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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왕, 확 타다 훅 갔다

투자금 빌려주고 성냥 판매 독점한 이바르 크뤼게르… 피라미드 사기로 몰락했지만 금융혁신 유산도 남겨
등록 2016-02-23 10:45 수정 2020-05-02 19:28
이바르 크뤼게르는 성냥공장 아들로 태어나 세계 성냥시장을 석권했지만, 과도한 확장욕으로 영화처럼 몰락했다. 위키피디아

이바르 크뤼게르는 성냥공장 아들로 태어나 세계 성냥시장을 석권했지만, 과도한 확장욕으로 영화처럼 몰락했다. 위키피디아

1845년의 유럽 대륙은 참혹했다. 변방 축에 끼던 중·북부 유럽의 사정은 더욱 끔찍했다. 그해 여름, 느닷없이 감자마름병이 유럽을 덮쳤다. 대양을 오가는 선박이 드나드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시작된 대재앙의 불길은 네덜란드를 지나 순식간에 독일·덴마크·영국으로 옮겨붙었다. 도처에 굶주린 사람들이 넘쳐났다. 감자가 주식이던 아일랜드의 피해가 가장 컸다. 아일랜드의 인구 3분의 1을 굶겨 죽이고 200만 명을 기약 없는 이민 행렬로 내몬 대기근(1845~47년)의 시작이다.

성냥공장 아들의 출세 비결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를 발표한 게 1845년 겨울이다. 한 해의 마지막날 밤. 굶주린 어린 소녀가 추위에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거리에서 성냥을 팔고 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소녀는 잠시나마 추위를 피하려고 성냥에 불을 붙인다. 그러자 소녀의 눈앞엔 아름다운 장면들이 펼쳐지는데….

역사는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 1845년을 또 다른 기억으로 품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이웃나라 스웨덴의 남부 도시 옌셰핑이 무대다. 요한과 카를 형제는 이곳에 스웨덴의 첫 성냥공장을 세웠다. 형제의 뒤를 이어 스웨덴 전역에 150여 개의 공장이 잇달아 들어섰다. 특히 목재와 광물자원이 풍부한 옌셰핑 일대는 유럽을 대표하는 성냥공장의 최적지로 꼽혔다. 훗날 옌셰핑이 ‘성냥산업의 수도’로 불리게 된 첫걸음이다.

그럴 만한 사정은 또 있었다. 한 해 전인 1844년 스웨덴의 한 교수가 성냥개비 표면 일부에만 발화성 물질을 입힌 ‘안전한 성냥’의 특허를 따냈다.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는 붉은색 머리(적린)의 성냥개비 모습이다. 초기 성냥(황린)은 화재 사고를 자주 일으키는 게 흠이었다. ‘안전한 성냥’의 등장은 이런 위험을 크게 줄여줬다. 변변한 산업 기반이 없던 당시 스웨덴에서 성냥이 대표 수출 품목으로 떠오른 배경이다.

명색이 대표 수출 품목이라고는 하나, 19세기 후반까지도 스웨덴의 성냥 제조 공정은 수공업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자본 규모가 작은 영세 공장이 난립했고, 어른 임금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푼돈에 매일 10시간 이상 혹사당하는 아동 노동도 흔했다. 아마도 허기를 달랠 빵 살 돈을 벌고자 거리에서 성냥을 팔던 동화 속 소녀보다 기껏해야 몇 살 많은 어린이들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풍경은 금융시장의 뭉칫돈이 스웨덴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20세기 문턱에 이르러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변화의 중심엔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스웨덴 출신의 한 ‘문제적 인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바르 크뤼게르. 일명 ‘성냥왕’(Match King)이란 별명을 얻은 그에겐 ‘천재사기꾼’이란 꼬리표도 함께 따라다닌다. 세계경제의 대격변기인 1920년대를 쥐락펴락한 국제금융계의 거물이자, 유럽 전역과 월스트리트를 농락한 그의 드라마틱한 일대기는 훗날 영화의 소재로도 인기를 끌었다.

성냥공장집 아들로 태어난 크뤼게르는 스무 살이 되던 1900년 100달러를 손에 쥐고 미국 뉴욕에 첫발을 디뎠다. 전공(건축학)을 살려 미국과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건설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최신 건축공법으로 무장한 뒤 고국으로 돌아왔다. 올림픽경기장, 스톡홀름시청 등 대표적 건축물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 명성만큼이나 부도 빠르게 불어났다. 여기까지만 해도 똑똑한 엘리트의 금의환향 이야기쯤으로 넘겨버릴 법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에게 숨겨진 또 다른 비범한 재능을 발견했다. 건설업으로 번 돈을 무기 삼아 본격 투자자로 나선 것이다. 성냥산업이 자연스레 첫 무대가 됐다. 소규모 업체들이 난립하던 스웨덴의 성냥산업은 그의 공격적인 인수·합병 손길에 의해 ‘스웨덴성냥주식회사’(STAB)로 천하통일됐다. 1917년의 일이다. 원재료(자원)와 목재, 기계, 인쇄 등 관련 분야를 아우르는 수직 계열화도 착착 진행됐다.

전세계 성냥시장 75% 장악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대륙은 자금난에 허덕였다. 이를 뒤집으면, 엄청난 비즈니스 기회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크뤼게르는 전후 재건과 개발에 목매단 유럽 각국 정부에 선심 쓰듯 막대한 돈을 꿔줬다. 다만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그 나라의 성냥 독점 생산·판매권을 자신한테 넘기라는 것. 고작 성냥 독점권 정도라고? 오산이다. 당시만 해도 성냥은 일상생활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생활필수품이었다.

