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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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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도, 딸도 한번 안아볼 수 없지요

9월 초부터 열릴 재판 준비하며 보내는 박래군 인권운동가의 1.5평 독방 생활 “재판도 투쟁이니 충실히 하겠습니다”
등록 2015-09-03 17:27 수정 2020-05-03 04:28
0.75평 독방에 수감된 양심수를 기억하기 위한 감옥 체험이 벌어진 적이 있다. 1996년 9월 이장호 영화감독이 1일 감옥 체험을 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0.75평 독방에 수감된 양심수를 기억하기 위한 감옥 체험이 벌어진 적이 있다. 1996년 9월 이장호 영화감독이 1일 감옥 체험을 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인권운동가 박래군은 ‘4·16 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으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세월호 1주기에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는 혐의로, 지난 7월16일 구속됐다. 이 무리한 부탁을 했다. 옥중 편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끝나지 않은 편지는 앞으로 올 때마다 실린다. 이번이 두 번째 편지다. _편집자

10분, 이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단 10분, 오는 데까지 1시간이 걸리든 2시간이 걸리든 모두에게 단 10분만 허용됩니다. 예약이 되었을 경우 미리 누가 접견(면회) 예약했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꼭 언론사 기자가 아닌가 확인합니다. 구치소에서 굉장히 예민하게 굽니다.

접견 시간이 되면 인솔하러 옵니다. 통보를 받고 옷을 갈아입고 선풍기를 끄고 신발을 신고 나와서 접견 대기실까지 10분 안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순서를 기다리면서 10분 동안 무슨 얘기를 나눌까 생각합니다. 벨이 울려서 접견실에 들어가면 대화 장면이 모두 녹화가 되고, 교도관이 대화 내용을 적습니다. 모든 접견 내용은 검찰이 점검하기 때문에 이것을 의식하면서 말도 가려서 해야 합니다.

허락된 접견 시간은 단 10분

나와 상대방의 거리는 겨우 몇cm밖에 안 되지만, 우리의 사이는 단호한 투명 차단막으로 막혀 있습니다. 목소리도 기계장치를 통해 전달됩니다. ‘10’이란 숫자가 들어와야 대화가 가능합니다. 숫자는 점차 낮아지고, ‘1분 남았다’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서로 다급해집니다. 그 짧은 거리에서 우리는 보고 웃지만, 손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 아내도 우리 딸들도 한번 안아볼 수도 없습니다. 종료 벨이 울리면 자리를 빨리 내줘야 합니다. 벨소리와 동시에 다음 사람이 내 자리에 들어오고,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당신들은 밖으로 나갑니다.

10분의 만남… 예전에 소록도에 한센인 부모와 자녀가 만나던 곳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단 한 번 부모와 자식들이 몇m 간격을 두고 만납니다. 폴리스라인도 아닌데 절대 양쪽으로 쳐진 그 줄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큰 소리로 잘 있냐고 물어보고 눈물로 일별해야 했던 장소(그 장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군요)가 떠오릅니다. 지척에서 안타까이 돌아서야 했던 한센인 가족들의 설움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보고 싶던 가족의 손도 잡아보지 못하고 돌아설 때 마음이 좋을 리 없습니다. 애써 웃으려 하고, 가급적 웃으면서 손 흔들어주고, 때로는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려 보여도 그렇습니다. 지난주 세월호 유가족들 중에 같이 온 한 엄마가 눈물짓던 모습이 자꾸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와서 내게 미안하다고 하는데 그 유가족들이 미안할 게 없는데….

한번은 ‘영치금 4천원’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받아본 가장 적은 액수의 영치금입니다. 대학생 5명이 접견을 왔습니다. 그들이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나의 제자도 있고, 내 강의를 듣지 않은 학생도 포함돼서 5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보고 너무 안쓰러워했습니다. 자신들도 나의 석방을 위해 학생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경희대에서 지난 학기까지 5학기 동안 1주에 2시간씩 강의를 했습니다. ‘후마니타스칼리지’의 나름 인기 있는 강의였습니다. 매번 수업평가가 높게 나왔고 학생들이 강의를 서로 들으려 했다고 하니까요.

