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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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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뜰로 나온 박래군

보석으로 석방된 그의 마지막 편지 ‘110일의 여행을 마치면서’… ‘더 큰 감옥’에서 다시 나서는 여행길, 당신과 만나길
등록 2015-11-10 13:05 수정 2020-05-02 19:28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떠나야 했던 여행을 가을이 머무는 계절에 마쳤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부천 역곡천 주변을 달렸습니다. 상쾌한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머릿결이 보기 좋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집 근처 학교에 다니는 둘째를 차로 태워다주었습니다. 학교 교정에 들어서니 단풍 든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렸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담장 너머로 큰 나무들의 윗부분만 볼 수 있었는데, 지금 나는 내 발로 걸어나와서 단풍 든 나무를 보고, 거리를 걷습니다.

110일간의 수감 생활 끝에 나온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 11월2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 헌화하고 있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

110일간의 수감 생활 끝에 나온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 11월2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 헌화하고 있다. 김덕진 천주교인권위

혼자 밥 먹지 않아도 됩니다

지난 11월2일 저녁 7시를 넘은 시간에 저는 서울구치소의 육중한 철문 앞에 섰습니다. 이 문을 들고 날 때는 수갑이 채워지고 포승줄에 꽁꽁 묶여서 호송차를 통해서였습니다. 몇 개의 철문을 지난 다음에야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곳의,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마지막 육중한 철문이 열렸습니다. 수갑도 안 차고, 포승에 묶이지 않고, 두 발과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걸어나왔습니다. 그 문 앞까지 와준 아내와 활동가들, 그리고 더 걸어 내려가 정문을 나서니 세월호 유가족들까지 그 밤에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들과 손을 맞잡고, 포옹을 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유리벽 없이 기쁨을 나눴습니다. 그게 단 두 시간 반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110일 동안 시간을 훌쩍 넘어서 세상에 돌아오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습니다.

그길로 광화문으로 달려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영정을 모신 제단 앞에 섰습니다. 작은 액자들 속에서 생전의 모습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습니다. 추석날 아침, 구치소에서 배식해주는 밥과 음식, 그리고 몇 가지 구매물을 놓고 차례상을 차렸습니다. 무척이나 허접한 차례상이었지만 마음을 모아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분들을 기억하려는 저의 성의였습니다. 절을 올리고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으니까 구천을 떠도는 그들이 모두 내게로 오는 것 같았습니다. 억울한 그 영혼들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나 싶었고, 그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눈가에 번졌습니다. 그랬던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국화 한 송이 올리고 향을 꽂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반가운 이들과 환영의 자리를 갖고, 그 뒤로 매일 공백의 시간 동안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들었습니다. 110일의 공백기 동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보다는 어려운 일, 안타까운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 일들을 정리하고, 처리하느라 마음고생을 한 활동가들의 노고가 눈에 그려졌습니다.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고 저는 쉼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아서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분들이 저를 걱정해주었고, 외로워할 것 같은 우리 가족들을 격려해주었습니다. 세상에는 참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자신이 구속된 것처럼 자신의 일처럼 달려와서 저의 석방을 위해 애써주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전 보지도 못했던 많은 분들이 저의 석방을 위해서 노력해주었고, 감옥에 면회를 와주었고, 편지도 보내주었습니다.

그런 덕분에 지금은 세상에 대한 적응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환한 불빛이 24시간 켜진 방에서 잠들지 않아도 됩니다. 1.5평 독방의 문에 있는 시찰구로 감시당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으며, 내가 스스로 몸을 움직여 어디고 갈 수 있습니다. 혼자 먹는 밥이 너무도 싫었는데, 식구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고, 보고 싶던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시끄럽게 떠들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감옥의 생활은 어쩌면 이런 소소한 일상으로부터의 격리입니다. 만날 수도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손을 잡을 수도 없게 만드는 격리, 그러면서 격리의 시간이 길어지면 결국은 기억의 소멸을 겪어야 하는 그런 격리가 감옥입니다. 그런 격리된 공간은 비좁았지만, 공간의 비좁음이 생각의 비좁음으로 강제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런 격리에 익숙해지는 것은 곧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길들여짐이 깊어지면 체념하는 시간이 오게 되겠지요. 그런 시간을 겪지 않고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옆으로는 발 뻗고 누울 수도 없는 독방을 혼자 지키면서 상상 속으로만 가능했던 일들을 이제 저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얻은 자유는 불안한 자유입니다. 보석은 언제고 취소될 수 있고, 보석이 취소되면 다시 내가 등 떠밀려 떠나온 독방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재판은 아직 1심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12월에나 마무리될 것으로 보이는 1심 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저는 다시 혼자만의 방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바라는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나의 여행은 다시 이곳 세상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더 큰 감옥’인 세상에서 어떤 여행을 해야 할까요?

“‘박래군’ ‘당신’이 우리입니다”

