동물의 평화가 유지되던 여름날이었다. 뉴질랜드국립박물관 제공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3절)

사람을 찾아온 돌고래

1955년 6월 뉴질랜드 북섬 마을 오포노니에 돌고래 한 마리가 나타났다. 돌고래가 눈에 띄지 않던 곳이라, 마을 앞으로 가까이 온 돌고래를 마을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는 세 마리가 왔다고 한다. 수면 위로 지나가는 등지느러미를 보고 상어로 오인해 두 마리를 총으로 쏴서 한 마리만 남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돌고래 ‘오포’는 사람에게 거리낌이 없었다. 맨 처음 고깃배를 따라왔는데, 이후 오포노니마을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을에는 나무 부두다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난간에 매달려 바다를 볼 때, 오포는 훌쩍 뛰어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따뜻한 여름이었다. 사람들은 비치볼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갔고, 오포는 비치볼을 튕겼다. 사람과 돌고래는 함께 놀고 수영했다.

특히 오포는 어린이를 좋아했다. 에릭 리존슨이 찍은 사진집 <오포: 호키안가의 돌고래>에는 오포와 노는 수많은 아이의 사진이 있다. 하얀 모자를 쓴 13살 소녀 질 베이커가 손바닥을 펴서 바닷물 속으로 넣었다. 오포가 지나가면 손바닥 위로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오포는 저쪽 바다 위로 떠올랐다. 돌고래가 물살로 13살 소녀의 손바닥을 핥고 지나간 것처럼, 사람들에게 돌고래를 마주친 짧은 순간은 기억 속에 길게 자리잡았다.

“어떤 날은 약 2천 명이 모래밭에 서서 바닷가에서 오포가 노는 것을 보았다. 자동차, 트럭, 오토바이 그리고 버스 열여섯 대가 마을을 둘러쌌다”고 리존슨은 책에 썼다. 오포노니마을이 생긴 뒤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온 적도, 한두 개밖에 없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장사가 잘된 적도 없었다. 오포 덕분이었다. 1955년 말, 뉴질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대통령도 스포츠 선수도 아니었다. 돌고래 오포였다. 오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 한적한 마을 앞바다에서 노닐었다.

어린이들은 오포 옆에서 수영하고, 오포를 만졌다. 많은 아빠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아이를 번쩍 들어 돌고래에 앉혔다. 실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오포는 자기 등을 대주었다. 그 모습이 사진 찍혔고 더 많은 사람이 왔다. 다행히 오포는 많은 사람이 오는 것에 괴로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리존슨은 말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작살포를 맞고 죽어갔던 게 고래들의 운명이었다. 저 먼바다에선 돌고래쇼를 한다고 돌고래를 그물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오포노니마을은 인간의 동물 지배가 유예된 유토피아 같았다.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이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나라”(이사야서 35장 1절)가 바로 오포노니마을에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불길한 사건의 연속

뜨거운 여름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오포노니 바닷가는 대도시 저잣거리 같았다. 어떤 어른들은 오포를 힘주어 밀거나 지느러미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오포는 꼬리지느러미로 물벼락을 내리쳤지만 어른들은 깔깔깔 웃을 뿐이었다. 어른은 아이를 오포에게 태워주려고 정말 절박하게 쫓아다녔다. 오포는 지그재그로 군중 속을 빠져나가며 사람들이 뻗는 손을 거부했다. 마을 사람들은 인파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윗마을 사람들은 오포의 명성 덕을 보려고 오포를 상류로 유인해 데려가려고 했지만, 오포는 진흙 섞인 강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로프티 블롬필드라는 유명한 레슬링 선수가 친구와 함께 오포를 들어보겠다며 객기를 부려서 말썽을 빚었고, 그 뒤 누군가 오포에게 총을 쏘기도 했다. 주민들은 오포보호위원회를 만들어 “우리 명랑한 돌고래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라고 쓴 입간판을 세웠다.

어느 날, 오포가 폴짝폴짝 뛰면서 고깃배를 따라갔다. 입수 지점을 잘못 잡은 거 같았다. 오포는 프로펠러에 긁혀 상처가 났다. 이 사건 이후 오포보호위원회는 정부에 보호 조처를 요구했고, 오포노니 앞바다에서 돌고래를 데려가거나 괴롭히면 벌금 500파운드를 물린다는 법률이 시행됐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1956년 3월8일부터 오포가 보이지 않았다. 전에도 며칠 잠적한 적이 있었으므로 걱정하지 말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과열된 분위기가 돌고래를 내쫓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침묵이 마을을 휘감았다. 이튿날, 오클랜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온 손님들이 모래사장 활주로에 내렸다. 그날 오후 오포가 발견됐다.

한 마오리족 노인이 마을에서 2㎞ 떨어진 곳에서 조개를 캐고 있었다. 썰물이 나가고 바닷물이 고인 너럭바위 위에서 오포를 발견했다. 죽은 채였다. 살갗은 군데군데 상처 나서 벗겨졌고, 머리와 등에는 깊게 베인 자국이 있었다. 아마도 썰물이 되면서 고립돼 죽은 것처럼 보였다. 원래 일반적인 돌고래라면 수심이 낮은 곳까지 다가와 헤엄치지 않는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포는 오포노니 앞바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얕은 바닷물이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오포가 자살했을 것이라고 했다. 친구를 잃고 외로워서, 바닷물이 빠져나갈 때 그냥 움직이지 않기로 결심했을 거라고…. 마을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뉴질랜드 국민도 충격에 빠졌다.

적당한 거리에서 생기는 신뢰와 책임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신뢰와 책임이다. 아이들은 신뢰받을 때, 스스로 책임지고 행동한다. 신뢰와 책임은 ‘적당한 거리’를 둘 때 생긴다. 너무 가까우면 (둘은 하나이므로) 신뢰조차 할 필요 없고, 너무 멀면 책임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비단 아이와의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사람과 야생동물이 적당한 거리를 두는 데 실패했기에 오포노니의 천국은 파국을 맞았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두 존재가 하나 되는 건 한여름 밤의 꿈처럼 허망한 일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기에 어른이 되는 것이다.

남종영 <한겨레>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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