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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의 역습, 노동의 각성

1811~17년 잉글랜드 일대 휩쓴 기계 파괴 물결… 기계와 실업의 연관성 200년 전 처음으로 깨달은 집단의 이유 있는 저항
등록 2015-10-22 17:02 수정 2020-05-03 04:28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인조 인간을 만들고 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인조 인간을 만들고 있다.

영국의 10대 소녀 메리 셸리는 일행과 함께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다. 어느 날 일행은 지루함을 달래고자 각자 차례대로 돌아가며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 내기를 했다. 몇 년 뒤 셸리는 이때의 기억을 토대로 독특한 줄거리의 소설 하나를 써내려갔다. 1818년 익명으로 영국에서 출판된 280쪽 분량의 이 소설 이름은 . 작가 이름이 세상에 공개된 건 제2판(1823년·프랑스)에서다.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크리처·피조물)에 무릎을 꿇는 과학자의 이야기를 그린 은 최초의 공상과학(SF) 소설의 하나로 꼽힌다. 초기 반응은 오락가락했다. 처음엔 작가의 천재성을 찬양하던 비평가들이 작가가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돌연 태도를 바꿨다. “스무 살이 채 안 된 여성의 병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기이한 작품”이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인간의 두뇌로 발전시킨 과학기술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획득하고 나면 결국엔 주인(인간)을 배신하고 인간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민다는 메시지가 꽤나 불편했던가보다. 과연 은 한 기괴한 소설가의 하찮은 묵시록이었을 뿐일까? ‘아니다’라고 대답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기괴한 소설가의 하찮은 묵시록?

1811년 3월11일 밤. 영국 미들랜드 지역 노팅엄셔의 공장지대에 불길이 치솟았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수십 명의 무리들이 이 공장 저 공장을 돌아다니며 불을 지르고 기계를 망가뜨렸다. 그로부터 몇 달 새 노팅엄셔에서 파괴된 기계만 1천여 대. 당시 돈으로 대당 6천~1만파운드를 투자한 최신 설비였다. 이듬해 1월엔 불길이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로 옮겨붙었다. 웨스트라이딩 구역 면직물 공장들이 일제히 습격당했고, 공장주가 살해되는 일도 벌어졌다. 1813년. 이번엔 서북부 랭커셔 지역 차례였다. 노팅엄셔나 요크셔 때와 양상은 거의 같았다. 성난 ‘폭도’들의 기계 파괴 물결은 대략 1817년까지 노팅엄셔와 레스터셔, 요크셔, 랭커셔 일대를 온통 휩쓸었다.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던 영국으로선 난감한 상황이었다.

폭도들은 ‘네드 러드’라는 이름을 자주 입에 올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파괴하는 습성을 지닌 신비로운 인물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전설 속 의적 영웅인 로빈 후드를 네드 러드로 바꾼 행진가가 널리 퍼질 정도였다. 폭도들은 점차 스스로를 네드 러드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당시의 기계 파괴 시위대에 ‘러다이트’란 이름이 따라붙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왜 공장주들이 큰돈을 들여 장만한 최신 기계장치가 속수무책으로 불태워졌을까? 폭도들이 유독 기계를 향해 격한 분노를 토해낸 까닭은 무엇일까? 노팅엄셔∼요크셔∼랭커셔를 잇는 ‘러다이트 삼각지대’가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 면직물공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전통적으로 영국에선 면직업보다 모직업이 훨씬 발전했다. 1701년 모직물 수출액(200만파운드)은 면직물 수출액(2만3253파운드)을 단연 압도했다.

사정이 바뀐 건, 런던·리버풀∼아프리카∼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장거리 3각 무역이 활기를 띠면서다. 상인들은 설탕·면화·담배(아메리카)와 흑인노예·상아(아프리카) 거래를 중개하며 큰 이득을 남겼다. 특히 값싸고 질긴 인도산 면제품은 아메리카대륙의 흑인노예용 의복으로 인기였다. 인도산 면제품(모슬린·캘리코)의 장점과 경쟁력에 자극받은 영국 면직물공업은 기존 퍼스티언 면포의 품질 개량에 사활을 걸었다. 해법은 기술 혁신과 기계 도입이었다.

