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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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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은 혁신을 배신하고

도전과 모험의 DNA 공유했던 월트 디즈니와 은행가 아마데오 잔니니… 권위에 맞선 자가 결국 권위에 집착하는 ‘역사의 숙명’
등록 2015-11-12 11:02 수정 2020-05-02 19:28

1937년 12월21일. 미국 할리우드의 한 극장에서 영화시사회가 열렸다. 작품 이름은 . 독일의 그림 형제가 1812년 펴낸 동화집 제1권에 실린 를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 상영이 끝나자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일제히 열광하며 기립 박수를 보냈다. 주디 갈런드, 마를레네 디트리히 등 당대 스타 배우들을 포함해, 대부분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며칠 뒤 발행된 시사주간지 의 표지엔 월트 디즈니와 일곱 난쟁이의 얼굴이 실렸다.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이렇게 세상에 등장했다.

1937년 월트디즈니사에서 처음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유튜브 갈무리

1937년 월트디즈니사에서 처음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유튜브 갈무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영화계 혁신한 디즈니

영화의 제작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키마우스 시리즈의 큰 성공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의 잠재력이 확인됐다고는 하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아직 모험 성격이 짙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시절이다. 30대 초반 나이의 디즈니가 1934년 초 제작발표회를 열었을 때, 할리우드는 ‘어리석은 친구’라며 일제히 냉소를 퍼부었다. 단편 평균 제작비의 10배쯤으로 예상했던 제작비는 실제 작업에 들어가고 보니 훨씬 초과됐다. 제작을 모두 끝낸 뒤 계산서를 뽑아보니 150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왔다. 요즘 가치로 환산해 2천만달러 남짓한 액수다. 애초 계획했던 25만달러의 6배에 이른다.

디즈니는 이 돈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이미 투자·제작·배급·상영을 아우르는 산업의 꼴을 확실하게 갖춘 할리우드조차 외면하던 프로젝트였다. 더군다나 당시는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나라 안팎의 돈줄이 바짝바짝 마르던 시절 아니었나. 성공 여부가 극히 불확실한 이 ‘벤처 프로젝트’에 과감히 거액을 베팅한 주인공의 이름은 아마데오 잔니니. 오늘날 세계 최대 금융기관의 반열에 오른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창립자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신천지를 일궈낸 디즈니, 그리고 극소수 동부 은행가 가문이 쥐락펴락하던 월스트리트 패권을 무너뜨린 세계 금융사의 기린아 잔니니. 두 괴짜에 얽힌 이야기는 대공황의 폐허에서 탄생한 1930년대 미국판 ‘창조경제’의 성공 사례 한 토막쯤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당시 미국 사회 주류의 영향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실험의 땅’ 서부를 무대로 한 인생 역전 드라마.

두 사람의 인생엔 닮은 구석이 꽤 많다. 굶주림에 지쳐 대서양을 건넌 이민자 후손이라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디즈니는 아일랜드계, 잔니니는 이탈리아계 혈통을 이어받았다. 평탄치 못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점도 닮은꼴이라 할 만하다. 디즈니의 아버지는 툭하면 폭력을 일삼는 탓에 손위 형들이 줄줄이 가출해버렸다. 작은 농장을 꾸리던 잔니니의 아버지는 단돈 1달러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다 종업원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살 때 일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간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것도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면서.

어린 디즈니에겐 틈틈이 땅바닥이나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고민 끝에 집 차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자그마한 회사를 차린 게 1922년. 스물한 살 때다. 하지만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첫 작품 (Alice’s Wonderland)는 실패라는 운명을 타고났던 모양이다. 이듬해인 1923년 형이 살고 있던 로스앤젤레스로 무작정 거처를 옮기면서 대반전은 시작됐다.

골리앗 동부 은행가에 맞선 모험가 잔니니
월스트리트 패권에 도전장을 내민 이탈리아계 아마데오 잔니니는 1904년 서부에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은행을 세우는 도전을 감행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건물. 위키피디아

월스트리트 패권에 도전장을 내민 이탈리아계 아마데오 잔니니는 1904년 서부에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은행을 세우는 도전을 감행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건물. 위키피디아

시 서쪽 외곽에 자리잡은 할리우드는 1910년대부터 미국 전역으로부터 영화산업에 일생을 건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드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영화 제작 기술과 관련된 거의 모든 특허는 토머스 에디슨이 뉴저지에 세운 특허회사의 소유였는데, 태평양 연안의 서부 지역만은 특허권의 효력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모험자들에겐 분명 오아시스였다.