서울구치소에 달려온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들었던 피켓에 적힌 글귀가 생각납니다. “환영! 박래군”이라는 노란색 피켓도 있었지만, “‘박래군’ ‘당신’이 우리입니다” 그 글귀가 가슴에 남습니다. 그 한마디가 110일의 독방 여행에 대한 보상입니다. 저의 구속은 세월호 참사 피해자와 분리하려는 것이었고, 세월호 참사를 해결하려는 4·16운동의 동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의 분열을 꾀하고, 피해자들을 고립시키고, 피해자들을 지치게 하려는 저들이 지난해 참사 당시로부터 줄기차게 진행하던 모든 일들의 연장이었습니다. 세월호 국면으로부터의 탈출을 저들은 애써서 도모해왔던 것인데, 이제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목표가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가로막고, 안전사회에 대한 열망을 차단하던 세력들이 이제는 ‘노동 개악’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라는 칼을 빼어들고, 한 가닥 생존의 목숨줄마저 끊으려 하고,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재단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외관을 벗어던지고 노골적으로 유신으로 회귀하는 정국이 펼쳐졌습니다. 싸워야 할 대상은 일사불란하게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이 시간을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롯한 피해자들이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4·16운동이 주춤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피켓에서 한마디로 정리했듯이 우리는 하나입니다. 나를 그렇게 맞아주듯이 우리의 공감과 우리의 연대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맞서는 길은 여전히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그를 통해 책임자를 처벌하고, 안전사회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우리의 의지가 구체적으로 힘으로 만들어져 작동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무시당하고 모멸을 당해온 인간이 존엄한 인간으로 서는 길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이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의 온갖 ‘적폐’가 결집되어 나타난 게 세월호 참사였고, 우리는 아직 매우 위험한 세월호 승객으로 남아 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싸움을 위해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땅 밑으로도 흐르는 물을 기억하고, 언 땅에서도 움틀 날을 기다리는 한 알의 씨앗을 보다 단단하게 준비할 것이 요구됩니다.

이 더 큰 감옥을 부수는 일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곳곳에서 진행되는 인권선언 풀뿌리 토론이 있고, 지금도 이어지는 간담회가 있고, 지금도 지역 곳곳에서 움직이는 4·16운동의 주체들이 있고, 새롭게 운동의 길을 찾아가는 단위들이 있습니다. 출구가 없는 더 큰 감옥에서 문을 내고 길을 여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연결해내는 일, 이것을 모아내는 일이 4·16연대가 하려는 일일 것입니다. 더 큰 감옥에서 긴급한 주요 현안 싸움들과 연대해가면서도 4·16운동의 길을 잃지 않고 찾아내려는 노력이 중단되지 않고 있습니다.

흙, 햇빛, 바람 그처럼 더불어

서울구치소에서 꽃씨를 따왔습니다. 격벽 운동장(콘크리트 벽 사이에 들어가 혼자서 운동할 수 있게 만든 운동장)에 나가면 꽃들이 갇힌 사람의 마음을 달래줍니다. 한여름 8월에 격벽 운동장 13호실에 피어났던 분꽃들이 너무도 예뻤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들이 있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 꽃이 지고 새까만 열매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 아, 이 꽃들을 감옥 밖으로 옮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름의 끝자락에 꽃씨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밖에서는 꽃무리들이 탐스럽던 코스모스도 어딘가 자그맣고 서글픈 모습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이 꽃들도 감옥 밖에서 꽃을 피우면 달라 보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코스모스 씨도 받았습니다. 한 움큼도 안 되는 이 꽃들을 재단의 건물인 ‘인권중심 사람’의 ‘자유의 뜰’에 심으려고 합니다. 내년 봄, 씨를 뿌리면 그곳에서 싹이 나고 그게 자라서 여름이면 붉은색의 분꽃이 피어나서 화단을 덮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바람에 살랑살랑 기분 좋게 흔들릴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그 꽃들을 보면서 갇혔던 시간들을 반추해보려고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또 잊고 지낼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겨보기 위함입니다. 그 꽃들이 피어날 때면 감옥이란 벽 속에 갇혀 세상을 그리워하던 그때를 떠올릴 겁니다. 잡았던 손을 잡을 수 없게 단호하게 가로막았던 유리벽의 그 면회실과 편지로밖에 나눌 수 없었던 그 답답함의 시간들을, 그리고 화가 나는 일들을 혼자서 억눌러 삭였던 그 시간들을,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어떻게든 몸과 마음의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려 애썼던 그때의 땀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110일, 짧다면 짧지만 110일의 그 24시간들 동안 추구했던 고민과 번민을 기억해보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시 꽃들의 계절이 지나 꽃들이 시들고 열매들이 땅에 씨를 떨어뜨릴 때 그중의 일부를 받아서 다음해에도 꽃을 심겠습니다. 그 꽃들은 생명의 순환을 보여주는 소중한 씨앗입니다. 사람이 나고 죽는 일도 그 작은 꽃들의 한 생애와 다르지 않을진대 우리의 인생을 옥죄고, 내모는 악의 힘을 이기는 법을 고민하고 더 나아진 생각들을 찾아가려는 여행 중에 만나는 한 모금의 물과 같은 것입니다. 흙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고, 햇빛의 도움을 받고, 바람의 격려를 받아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꽃들의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한 그 꿈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만큼 성숙한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관계들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저의 여행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밖에 나온 제게 요구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당장은 12월1일 인권콘서트를 진행해야 하고, 12월10일에는 인권재단 사람의 후원의 밤 행사를 잘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우선은 출판사와 계약이 한참 지난 원고를 쓰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4·16연대를 중심으로 한 4·16운동의 상황들을 파악하고, 특히 전국에서 진행되는 4·16운동을 연결하는 일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은 신변상의 제약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지만, 또 다른 봄을 준비하는 겨울 동안에도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처럼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편지는 이것으로 마지막이지만, 앞으로도 이어지는 저의 여행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더 큰 감옥’에서 이어지는 여행 중에 여러분들을 만나 손을 잡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아파하면서, 때로는 지쳐서, 때로는 서로의 힘이 되어서 만나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공감을 얻고 더 깊어지게 하는, 그래서 연대의 힘을 키우는 노력을 계속하겠습니다. 저의 여행길에 동행해주시면 너무 기쁘겠습니다. 그동안 저의 편지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5년 11월6일

‘더 큰 감옥’에서 박래군 드립니다.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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