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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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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판, 목이 메어 하지 못한 말들

구속 100일, “내가 죽어서 네가 산다면” 노래 흘려보내지 못하고… ‘553번째 4월16일’에 생각나는 우리를 만나게 할 장면들
등록 2015-10-28 07:33 수정 2020-05-02 19:28

‘4·16 가족’들께 드립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지난 주말 설악산 단풍이 절정이라더니 이곳에서도 눈에 보이는 나무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네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관악산도 곧 단풍으로 물들겠지요. 관악산이 지척인데 저기 한 번 갈 수가 없군요. 안산도, 광화문도 가깝지만….
모두 잘 있겠지요? 가족들 여전히 잘 모이나요? 안산 분향소에도 모이고, 광화문에도 나오나요? 여전히 팽목항에 미수습자 가족들이 있나요? 동거차도에 교대로 내려가나요? 전국에서 가족들 부르는 간담회가 계속되나요? 인권선언 풀뿌리 토론에도 함께하겠지요? 물어보고 싶은 거, 궁금한 거 너무 많아요. 한 사람 한 사람, 누구 엄마, 누구 아빠 안부도 묻고 싶고요. 얼굴들이 막 떠오르네요. 모두에게 안부 인사 드립니다.
엊그제 갑자기 가족 모두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맘먹었어요. 저녁 TV에서 나오는 노래 때문이었는지 몰라요. 아는 노래가 나오더군요. 아마 송창식이 부르던 노래일 겁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딴 일을 하면서 따라 부르다가 한순간 감전된 것처럼 멈춰버렸어요. 얼굴도 모르는 테너 가수가 부르고 있었지요. “내가 죽어서 네가 산다면”, 예전에는 무심코 흘려듣던 노래였는데 이 대목을 예전처럼 흘릴 수 없었어요. 엄마가 죽어서 네가 산다면, 아빠가 죽어서 네가 살아올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 아이들과의 약속, 아이들이 내준 숙제를 하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는 4·16가족 여러분이 떠올랐어요.

‘3반’ 가족들의 손글씨 편지

지난주 수요일(10월14일), 구속된 지 석 달 만에 첫 재판이 서울중앙지법 311호에서 열렸지요. 법정에 들어서자 아내와 큰딸의 모습이 보였고, 친구들이며 동문들, 단체 대표님들과 활동가들의 반가운 얼굴이 한꺼번에 다 들어왔어요. 그 자리에 4·16 가족들도 많이 오셨지요. 오후 늦게까지 진행된 재판 과정을 지켜보신 가족들, 구속 뒤에 볼 수 없었던 가족들 보니까 눈물이 날 것처럼 반가웠어요. 검찰이 간단하게 공소 취지를 설명하고, 변호사들이 성심껏 준비한 PPT 설명이 끝나고 피고인 모두 진술 순서가 됐어요. 서면으로 작성한 걸 요약해서 말하려고 했지요.

“오늘 10월14일은 547번째 맞는 4월16일입니다.” 이 말을 하면서부터 목이 메어왔어요. 그러다가 지난 4월의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울컥했어요. 지난 2월에 한 엄마가 물었어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위원장님, 곧 봄이 올 텐데, 봄이 오면 우린 어떡해요?” 아이들이 들떠서 여행 떠났던, 꽃 피는 봄날이 오면 어떡하냐던 그 엄마들, 아빠들 생각이 나서 말을 잇지 못했어요. 그래서 속상하게도 준비한 얘기를 제대로 못하고 서둘러서 마무리했지요. 그래서 더욱 이 편지를 쓰고 싶었을 거예요.

지난주 재판 나기기 직전에 ‘3반’ 가족들이 단체로 쓴 편지를 받았어요. 노란 색지 위에 각기 다른 손글씨로 쓴 마음들, “우리 가족들 모두가 걱정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은 거기 있는데 몸은 그렇게 하지를 못하네요.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지…”, “바람보다 맘이 겨울바람보다 더 춥고 시린 지금 현실이 너무 속상해요. 어찌 지내시는지 안부조차 여쭙기 죄송하고 감사하고… 고뿔이나 안 걸리셨는지…” 이런저런 마음들을 또 읽고 읽었지요. 그 마음들 왜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한테 미안하다, 죄송하다 말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들 때문에 당신들 대신해서 구속돼서 고생하는 게 아니거든요. 세월호 참사를 푸는 일은 참사를 목격한 증인이라면,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아갈 ‘시민’이라면, 아직도 가슴이 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같이 힘 모아서 할 일이지요. 나는 나의 일을 하다가 저들의 표적이 되어 잠시 인질로 잡혀 있을 뿐이죠. 우리 4·16 가족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그게 할 일이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내가 감옥문을 나서는 날, 막걸리 한 사발 같이 해요. 그러면 되죠. 그러니 너무 미안해 말아요. 나는 도리어 당신들한테 미안한데… 나만 혼자 빠져나와서 쉬고 있으니까, 가족들한테도 미안하고 활동가들에게도 미안하고 4·16연대 상임위원, 운영위원들에게도 미안하고. 그래서 매일 잊지 않으려고 담벼락에 9명 미수습자 이름도 적어놓고, 사진이며 엽서며 붙여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불러보고,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살지요.