면직물공업은 작업 공정에 따라 크게 방적 부문과 직포(방직)·편물 부문 둘로 나뉜다. 방적이란 면화(솜)를 원료로 물레 등을 이용해 실(원사)을 잣는 공정을 말한다. 씨실과 날실을 교차해 천(옷감)을 짜거나(직포) 뜨개바늘로 코를 걸어 다양한 제품(양말·보자기 등)을 짜는 공정(편물)은 모두 방적 작업이 이뤄진 다음의 일이다. 기술 혁신은 방적 부문에서 한발 빨랐다. 제니방적기(1764년)와 수력방적기(1768년)에 이어, 1779년엔 직포공 출신의 새뮤얼 크럼프턴이 둘의 장점만 살린 방적기계(뮬방적기)를 선보였다. 제니방적기가 사람 손으로 돌리는 바퀴에 8개의 방차를 연결해 여덟 가닥의 실을 동시에 뽑아내는 데 그쳤다면, 이제는 외부 동력을 활용해 방추 수를 최소 300추 이상으로 늘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직포·편물 분야에서도 증기 동력을 활용한 역직기와 다양한 편물 기계가 속속 선을 보였다.

몸에 도구를 지닌 두 존재, 인간과 기계
산업혁명 당시에 사용된 방적기. 위키피디아

산업혁명 당시에 사용된 방적기. 위키피디아

문제는 기술 혁신이 필연적으로 노동 과정에 근본적 변화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근대 이전의 유럽 사회에서 ‘기계’라는 단어의 의미는 ‘도구’의 속성을 가리키는 쪽에 훨씬 가까웠다. 예컨대, 삽이나 곡괭이처럼 사람(인체)의 손 또는 팔의 연장으로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기계의 의미는 ‘자신의 몸에 도구를 지니고 있는 물체’로 서서히 확대·변형됐다. 사람의 힘(인력)으로부터 동력(수력·증기력)이 해방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 변화다. 어느덧 세상엔 도구(손과 팔)를 지닌 존재가 둘이 됐다. 인간과 기계!

성능이 크게 개선된 기계가 등장하면서 노동력의 역할은 크게 바뀌었다. 방적 작업을 예로 들어보자. 예전엔 한 사람의 숙련공이 떨어진 솜을 줍거나 끊어진 실을 잇는 보조공(솜줍기공·실잇기공) 두세 명을 지휘·감독하며 가내수공업 형태로 실을 잣는 게 표준공정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모든 작업이 기계 중심의 일관공정 체계로 바뀌었으니, 숙련공의 입지(고용·임금·노동조건)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장인 대접을 받던 수직포공의 몰락 과정은 더욱 극적이다. 역직기와 편물기계가 널리 퍼지면서 직포(편물) 공장 노동자의 주력은 성인 남성에서 부녀자로 빠르게 옮겨갔다. 한 연구자의 지적처럼 “손가락을 아주 쉽게, 그리고 빠르게 놀리는 법을 배운 아이들이라면 공장노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까닭이다. 공장주 입장에선 굳이 고임금의 숙련공을 고용하지 않더라도 높은 품질의 값싼 면사를 대량생산해낼 수 있다는 뜻과 같았다. 1788년 10만8천 명이던 영국 내 직포공 수는 1820년대 초 24만 명으로 늘어났으나 대부분의 일자리는 미숙련공 몫이었다. 경쟁력을 잃고 길거리를 방황하는 수직포공이 넘쳐났다.

러다이트 운동의 성격과 의의를 두고선 여러 갈래 해석이 나온다. 기계 도입에 따른 불안감과 신분 하락이 1810년대 내내 영국 초기 공업지대를 휩쓴 격렬한 ‘기계 파괴 운동’의 유일한 원인이라고만 볼 순 없다.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단행된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영국의 대외교역이 급감한데다, 때마침 흉작까지 찾아와 식량 가격이 급등하는 등 전반적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때다. 기계 파괴 운동이 때론 식량 폭동의 양상을 띠기도 했던 배경이다.

하지만 그 밑바탕엔 거침없이 밀려드는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급속하게 몰락하던 수공업자-숙련공의 집단적 저항 에너지가 깔려 있었다. 상대적으로 몰락 과정이 더 빨랐던 방직공(직포공)과 편물공이 선두에 선 이유이기도 하다. 파괴 대상 역시 편물기계(노팅엄셔), 전단기·기모기(요크셔), 역직기(랭커셔)에 집중됐다. (참고로, 기계 파괴 행위는 훨씬 오래전부터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16세기 초 독일 단치히 지역에선 자동으로 리본을 만드는 기계를 발명한 사람이 암살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집단적이고 집중적인 ‘운동’ 형태로 분출한 건 1810년대 영국이 처음이다.)