‘인권’ 수업인데 처음에는 인권에 대해 많은 걸 가르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인권의 현실에 대해 사례를 들어 얘기를 풀어가고 역사적인 인권 현장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남영동 대공분실 등- 찾아가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 용산 참사 현장, 광화문 세월호 광장을 찾아가 피해 당사자들의 얘기를 듣게 했습니다. 그리고 막걸리도 같이 마시면서- 학생들은 돈이 없으니가 술값은 내 몫- 대화를 갖고는 했던 게 좋았나봅니다. 지난 학기는 도중에 구속될까봐 노심초사했습니다.

대학생 5명이 건넨 ‘영치금 4천원’

그때 만났던 그들이 찾아와서 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돈이 ‘1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돈으로 복숭아 한 봉지와 요구르트를 사서 넣고, 남은 돈 4천원은 영치금으로 넣었던 거지요. 그 접견물과 영치금 영수증을 받고 뭉클했습니다.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아이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평소 중고생들에게 눈길도 제대로 안 주고 했는데 그 뒤로는 중고생들 교복만 보면 울컥하고는 했습니다. 중고생만 아니라 젊은 아이들만 보면, 세월호의 그 아이들 얼굴이 겹쳐 보였습니다. 대학생인 두 딸도, 수업시간에 만나는 그 학생들도 예전의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꿈을 꾸며 살 수 있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내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싸움에 나서지 않았다면? 너무 괴로웠을 겁니다.

그런데 내가 나서기도 전에 이미 시민들이 나섰습니다. 한 명이라도 생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촛불을 든 것도, 그런 기적을 바라며 노란 손수건을 만들고 배지를 만들어 단 것도 시민들이 먼저였습니다. 나는 고민만 하다가 늦게서야 시민사회단체를 모으는 일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4·16연대를 만들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8·15 광복 70주년 연휴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담화에도 화가 났고, 아무런 비전도 없는 빈 껍데기의 대통령 경축사도 실망스러웠습니다. TV 특집 방송도 그런 꼴이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를 보여주면서 일제의 만행만 얘기하더군요.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친일파가 득세하고, 바로 그 서대문형무소 자리에서 반공투사로 둔갑한 친일 경찰들이 저지른 고문과 갖은 악행들, 그리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싸우던 인사들에게 가한 반인권 행위는 아예 잘라버리더군요.

광복 70주년을 통해 일제 식민지에서 친일파의 나라로 바뀐 치욕의 역사를 이곳 구치소에서 새삼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승만을 국부로 숭앙하자는 얘기가 거침없이 나오는 거죠. 아직 우리는 친일파의 나라를 벗어나지 못했고 진정한 해방을 이루지 못한 것, 그런 나라에서 세월호와 같은 대참사를 겪은 겁니다.

나는 8·15 연휴 때 독방에 갇혀 지내면서 지난해 8·15를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 “고통 앞에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씀은 지금도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광화문 시복식에서 단식 중이던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만나는 장면도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교황은 올해 로마를 방문한 한국 천주교 주교들에게 세월호 참사의 상황을 물었다고 하지요.

운동도 면회도 없는 날은 ‘곱징역’을 사는 날

8·15 연휴 직전에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접견을 왔습니다. 광화문의 시민들 여럿과 함께, 유리창에 손을 대고, “형님, 아무 생각 말고 건강만 챙기세요. 건강하셔야 합니다”라고 외치더군요. 알았다고 말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오랜 단식으로 반쪽이 되었던 그때의 얼굴이 겹쳐 보였습니다. 힘든 몸을 겨우 일으켜 지팡이를 짚고 청와대 앞 1인시위에 나서던 모습, 그만해라 해도 한사코 고집을 피우던 그의 모습, 결국 단식 40일 만에 병원으로 갔고, 다시 46일 만에 단식을 끝냈던 건 8월28일이었습니다.