553번째 맞는 4월16일 오늘까지 오면서 기억나는 몇 가지 장면이 있지요. 참사 나고 10여 일쯤 지나서 내려가봤던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시신을 건져서 올라가는 사람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던 그곳에 벌써 마지막에 대한 공포가 있었지요. 자꾸 자리는 비어지는데 마지막이 자기가 될 것 같은 그 초조함과 불안. 그 말할 수 없게 무겁게 짓누르던 분위기도 잊지 못하겠더군요.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어요. 당신들과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날, 운명적인 날이죠. 나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고, 그러면서도 망설이고 있던 때였어요. 우리가 대책기구를 만들어 대응하는 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나 않을까 조심스러웠지요. 그때 안산에서 회의하던 당신들이 KBS에 항의한다고 한밤중에 버스 타고 올라왔지요. 그게 5월8일 어버이날이었어요. 참사 이후 처음 맞는 어버이날 밤에 영정사진 가슴에 안고 와서는 KBS에서 청와대 앞에서 울고불고하면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도 길바닥에 앉아서 버티던 청운동 사무소 앞이었지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4년 5월 9일 세월호 유가족이 청와대 인근 청운동 사무소 앞에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4년 5월 9일 세월호 유가족이 청와대 인근 청운동 사무소 앞에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어버이날,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던 아이들

그 자리에 생존 학생들이 왔어요. 지옥에서 살아온 아이들, 살아 있는 게 너무 힘든 그 아이들, 고개도 못 들고 영정사진 가슴에 품고 있는 당신들 앞에 서서 ‘죄송하다’고 말하던 그 장면을 잊지 못해요. 그냥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눈물이 났지요. 그런 아이들을 안아주고, 살아와줘서 고맙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당신들이었지요. 생존자가 유가족에게 미안해해야 하고, 유가족이 미수습자 가족에게 미안해해야 하고, 미수습자 가족은 유가족이 되는 게 소원이라는 이 끔찍한 날들이 오늘로 553번째네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딨어요.

그래서 세월호 참사는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아픔인 것을. 청운동의 그날 이후 나는 여러분과 잡은 손 놓지 않겠다고, 당신들의 곁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지요. 그 뒤로 안산에서 광화문에서 국회에서 청운동에서 팽목항에서 그리고 간담회가 열리는 지역들의 그 자리에서 우리는 계속 만났어요. 내가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는 매일 보고 살았는데, 벌써 100일째(10월23일) 당신들과 못 만나고 있군요. 나만 보면 “형님” 그러면서 갈굴 거리를 찾던 짓궂은 아빠들은 “30년 동안 뭐했어요. 인권이 아직도 이 모양이게” 이러고, 엄마들은 반갑다고 악수하다가도 아이들 얘기하며 울기도 잘했는데….

나는 4·16 가족들이 고마워요. 한두 가지가 아니죠. 양식 있는 시민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예요.

먼저, 여러분이 흩어지지 않고 가족협의회로 모였고, 모여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거. 참사가 일어난 뒤에 당신들이 모이는 걸 경계하고, 회유하고 분열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감시하고 미행하기도 하고, 이런 말 저런 말로 분란을 일으키고자 하던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런 회유와 분열 공작에도 여러분은 가족협의회로 모였고, 모이니까 힘이 생기고, 그 힘으로 특별법도 만들고, 지금껏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이런저런 일이 진행되게 만들었지요. 이건 대단한 겁니다. 이전의 재난 참사가 많았지만 세월호 4·16 가족처럼 많이 모이고 힘을 가지고 움직이던 가족들이 없었지요.