숙련공들의 극적인 몰락과 저항
두 노동자가 직물기를 깨부수고 있다. 면직물공업에서 기계의 등장은 숙련공의 실업으로 이어졌다. 위키피디아

두 노동자가 직물기를 깨부수고 있다. 면직물공업에서 기계의 등장은 숙련공의 실업으로 이어졌다. 위키피디아

그럼, 200년 전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기계를 때려부수던 사람들이 꿈꿨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에게 ‘반공장·반기계’의 반대말은 무엇이었을까? 러다이트 운동은 인류사 최초로 기계와의 경쟁에서 패한 ‘구시대 인물’의 분풀이(?) 정도로 봐야 할까?

이중적 의식구조가 엿보인다. 기계 파괴자들은 해체 위기에 빠진 전통사회를 되살리고 삶과 노동(일터)이 분리되지 않기를 원했다. 자신들이 장인(수공업자)으로서 누리던 온갖 특권(길드)과 관리·감독 권한이 공장주(자본가)에 의해 훼손되는 데 저항했다. 그들은 전통주의자요, 구질서의 옹호자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실업이라는 새로운 현상에 주목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수고를 덜어줄 기술 발전으로 되레 인간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임금 삭감 압력이 커지는 건 그때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사회문제였다. 200년 전의 기계 파괴자들은 기계와 실업의 연관성을 최초로 각성한 집단적 주체였다.

이 점에서 1810년대는 중요한 분수령이라 할 만하다. 이후 영국에선 치열한 ‘담론 전쟁’이 벌어졌다. 산업사회의 정당성과 기계 도입의 합리성을 과학의 이름으로 뒷받침하려는 움직임이 거셌다. 그 결실이 바로 ‘정치경제학’이다. 이에 맞서는 반공장·반기계 담론은 점차 두 갈래의 길로 분화해갔다. 한쪽은 전통사회의 가치를 옹호하는 지주계급 등 구세력 주도의 복고주의로, 다른 한쪽은 기계와 공장이라는 구체적 현실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깨달은 조직화된 노동운동으로.

카를 마르크스는 1867년 나온 제1권에서 “노동 대중이 기계와 자본에 의한 기계의 사용을 구별하고, 그들의 공격을 생산의 물질적 도구(기계) 자체에서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돌리는 데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핵심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착취적인 방식으로 기계를 사용하는 사회제도(생산관계)라는 얘기다. 러다이트 운동에 담겨 있던 이중성이 폭로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날 세상은 어떨까? 후대의 경제학자들은 ‘러다이트의 오류’란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린다. ‘기계 도입이 실업을 증대시킨다’는 명제는 옳지 않다는 내용이다. 기계화가 진전되면 제품 가격도 떨어지기 마련이므로 제품 수요가 늘어나 결과적으로 더 많은 노동력을 채용할 수 있다는 논거를 댄다. 같은 맥락에서 기술 문명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라는 말로 단칼에 제압하려 든다. 역사적 경험에 비춰봤을 때, 틀린 말은 아니다.

21세기를 배회하는 러다이트란 유령

그럼에도 현대사회엔 첨단 기술 문명에 대한 극단적 반감을 지닌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17년간 ‘유나바머’란 이름으로 활동한 과학자 테드 카진스키 같은 인물도 극단적 사례 중 하나일 게다. 극단적인 반기술문명론자들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인간과 기계의 ‘적대 관계’는 다시금 관심을 끌고 있다. ‘제2의 기계시대’ ‘기계와의 전쟁’이란 표현이 심심찮게 들린다. 산업혁명기를 살았던 보수 성향의 사회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이 당대를 가리켜 “기계의 시대”라고 불렀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해준다. 200년 전 세상의 기계가 인간의 근육을 대신하는 데 그쳤다면, 21세기 세상의 기계는 아예 인간의 인지능력마저 떠안는 중이다.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가 하나 있다면,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다. 기술 발전과 기계 도입에 따른 열매를 고루 나누려는 지혜와 마음이 없다면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곁엔, 여전히 러다이트란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 게 아닐까.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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