올해 8월28일은 세월호 참사 500일이 되는 날이지요. 많은 행사와 집회가 있을 텐데, 많은 이들이 모일지 모르겠네요. 유민 아빠의 단식이 길어지자 시민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동조 단식자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중에는 사람 죽는다면서 유민 아빠의 단식을 빨리 중단시키라고 마구 몰아붙이던 분들도 계셨습니다. 당신들이 대신할 테니 단식을 중단시키라고 했던 분들, 그 뒤에 광화문에서 뵐 수 없었는데, 아마도 자기 지역에서 잊지 않고 열심히 하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이어진 유민 아빠에 대한 신상털기와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온갖 비난, 모욕주기, 욕하기도 기억납니다. 급기야 9월6일에는 일베들이 국민 단식농성장에 몰려와 폭식투쟁을 했지요. 이들에게 피자를 사주며 격려했던 분들은 그 뒤 새누리당의 무슨 위원회 위원으로 영입됐고요. 지난해 그 뜨거웠던 여름의 광화문의 기억, 세세한 일까지 기억나네요. 우리는 그때부터 광화문을 떠난 적이 없고, 지금은 세월호 광장으로 새 단장 해서 그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많은 분들이 잊었지요? 정부는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를 노골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있지요. 이 정부는 무엇이 그리 두려운 걸까요? 분명 감추고 싶은 게 많은 것 같습니다. 4·16연대 안에 진상규명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는데 시민들과 함께 무슨 활동에 들어갔나요? ‘82대 과제’를 발표한 것은 알고 있는데요. 특조위가 잘 활동하기 어려운 조건일수록 피해 당사자인 가족들과 시민들이 함께하는 진상 규명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으면 좋겠어요. 꾸준히 진상 규명 과제를 드러내는 일을 계속하는 거지요. 세월호 인양을 위한 조사 작업도 진행되고 있는데 특조위도 배제하고 유가족들의 접근도 막는다고 하지요. 여기도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것 같고요.

오늘은 처서. 무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도 지나면 이제 곧 가을이 되겠군요. 마침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살았습니다. 운동도 면회도 없는 이런 날은 방 밖에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므로 ‘곱징역’을 사는 날입니다. 약 1.5평(5.04㎡)이라고 하니, 우리 집 화장실만 한 공간이지요. 아내는 내가 사는 방이 화장실만 하다는 말에 울음이 났대요. 저런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예전에는 0.75평 독방에도 살아봤어요. 1980년대까지 독방은 모두 0.75평이었지요. 그 독방은 관짝 같다는 인상을 주었어요. 문짝 폭만큼의 너비, 방 자체가 관 같았던 거지요. 그러다가 1.01평 독방에 살게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독방도 살 만하네.’ 그런데 1.01평보다 0.5평이 더 넓은 1.5평 독방인 겁니다. 몸이 기억하는 그때의 독방에 비하면 꽤나 넉넉한 공간이지요. 하지만 처음 이런 공간에 사는 사람은 답답해서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 같네요. 이런 독방에서 사는 내가 안쓰러운가요? 그런데 사회에서도 겨우 이만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쪽방촌 사람들이 있고요, 이만한 공간도 없어서 길거리에서 자는 가난한 이들도 있어요. 그러니 너무 안쓰러워 마시길.

“영혼을 파는 사람은 되지 말자”

제가 있는 이곳은 대한민국의 변방이고 오지입니다. 놀러오라고 초청해도 아무도 올 수 없고, 철저하게 ‘안티 디지털 아날로그 지대’라서 컴퓨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정보의 오지입니다. 이곳에서 검찰 수사기록도 보면서 9월 초부터 열릴 재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재판도 투쟁이므로 준비를 충실히 해야 이길 수 있으니까요. 재판 때 방청 오시면 절대 실망하시지 않도록 준비 잘하려고요.

오늘 편지의 마무리는 경희대 인권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했던 말로 하려고 합니다. 5학기 동안 학생들에게 했던 강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살아가면서 영혼을 파는 사람은 되지 말자”였던 것 같아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혼을 안 팔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사람이기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인데 말이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서로 사람으로 존중하며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너무나 큰 걸 요구하나요? 사실 이게 기본인데 말입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풀벌레 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리는 밤입니다. 새로운 한 주를 위해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2015년 8월23일 서울구치소에서 박래군 드립니다.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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