나와 우리의 감옥 문을 열고

두 번째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온몸으로 제시해줬다는 점이죠. 보상으로 무마하고 끝났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4·16 가족이 돈보다도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그리고 안전사회, 안전한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고, 말로 호소하고, 절규하면서 지금까지 왔던 거잖아요. 가족들이 이렇게 방향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5월, 국민대책회의 결성 즈음이었어요. 운동권이 방향을 정하고 가족을 그리 몰아간 게 아니라 그 당사자들이 격론 끝에 내린 결론이었고, 서명운동도 가족들이 먼저 시작했지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천만 서명운동’도 그렇게 해서 전국에서 불붙었던 거지요. 그래서 7월 중순에는 국회에 350만 서명지를 전달했고, 특별법이 통과되던 그때까지 600만 명에 육박하는 서명운동이 전개됐지요. 자기 안에만 매몰돼 있던 시민들이 깨어났어요.

그 외에도 생각하면 고마운 게 많아요. 얼마나 많이 모욕을 당했나요? 아이를, 부모를, 남편을, 아내를 잃은 것도 억울한데 시체 팔아서 돈 더 받으려 한다고 할 때 억장이 무너졌지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얘기해도 소용없고, 언론과 SNS를 통해서 마구 소문이 번져갔지요. 특히 정부와 여당 정치인들이 그런 분위기를 조장했고요. 지난 4월1일은 가장 악랄한 거짓말로 뒤덮였던 만우절이었지요. 해양수산부가 아침에 보도자료를 뿌렸을 때는 단원고 희생 학생에게 4억2천만원을 준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4시간 뒤에는 4억원이 늘어나서 8억2천만원이 되었고, 모든 언론이 이를 받아 도배했어요. 그때 4·16 가족들은 ‘쓰레기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의 즉각적인 인양’을 요구하며 광화문에서 집중 농성 중이었는데도 정부는 그렇게 했지요. 격분한 당신들은 삭발로 분노를 표했지요. 그런 모욕, 굴욕을 다 이기고 지금까지 당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이 나라 시민들이면 4·16 가족 여러분한테 고마워해야죠.

세월호와 관련된 모든 일이 당신들로부터 시작되고, 당신들로 인해 증폭되고, 지속되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요. 돈과 경쟁을 최고로 알던 세상을 인간의 존엄성, 생명, 인권을 우선하는 그런 세상으로 바꾸는 운동, 그것이 4·16 운동이지요.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너무도 끔찍한 야만사회임을 놀랍게도 생생하게 확인한 사람들이 움직이며 만들어가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이미 죽은 가족들은 살아 돌아올 길 없음에도 그들의 죽음이 덜 억울하도록, 헛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4·16 가족들의 결단과 헌신이 이 운동을 끌고 가고 있어요.

지금은 좋은 일은 하나 없이 권력의 횡포가 전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캄캄함 밤이죠.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출구도 찾을 수 없어요. 그런 세상에 나는 당신들과 격리되어 혼자 감옥에 있어요. 감옥에 문이 없어요. 내 방에 달려 있는 문은 내가 열 수 없어요. 교도관이 전자키로 열어줘야만 열리는 문이니까요. 이건 문이 아니죠. 문은 길로 나갈 수 있어야 문입니다. 내 몸이 여기 잡혀 있는 한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갈 수 없네요. 그렇지만 세상은 더 큰 감옥이죠. 우리는 종종 출구가 없다고 하잖아요. 문부터 만들고, 길을 내야죠. 문이 있는데 못 찾는 건가요? 그럼 찾아야죠. 그 문을 찾고, 길을 낼 때 나와 우리는 모두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을 거예요. 그 큰 자유를 만들어가는 인권선언 풀뿌리 토론이 전국에서 이어진다고 하니 반갑네요. 더 많은 풀뿌리 토론이 진행되면 좋겠어요.

‘그리운 사람’을 맘껏 그리워하며

10월26일부터 전국을 순회한다고 하던데 계획대로 가나요? 지금은 힘이 모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곳곳에서 힘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더 넓게, 더 깊게 4·16 운동은 계속돼야 합니다. 4·16 가족 여러분, 정부 당국의 인질이 되어 보호를 받는 나의 건강은 걱정 말고, 여러분들 건강부터 챙겨요. 건강해야 ‘약속’도 지키고, ‘숙제’도 할 수 있지요. 밥 꼬박꼬박 챙겨먹고 길 떠나요.

또 하루가 시작되려 하네요. 오늘도 ‘그리운 사람’을 맘껏 그리워하며 기운 내서, 웃으며 견디기. 4·16 가족 여러분, 보고 싶어요.

2015. 10.21. 아침. 서울구치소에서 박래군 드립니다.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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