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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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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출근길 옷이 얇은 사람들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 걸어서 출근했던 시절 만난 이들

일에 방해될까 옷도 두껍게 입지 못하는 고충을 그 후보는 알까
등록 2012-12-07 14:20 수정 2020-05-02 19:27

고구마나 무의 뿌리가 길면 그해 겨울이 춥다나. 고구마와 무는 대체 그런 것을 어떻 게 아는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있 는 고구마를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니 참말 로 뿌리가 북실북실하고 길다. 걱정이다. 굳 이 고구마 뿌리를 보지 않고서도 일찍 시작 된 추위로 이번 겨울이 참으로 길고 힘들겠 구나 느끼는 요즘이다.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고난의 계절이다. 회사 건물에서 한 노동자가 새벽에 청소하는 모습. 새벽일을 하는 이들 사이의 ‘동지애’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기도 한다. 박승화 기자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고난의 계절이다. 회사 건물에서 한 노동자가 새벽에 청소하는 모습. 새벽일을 하는 이들 사이의 ‘동지애’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기도 한다. 박승화 기자

 

매표소 구멍 사이로 들어온 고구마

아침마다 이불 밖으로 발부터 꺼내보고는 싸늘한 공기에 놀라 다시 냉큼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렇다고 잠을 더 잘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이불 속에서 ‘5분만 더’ 를 외치며 게으름만 부리고 있다. 그러다 동 네 골목에서 생선 장수의 목소리가 메가폰 을 타고 들려오면 그제야 마지못해 일어나 앉는다.

“이렇게 추운 날, 게다가 이렇게 이른 시간 에 누가 나가서 산다고 저리 일찍 팔러 다니 시나.”

그러다 문득 내가 지하철 매표소에서 비 정규직으로 일할 때가 생각났다. 하루 2교 대로 일주일씩 주간과 야간을 번갈아 근무 했다. 주간 근무일 때는 지하철 첫차가 출발 하는 새벽 5시 이전에 출근해야 했다. 그러 려면 늦어도 새벽 3시30분에는 일어나야 했 다. 여름에는 조금 덜한 편이지만 겨울철에 그 시간에 일어나는 일은 고역이었다. 날씨 가 춥기도 했지만,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 세 상이 온통 잠에 빠진 그 시간에 일어나 일을 하러 간다는 게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잠이 덜 깬 채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에서는 잠옷 바지 속에 양쪽 팔을 다 끼워놓고는 앉은 채 졸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이 직장, 내 오늘은 가서 꼭 그만두고 와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 다. 하지만 그 철없는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그 이른 시간에 함께 일어나 새벽밥을 차려주셨다. 그리고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앉아 계셨다가, 잠 긴 목소리로 배웅까지 해주셨다. 그리고 출 근길에 만나는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이르다 보니 버스나 지하철 은 당연히 탈 수 없었고, 그렇다고 매일같이 택시를 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하철로 2 코스 정도의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다 보면 새벽시장에서 물건을 떼어와서 일찍부터 하 루 장사를 준비하는 시장 상인들과 밤새 먹 고 마신 쓰레기들을 치우는 거리의 청소미 화원들을 볼 수 있었다.

매표소에 출근해서 발권을 시작하면 어 느샌가 표를 받아가는 새벽 첫차를 타는 사 람들이 있었다. 무임승차권을 이용하는 고 령자나 복지카드를 가진 사람이 많았지만, 대다수는 이른 시간부터 일을 나가야 하는 저소득 계층이었다. 또 함께 지하철 비정규 직으로 일했던 청소용역 아주머니들까지, 나 보다 더 열심히 또 더 힘들게 새벽을 여는 사 람들이 있었다.

나는 가끔 그 새벽에 나와 함께 하루를 시 작하던 이들이 생각난다. 몰려오는 새벽잠 에 졸고 있으면 매표소 구멍 사이로 사탕이 며 삶은 고구마를 밀어 넣어주고 가는 사람 들, 빈속으로 출근했을까 싶어 누룽지를 나 눠주던 청소용역 아주머니들. 그분들은 지 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생활은 좀 나아지셨을까. 그들에게 노동의 대가가 공정하게 돌아가는 사회라면 얼마나 좋을 까. 우리 사회가 최소한 그들을 인간답게 대 접해주는 사회라면 참 좋겠다.

