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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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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김진숙 지도위원을 끝까지 지킨 황이라씨가 ‘6·16 희망걷기’에서 배운 것

말로 할 수 없는 절망, 고난을 이기는 이들을 보며 자신감·위안을 얻다
등록 2012-06-27 05:50 수정 2020-05-02 19:26
지난 6월16일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희망걷기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정리해고 철폐와 해고자 복직을 염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희망버스 1돌을 기념해 열린 이날 행사는 축제처럼 이어졌다. <한겨레> 김정효

지난 6월16일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희망걷기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정리해고 철폐와 해고자 복직을 염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희망버스 1돌을 기념해 열린 이날 행사는 축제처럼 이어졌다. <한겨레> 김정효

“반갑습니다. 저는 민주노총 부산본부에서 활동하는 황이라입니다.”

여기까지 하고는 말문이 막혔다. 전날 밤부터 차를 타는 순간까지 이말 저말 토씨까지 수정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희망버스를 타게 된 계기, 소감을 포함한 자기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전날 밤부터‘가 아니라 지난해 이맘때 시작된 희망버스가 올 적마다 생각했다. 희망버스 안에서 자기소개를 하며 희망버스를 타게 된 사연들을 얘기한다던 기사를 보며, 그리고 그 기사 속에서 정말이지 평범한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내가 희망버스를 탔을 때를 상상해보곤 했다.

‘우리’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 꿈같던 일이 내게도 생겼지만,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한 사람에게 몇 날 며칠 밤을 고민해 준비한 고백은 다 묻어두고, “좋아해” 한마디 하고는 아무런 말도 못하던 스물 몇 살의 풋사랑 같은 심정이랄까. 그 어린 첫사랑이 왜 좋은지, 어떡하다 좋아졌는지 설명할 길이 없듯, 나 또한 내가 왜 희망버스를 타야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는 이유가 없었다.

그냥, 당연히 타야 하니 탄 거니까. 다만 확인하고 싶은 한 가지는 있었다. 매번 희망버스에 오르던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그들이 궁금했고, 그들을 느끼고 싶었다.

지난 6월16일, 당초의 계획보다 출발이 늦은 우리는 아쉽게도 서울 여의도에서 시작한 ‘희망집회’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희망걷기’를 시작하는 대오와 공덕역에서 결합해 대한문까지 행진했다. 이날 오후 2시, 한낮의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걷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해보고 싶던 일을 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땡볕을 걷는 일도, 구호를 외치는 일도 모두 신이 났다. 길이 막혀도 상관없었고, 그래서 돌아가도 상관없었다. 길이 막히면 그 자리에 앉아 준비한 물이나 과일 따위를 나눠먹고, 그 많은 대오 속에 아는 얼굴이라도 보이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일도 재밌었고, 걸으며 드문드문 나누는 그들의 얘기를 듣는 일도 흥미로웠다. 다리가 아프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다.

그 시간, 같은 공간에서 ‘우리’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2시간 남짓한 희망걷기가 끝나고 대한문에서는 ‘희망연대마당’을 이어갔다. 그중에서도 쌍용차 해고노동자 아이들의 공연은 정말 앙증맞고 신이 났다. 까만 파마머리 가발을 쓰고 선글라스를 낀 아이 6명이 쇼맨십까지 선보이며 ‘난타’ 공연을 멋들어지게 펼쳤다. 아이들이 춤을 추면 우린 함께 팔을 흔들었고, 아이들이 북을 치면 우린 함께 손뼉을 쳤고, 아이들이 웃으면 우리도 함께 웃었다. 아이들의 등에 붙은 카드섹션 ‘우리 함께 웃자’라는 구호처럼.