그해 10월 셋째형(로이)과 함께 ‘디즈니브러더스스튜디오’(얼마 뒤 ‘월트디즈니스튜디오’로 개명)란 이름의 회사를 세운 디즈니의 인생에서 도저히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미키마우스다. 미키마우스의 탄생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 바로 할리우드 정착 직후 디즈니가 선보인 의 악몽이다. 는 디즈니라는 이름을 할리우드에 널리 알린 성공작이었으나, 동시에 아직은 애송이였던 디즈니에게 할리우드의 냉혹함을 일깨워준 시련이기도 했다. 할리우드 자본이 디즈니 몰래 회사 직원들과 짜고 작품의 판권을 챙겨버린 것이다.

서둘러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토끼’가 ‘생쥐’로 다시 태어났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28년 흑백의 단편 를 통해 대중에게 첫선을 보인 미키마우스는 이후 등장하는 작품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20세기 가장 유명한 캐릭터’로 자리잡게 된다. 한 편의 영화가 캐릭터 등 다양한 부가사업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처음 일깨워준 것도 미키마우스 덕이다. 1932년 한 해 동안 디즈니가 캐릭터 사용 계약을 맺은 업체만 80여 개에 이른다.

그럼에도 모험가 디즈니는 여전히 허기를 느꼈다. 영화산업에 애니메이션이라는 혁신의 바람을 일으킨 인물이 아니었던가. 애니메이션은 기껏해야 어린이나 즐기는 장르라는 편견을 성인 남녀 모두가 극장에서도 기꺼이 관람할 수 있는 장편영화로 극복해보려는 게 그의 꿈이었다. 도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도전과 모험의 DNA를 공유하는 ‘동료’를 만났을 때다. 골리앗 동부 은행가에 맞선 모험가 잔니니야말로 이런 조건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동서 갈등은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였다. 서부인들의 눈에 금권정치와 월스트리트 자본이 장악한 동부는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었다. 특히 금융업과 은행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좀체 가시지 않았다. 서부인 대다수가 높은 이자 부담에 허덕이던 채무자 신세였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서부에 정착한 이주민 후손들은 아예 금융기관 문턱을 넘어설 기회조차 박탈당하기 일쑤였다. 잔니니가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 ‘뱅크오브이탈리아’라는 간판을 단 서민금융 기관을 세웠을 때, 그의 고객 대부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은행 거래를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도시 뒷골목의 자그마한 채소 상인이 다수였는데, 비록 내세울 만한 재산은 없었으나 하루하루 벌이로 푼돈을 모아가던 중이었다. 잔니니는 이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예금 유치에 나섰을 뿐 아니라 별다른 담보 없이 대출해주는 모험도 감행했다. 10대 중반의 나이에 농약이나 농기구를 사려는 마을 농민들에게 소액을 빌려주는 사업에 눈떴던 잔니니의 잠재력이 드디어 제 세상을 만난 꼴이다.

할리우드 보수화 물결에 앞장선 디즈니
도전과 혁신의 DNA를 공유했지만 성공 뒤 주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로 나서는 점까지 닮은 월트 디즈니(왼쪽)와 아마데오 잔니니(오른쪽). 위키피디아

도전과 혁신의 DNA를 공유했지만 성공 뒤 주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로 나서는 점까지 닮은 월트 디즈니(왼쪽)와 아마데오 잔니니(오른쪽). 위키피디아

뱅크오브이탈리아의 파격적인 행보가 입소문을 타면서, 설립 당시 고작 8780달러에 불과하던 예금액은 1년 뒤 70만달러로 급증했다. 행운도 따랐다. 뱅크오브이탈리아를 세운 지 2년 뒤인 1906년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덮쳤다. 수많은 건물이 무너져내리는 긴박한 순간에, 잔니니는 채소 운반 트럭으로 위장한 차량에 은행 예금을 옮겨 싣고 가까스로 외곽의 농장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상당수 경쟁 은행들이 파산한 반면, 뱅크오브이탈리아는 복구 사업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몸집을 키울 수 있었다.