 

사망 산재에 “옷을 두껍게 입어서”

얼마 전 청소미화 업무를 하시던 할머니께 서 일을 하다 말고 잠시 짬을 내어 상담소에 찾아오셨다. 일전에 우리 상담소를 통해 체 불임금을 해결하셨던 할머니는 고맙다는 인사차 들르신 듯했다. 그런데 추운 날씨임에도 파란색 청소 유니폼에 얇은 조끼 하나만 걸친 채로 오셨다. “추운데 옷을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시냐”는 내 말에 할머니는 쑥스러운 듯 웃으시며 “안 추워요. 나는 파밭이고 어데고 이런 데 밖에서 일을 많이 해서 그런가 숙달이 됐나봐. 그리고 일할 때 옷 두껍게 입으면 일이 더뎌서 안 돼” 하셨다. 아무리 단련된들 추위에 익숙해지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 코밑으로는 맑은 콧물이 연신 흘렀다.

예전 조선소에서 그 칼날 같다던 겨울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하던 노동자가 떨어져 죽자 회사에서는 산재 처리를 해주기는커녕 “옷을 두껍게 입어서 균형을 못 잡아 그렇다”고 했다. 겨울만큼이나 매정하고 살벌한 사회다. 떨어져 죽지 않으려면 겨울에도 옷을 얇게 입어야 하고, 감자튀김 기름이 튀어 양쪽 팔에 곰보 모양의 화상이 생기더라도 반팔 유니폼을 입어야 하고, 행동이 굼뜨지 않고 일을 빨리빨리 하려면 두꺼운 옷은 벗어던져야 하는,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사회에 우리는 산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유력 대선 후보 중 한 사람의 공약을 보면 공정성을 높이는 경제민주화, 차별 없는 고용시장, 일자리 창출, 행복교육, 안전한 사회 등을 내세우고 있다. 말로는 뭔들 못하겠냐마는 참 쉽다. 그런데 그 후보가 얼마 전 TV토론회에서 비정규직 차별에 대한 해법으로 비정규직들이 노조를 만들어서 그 대표가 회사에 시정을 요구하면 회사가 시정을 한단다. 틀린 말은 아니다. 법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니.

그런데 그 후보는 알고 있을까. 대법원의 판결도 안 지켜져서 송전탑에 오른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을 만들려다가 잘리는 수많은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몸이 아파 하루 쉬고 싶어도 눈치 보여 쉴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나 차별받고 있다’고 신고할 수 있는 간 큰 노동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이것이 차별 없는 고용시장인가.

 

그들의 비전에 노동자 자리는 없다

잘나가던 회사는 외국에 팔아먹고, 열심히 일하던 노동자들은 거리로 다 내쫓고, 사람이 23명이 죽어나가도 철저하게 외면하는 나라. 3년째 상복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과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40일이 넘는 단식과 철탑 농성을 해야 하는 사람들.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과 책임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것이 공정성을 높이는 경제민주화인가. 조사받던 여성 피의자를 성추행하는 검사와 자신이 조사했던 가출 청소년의 성을 돈으로 산 경찰이 지키는 나라. 이것이 안전한 나라인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흠집 내는 일을 하지 말라던 한진중공업 이재용 사장은 매일 아침, 직원들을 불러모아 관제 데모를 진두지휘한다. 이것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법과 원칙이 지켜지고 상식이 통하는 나라인가.

그들은 전혀 모른다. 이 땅의 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들의 정책과 비전에 노동자들의 자리는 없다. 만일 그들의 공약에 진정성과 실현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재능, 유성, 콜트·콜텍, 전북고속, 풍산, 한진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제주 강정으로 가보시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의 얘기도 한 번쯤 들어보기를 바란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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