희망연대마당은 저녁을 먹고 나서 밤늦게까지 계속 이어졌다. 투쟁 사업장이나 지역 참가자들의 장기자랑 시간도 있었다. 사실 부산팀은 공연 1시간 전에 부랴부랴 급조돼 뭔가 모르게 엉성했지만, 유성기업이나 쌍용차 동지들은 정말이지 열심히 준비한 것 같았다. 특히 쌍용차 동지들은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리며 무대 뒤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연습에 연습을 하는 투혼을 불살랐다. 그러다가는 유성 동지들이 공연할 때는 그 노래에 맞춰 무대 아래에서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황금빛 태양 축제를 여는

“이제 끝이라고 희망은 없다고 길을 찾을 수 없어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절망하지 마.”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음악에 맞춰 어깨를 겯고 덩실거리다, 꼬리잡기를 하듯 뱅글뱅글 돌며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 수 없는 춤을 췄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는 휴대전화에 동영상으로 담아두기로 했다. 화질이 좋이 않아 어두운 영상 속에서, 붉은 불빛 아래 춤추는 그들의 몸짓이 마치 불을 찾아헤매는 불나비 같아 보인다는 착각이 들었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던 그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면 하얀 이가 다 보일 정도로 웃었다.

그들이 춤을 춘다. 그들이 노래를 부른다. 그들이 웃는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아, 저들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구나. 아, 저들도 저렇게 흥을 아는 사람들이구나. 아… 저들은, 얼마나 저렇게 살아보고 싶을까.’

절망, 외로움, 고난 같은 말이 소리 내서 표현할 그런 종류의 언어가 아니라는 걸 그들을 통해 느낀다. 말할 수 있는 고통은 그래도 조금 낫다는 걸 그들을 보며 느낀다. 그래서 그들의 웃음이 나는 더 서글픈지 모르겠다. 지금 비록 그들이야말로 ‘길, 그 끝에 서서’ 있을지라도, 노랫말처럼 나는 그들이 결국 길을 만들 거라 믿는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다음날 아침, 용역의 침탈 시도로 우리를 애타게 했던 콜트·콜텍 동지들을 보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햇살 한 조각,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쫓겨나 1964일을 싸운 콜트·콜텍 동지들의 ‘황금빛 태양 축제를 여는’ 듯한 노래와 기타 소리에 나는 또 한 번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희망버스를 타기 전, 이번 6·16 희망버스를 제안하는 송경동 시인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아직 재판도 끝나지 않은 그가, 수술받은 다리가 채 낫지도 않은 그가, 다시 짐을 싸들고 또 집을 나섰다는 그가, 나는 참으로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쉬어도 될 텐데, 재판을 핑계로 조금 뒤에 빠져 있어도 될 텐데, 나 같으면 그러고 싶었을 텐데.

그는 나처럼 약지도, 계산적이지도 못했다. 그의 사랑은 방에 누워 천장만 보며 꿈만 꾸는, 그런 하기 쉬운 사랑이 아니었나 보다. 그의 편지 말미에, 짐을 싸들고 나오는 날 아침 지난해의 그 자리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한계, 자신의 사랑에 절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지난해 한진 투쟁이 끝나고, 나는 정말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순진하게도 동화책 속의 행복한 결말을 꿈꿨다. 하지만 여전히 내 주변에는 힘들고 고통받고 안타까운 사람들과 사연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나는 너무 작고 하찮았고, 또 무기력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희망버스를 타며, 그들 속에서 그들과 부대끼며 나는 작지만 자신감이 생겼다. 책상 위에서도, 내 방 천장에서도, 또 술잔 속에서도 찾지 못했던 자신감과 내 스스로에게 주는 위안을, 나는 쌍용차 동지들과 콜트·콜텍, 그리고 1박2일을 함께했던 그들에게서 받고, 느끼고, 또 배웠다.

쌍용차 동지들의 너울거리는 춤과 웃음, 콜트·콜텍의 흥겨운 노래를 보고 들으며 나는 이제야 느낀다. 지난해 그들이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찾았는지. 그리고 나도 우리도 이제 어떤 마음으로 그들과 연대해야 하는지.

그들을 뜨겁게 사랑한다. 그들의 절망을, 그들의 고난을,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삶을…. 송경동 시인의 말처럼, 그들에겐 내가 필요하다. 또한 여러분들도. 지금 이순간에도 그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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