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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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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중 제일 싫은 날이 명절

없는 이의 부재를 확인하는 명절, 이번 추석 어머니를 다시 아프게 해드리네요… 쓸쓸한 명절, 배식과 파는 음식으로 차례상을 차려보렵니다
등록 2015-09-22 11:39 수정 2020-05-02 19:28

시간은 무섭도록 빨리 흘러갑니다. 어느덧 9월도 중순이고 추석도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감방 안에까지 가득 차게 울리던 귀뚜라미 소리는 이젠 안 들리네요. 새벽에 일어나면 한기조차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새벽 4~5시에 일어나는데, 어디 멀리선가 닭 홰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를 신호로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고 어둡기만 하던 사방이 아주 서서히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아침 햇살이 들어오기까지의 그 시간을 저는 좋아합니다. 아직 사람들은 저마다의 근심·걱정을 끌어안고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그 시간이고, 야간 근무자도 발소리 죽이며 순찰을 도는 때입니다. 채 햇살이 비추기도 전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깨어납니다. 이부자리 정돈하면서 꿈도 같이 포개어 개어둡니다.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거지요. 독방만 있는 저의 사동도 조용함 속에서도 수런거림이 일어납니다. 요즘 일교차가 심합니다. 새벽녘에는 긴팔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지요. 환절기라서 감기에 조심하고 있습니다.

잠자던 무죄 추정의 원칙을 살려놨는데… 

이곳에서 잘 생활하려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게 있습니다. 아픈 것과 감상에 빠지는 것. 감옥살이하면서 몸이 아프면 괜스레 서러워지고 마음까지 약해집니다. 몸의 병이 마음의 병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곳에 온 뒤 매일 땀을 흠뻑 흘리며 운동하는 이유입니다. 출소 이후보다 이곳에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감상에 젖는 일도 피해야 합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따라서 아픕니다. 의욕도 사라지고, 나갈 수도 없는 바깥 생각만 하게 되지요.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되도록 일정을 많이 만듭니다.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을 만드는 거지요. 무언가 집중해서 해야 할 일, 이곳에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잘 견뎌오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 왔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빡세게 운동도 하고 일정도 많이 만들어 소화했습니다. 그래야 정신없이 시간 보내고 잠도 푹 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몸도 마음도 안정된 게 평상심을 유지하고 한결 여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사는 저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안해하실 것도 없습니다. 오랜만에 저는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으니까요.

재판이 많이 늦어집니다. 공판준비기일에서 본재판 일정을 잡았는데 10월14일에나 첫 공판이 열립니다. 재판부 일정이 바쁘다고 하는데, 재판부가 재판하기 싫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추석 전에는 재판이 시작될 걸로 생각하고 준비했는데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겼습니다. 추석 지나고서야 재판이 시작되니까요. 재판 때 입고 나갈 사복도 추석 지나고 다시 준비하자고 면회 온 아내와 얘기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옷 얘기 좀 할까요?

1990년대 초반까지 감옥 안에서 기결수와 미결수의 복장은 구분이 없었습니다. 모두 푸른색 수의를 입었지요. 다만 미결수는 자기 돈으로 개량한복을 구해 입는 경우가 있었고요. 그러다 인권운동가들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들이 헌법소원을 내게 됩니다. 미결수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받아서 복장이 기결수와 달라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와 함께 법정에서 입는 복장도 대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게 받아들여진 거고, 그 뒤 미결수는 현재와 같이 황토색 옷으로 바뀌었고, 법정에 재판을 받으러 갈 때 밖에서 들여온 사복을 입고 나갈 수 있게 된 거죠. 그러니까 20년 정도 된 거네요. 헌법의 한 조항으로 잠자고 있던 ‘무죄 추정의 원칙’을 현실로 살려낸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것이고요. 그래서 양심수들은 굳이 관에서 지급하는 황토색 미결수 복장을 선호했습니다. ‘우리는 무죄다’라고 시위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번에 와서 보니까 미결수들이 관복을 입지 않고 기결수들의 푸른색 복장과 비슷한 색깔의 자비로 구입한 옷을 많이 입었더군요. 저와 같이 미결수 관복을 입은 사람은 소수더라고요. 애써서 복장을 바꾼 게 별 의미 없이 퇴색돼버린 느낌입니다. 법정에 나갈 때도 사복을 입고 나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요. 사복을 들여오고 준비하고 입고 나가기가 번거로운 면이 있기도 하지만, 사복을 입으면 건방져 보여서 형을 더 세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재판부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문제겠지만, 이런 생각은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헌법 안에서 잠자던 무죄 추정의 원칙을 살려놨더니 지금은 이렇게 찬밥 신세가 돼버렸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속상하지요.