복잡한 미국 은행 제도도 애송이 금융가의 눈부신 성장에 도움을 줬다. 당시 미국엔 연방정부의 인가를 받은 국법은행과 주정부의 인가를 받은 주법은행, 두 종류의 은행이 있었다. 둘 사이엔 영업 행위 규제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잔니니는 둘의 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금융기관을 세워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을 폈다. 마침내 1927년 관련 법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자 잔니니는 자신이 소유한 은행들을 하나로 합쳐 ‘뱅크오브아메리카’라는 국법은행을 정식 출범시켰다. 극소수 동부 은행가 가문이 대물림을 하며 장악해온 월스트리트 패권에 도전장을 내민, 한 이방인이 세운 ‘미국의 은행’이 등장한 것이다.

디즈니와 잔니니,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을 차분히 되짚어보면 1930년대 중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 왜 두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대공황을 이겨낼 도전정신이 절실하게 필요하던 때였다. 디즈니 입장에선 영화산업의 테두리를 더욱 확대시키려는 욕구가, 잔니니 입장에선 일종의 ‘벤처산업’에 과감하게 투자해 경쟁자보다 앞서 고지를 선점하려는 욕구가 각각 존재했다. 다행히도, 도전은 빛을 봤다. 1937년판 의 해외 판매 매출만 800만달러를 훌쩍 넘겼다. 영화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업데이트’되며 디즈니와 잔니니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렸다. 디즈니 제국과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아성이 더욱 단단해진 건 물론이다.

하지만 역사엔 숙명처럼 빛과 그늘이 동시에 존재한다. 혁신이 혁신을 배신하고, 권위에 맞선 자가 결국 권위에 집착하는 건 인류 역사에서 숱하게 되풀이되는 레퍼토리다. 두 혁신가가 일군 디즈니 제국과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아성이 바로 그렇다.

디즈니의 성공 스토리엔 193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불어닥친 보수화 물결도 큰 역할을 했음을 빼놓을 수 없다. 기술적 측면에선 항상 도전과 혁신에 적극적인 디즈니였으나, 정작 작품에 담긴 가치는 늘 고루하리만큼 변함이 없었다.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범적인 미국 중산층이 정해진 규칙을 지켜나가다보면 결국엔 행복을 맞이하게 된다는 줄거리가 줄곧 디즈니 작품의 뼈대를 이뤘다. 본인은 이방인 출신이었음에도, 대공황이 안겨준 혼돈의 시대에 전통적 가치와 규범을 수호해야 한다는 주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로 나선 셈이다.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수록, 제국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디즈니의 ‘변신’은 극에 달했다. 스튜디오 직원들이 영화만화가조합을 결성하려는 걸 방해하고, 어용 노조를 내세워 노조 탄압에 앞장서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에 극우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자, 디즈니는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화답하고 나섰다. 1947년 11월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호텔에서 열린 영화제작자협회 회의에선 ‘월도프 선언’이 채택됐다. 좌파 성향의 영화인 10명(‘할리우드 10’)을 영구 추방하는 내용이다. 디즈니는 가장 열렬한 주동자였다. (미국 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으로, 이 선언에 가장 먼저 찬성한 인물이 바로 훗날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이다.)

거대 금융자본 본색 답습하는 ‘BOA’

1949년 세상을 떠난 잔니니가 남긴 유산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 금융 중심에 우뚝 선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서민은행의 옛 흔적을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한복판에선 파산한 메릴린치를 인수해 명실상부한 ‘넘버 원’ 자리에 올랐다. 일찍이 잔니니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거대 금융자본의 추악한 본색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서민들의 품삯 하나하나에 공을 들였던 오래전 기억은 무자비한 몸집 늘리기 행보 속에 까맣게 잊혀졌다. 틈새시장을 개척하던 혁신의 에너지는 고수익·고위험 투자 기법 혁신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잔니니는 초기 뱅크오브이탈리아를 일러 ‘난쟁이 은행’이라 부르곤 했다. 난쟁이(은행)와 난쟁이(영화)의 만남은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나, 어느새 난쟁이는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제국과 공룡만이 그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을 뿐. 창조경제의 운명이란 원래 이런 것인가.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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