그의 목표 지점, 사유화된 권력의 대미

속상한 일이야 너무 많지요. 기껏 싸워 확보한 권리를 지키려고도 하지 않는 이런 사례도 있지만, 신문으로 읽는 바깥 소식도 좋은 일이 거의 없더군요. 남북이 8·25 합의를 하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 잘됐다 싶으면서도 걱정이 됐던 거지요. 1972년처럼 남북관계 개선을 국내 정치에 악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박정희는 종신 대통령이 가능한 유신헌법을 만들어냈지요. 북한에서는 김일성 유일사상 체제를 확립하는 헌법 개정을 했고요. 남과 북이 독재 체제를 강화하는 데 분단 체제를 활용한 거지요. 이번 남북 합의도 남과 북에 그렇게 이용될 수 있다고 보이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박근혜 정부는 지지율이 오르자마자 이른바 ‘노동개혁’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입니다. 말이 노동개혁이지 아예 노동자가 누리는 미약한 권리마저 빼앗고 쉬운 해고와 비정규직 확대를 가능케 하겠다는 거잖아요. 거기에 한국노총이 들러리를 서고 있고, 민주노총은 아예 존재감이 없네요. 시한까지 못박아놓고 밀어붙이는데 마치 소수의 노동귀족들 때문에 청년고용이 안 되는 것처럼 프레임을 짜고 밀어붙이는군요. 이걸 어떻게 막지요?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고 파견노동 요건을 강화해야 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하고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데, 완전히 거꾸로 가면서 노동자들은 찍소리도 못하는 노예로 만들 작정이지요.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원들마저 모두 비정규직이었음을 알고 경악했지요. 생명과 안전마저 경제 논리에 맡겨진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했지만 그때의 절박했던 문제의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가요? 지금의 노동문제는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닌데, 이러다가 이번 국회에서 정부 의지대로 노동법 개악이 무더기로 되지 않을까 걱정이군요.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반대하는데도 밀어붙이네요. 결국 박정희를 미화하겠다는 거지요. 친일파 나라를 분명히 하겠다, 박정희의 명예 회복을 하겠다는 욕심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낳고 있지요. 교학사판 교과서로는 안 되니 국정교과서로 방향을 선회했고, 2017년부터 단일한 국정교과서로 수업을 하겠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인 2017년은 박정희 탄신 100년이 되는 해라지요? 그의 마지막 목표 지점이 그곳인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사유화된 권력의 대미를 장식하는 거지요.

추석날 열릴 합동차례에 함께해주시기를, 미수습자 9명의 이름을 불러주시기를. 지난 2월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펼침막을 들고 세월호 인양 촉구 시위를 하고 있는 허다윤 어머니. 한겨레 김성광 기자

추석날 열릴 합동차례에 함께해주시기를, 미수습자 9명의 이름을 불러주시기를. 지난 2월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펼침막을 들고 세월호 인양 촉구 시위를 하고 있는 허다윤 어머니. 한겨레 김성광 기자

그리고 295명 그리고 다시 11명?

화나는 일은 한둘이 아니어서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습니다. 추자도 낚싯배 침몰 사건도 그래요. 학습 효과가 있어서 대통령은 즉각 반응을 보였지만 이런 일 잘하라고 만들었다는 국민안전처는 보이질 않네요. 해양수산부에서 국민안전처로 옮긴 해경은 여전하지요. 사태 파악도 못하고 엉뚱한 곳이나 수색하고요. 세월호 참사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요? 여전히 세월호 이전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 위에서 살아야 하나요? 그런 걸 생각하면 우울하지요. 어디서부터 바꿔야 하나 생각하면 절망적입니다. 의식이 깨어나고 행동으로 나서는 속도보다 그나마 있던 마지막 ‘지지대’를 파괴하는 저들의 속도는 몇 배 더 빠르니까요. 너무도 빠르게 이 사회를 철저하게 부수는 것 같아서 절망적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보았던 적폐들이 청산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돼 가난한 이들의 목숨줄을 짓누르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 힘이 들어서 눈감고 싶은 건가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민주공화국이 너무도 아득한가요? 이럴 때 박민규가 말하지요. “이것은 마지막 기회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감옥에 있는 저에게 힘내라고 응원의 편지와 엽서를 보내왔습니다. 인천의 ‘기차길옆 작은학교’의 아이들이 그렇고, 충북 청주의 초등학생들이 그렇습니다. “아저씨는 죄가 없어요. 우리가 응원할게요.” 인천 초등학생들은 그림편지도 그려주었고요. 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외면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번 추석 명절 어떻게 보내시나요? 저는 1년 중 제일 싫은 날이 명절입니다. 식구들, 조카들, 친척들 보는 게 싫어서가 아닙니다. 없는 사람의 부재를 확인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오는데 올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는 거지요. 동생이 떠난 뒤 매년 명절 때마다 어머님의 눈물을 확인하고는 했습니다. 지금은 그 어머님의 눈물도 말라버렸을까요? 올 추석, 그 어머님을 다시 아프게 해드려야 해서 마음이 안 좋습니다. 남편을 감옥에 두고 시골에 내려갈 아내, 아빠 없이 명절을 지낼 두 딸도 눈에 밟힙니다.

이번 추석, 좀 쓸쓸하겠지요? 저도 이곳에서 추석을 어떻게 지낼까 궁리 중입니다. 차례상을 준비해야 하는데, 여기서 제수 준비가 쉽지 않군요. 과일이라고 해야 사과와 복숭아를 파는데 복숭아는 제사상에 올리면 안 되는 거고, 고기는 포장된 닭고기며 돼지고기는 있는데 생선은 영 없습니다. 추석 직전에 약과를 파는 게 있군요. 암튼 이것저것 구매해서 상을 차려보려고 합니다. 밥과 국을 따로 지을 수 없으니 아침 배식받는 걸로 쓰고요.

제 책상 앞에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이름을 적어놨습니다. 그 옆에 ‘그리고 295명’과 ‘그리고 다시 11명?’과 ‘잊지 않기 위해’라고 적어두었습니다. 뒤에 ‘11명?’은 수색 작업 중에 돌아가시거나 한 분들인데 이분들의 이름도 모르겠고 숫자도 정확하지 않아서요. 그래도 같이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너무 조촐한 제사상이겠지만, 상 차려놓고 그 앞에서 제문이라도 읽으려 합니다.

곁에 서주고 이름도 불러주세요

그날 아침 돌아오지 못한 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짓고 가슴 뜯을 사람들도 생각하고요.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명복도 빌고요. 제문이라도 정성껏 지어볼게요. 그리고 저처럼 식구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생각하겠습니다. 특히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 그날도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을 생각하겠습니다.

추석날 아마 경기도 안산과 서울 광화문에서 합동차례가 있겠지요. 가능하신 분들은 그 합동차례에도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유가족들의 곁에 서주시고요, 미수습자 9명의 이름도 나직이 불러주세요. 우리가 잊지 않았고 끝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마음을 전해주세요. 그날 저도 이곳에서 마음으로나마 손을 꼭 잡겠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석 명절 잘 보내고 다시 편지 드릴게요. 안녕히!

2015년 9월15일 아침. 서울구치소에서 박래군 드립니다.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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