싱거우리만치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폴란드·그리스·프랑스·유고슬라비아·헝가리·독일·루마니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터키 등 사실상 유럽 시장 전체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에콰도르·과테말라에까지 그의 손길이 미쳤다. 1930년 기준으로 크뤼게르가 외국 정부에 꿔준 돈은 모두 3억8700만달러, 현재 가치로 100억달러를 족히 웃돈다. 그 대가로 단숨에 세계 성냥시장의 75%를 거머쥐었으니, 가히 ‘성냥왕’이란 이름값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크뤼게르의 허기는 좀체 채워지지 않았다. 1930년대 초반까지 제지·금광채굴은 물론이고 철도·은행·언론·영화 등에 이르기까지 크뤼게르 제국의 영토는 문어발식 무한 확장을 거듭했다(스웨덴 출신의 유명 영화배우 그레타 가르보를 발굴·후원한 것도 크뤼게르다). 심지어 1920년대 스웨덴의 간판기업인 전화기 명가 에릭손마저 크뤼게르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스웨덴 경제의 상징인 발렌베리 가문조차 1920년대 내내 크뤼게르 제국의 위세에 밀릴 정도였다. 1929년 기준으로 크뤼게르의 재산은 300억크로나, 현재 가치로 따져 13조원 정도. 세계 3위 부호로 꼽혔다.

딱 여기까지였다. 몰락의 시간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크뤼게르가 각국 정부에 돈을 꿔줄 때, 자기 돈만 이용한 건 아니다. 오히려 크뤼게르는 형식상의 투자자 행세만 했을 뿐, 실제로는 미국 금융시장에서 넘쳐나는 투자금을 끌어다가 여러 나라에 다시 꿔주는 자금 중개 노릇을 했을 뿐이다. 문제는 투자자 모집 방식이었다. 크뤼게르는 25%의 투자수익률 보장을 미끼로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그가 1923년 뉴욕에 세운 인터내셔널매치컴퍼니(IMCO)는 고수익 약속을 철석같이 믿는 투자자들로부터 1억5천만달러를 가뿐히 모았다. 불과 7년 새 시가총액은 1100% 폭등했다.

언젠가는 터질 대형 시한폭탄이었다. 제아무리 세계 성냥시장을 한 손에 쥔다 해도, 수익률은 기껏해야 8% 남짓 하던 시절이다. 그럼 25%(계약)와 8%(현실)의 간극은 잠시나마 어떻게 메울 수 있었을까? 정답은 ‘피라미드 사기’. 나중에 뛰어든 투자자의 투자금으로 앞선 투자자의 수익률을 보장해주는 방식 말이다. 이 빚으로 저 빚을 돌려막기, 영어식 표현으로 ‘Robbing Peter to pay Paul’의 전형이다. 투기 광풍에 휩쓸린 대공황 전야 월스트리트의 생생한 민낯이 이랬다.

‘피라미드 사기’의 대명사인 찰스 폰지. 위키피디아

‘피라미드 사기’의 대명사인 찰스 폰지. 위키피디아

폰지의 국제우편환 사기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낯익은 이름 하나가 있다. 피라미드 사기의 대명사로 굳어버린 찰스 폰지. 실제로 크뤼게르의 행보는 10년 정도 앞서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폰지 사기 사건과 여러모로 닮았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폰지는 수시로 감옥을 들락거렸는데, 어느 날 우연찮게 스페인의 한 회사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 안엔 반송용 국제우편환(IRC)이 들어 있었다. 국제우편환이란 우편환을 받은 나라의 환율로 교환할 수 있는, 일종의 화폐 대용물이었다.

폰지의 두뇌가 반짝였다. 1차 세계대전 뒤 극심한 인플레로 통화가치가 추락한 이탈리아에서 국제우편환을 사서 미국에서 달러로 바꾸면 큰 차익을 볼 수 있어서다. 이탈리아에서 1센트를 주고 산 국제우편환은 미국에서 6센트까지 받을 수 있던 시절이다. 폰지는 지체 없이 투자회사를 차린 뒤 언론에 ‘45일 만에 원금 50%, 90일 만에 원금 100% 보장’이라는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집중 홍보했다.

투자자가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1920년 2월 5천달러이던 투자 금액은 불과 4개월 만에 10만 배 폭증했다. 사람들은 평생 모은 돈과 집을 담보로 빌린 돈을 앞다퉈 쏟아부었고, 돌려받은 배당마저 대부분 ‘묻지마’ 재투자했다. 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수중에 2.5달러 현금과 100만달러 희망을 지닌 채 이 땅(미국)에 왔다”고 떠벌리던 인물이 벌인 이 희대의 피라미드 사기극은 단 4개월 만에 피해자 4만 명, 피해 금액 1억4천만달러라는 기록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피라미드 사기라는 점만 제외하면, 폰지가 사용한 기법은 지역(시장)에 따른 가격 차이를 활용한 ‘재정거래’(arbitrage)의 한 예라 할 만하다. 흥미롭게도, 이자 수취를 금지한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재정거래라는 ‘묘수’를 찾아낸 건 폰지의 오랜 조상인 15~16세기 이탈리아 북부 상인들이다. 국제무역을 중개하던 이들은 물건을 수출하는 상인한테서 약속어음을 받고 돈을 빌려주면서(어음할인) 수입업자한테선 현지 화폐로 돌려받았다. 이자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도 환율을 통해 얼마든지 그 실제 차익을 다 누릴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영리했다!)

하지만 두 사건은 다른 점도 많다. 폰지 사건이 짧은 기간 벌어진 단순한 금융사기였다면, 크뤼게르의 경우엔 엄연히 성냥산업이라는 ‘합법적’ 토대 위에 진행된 복합사기극 성격이 짙다. 주력 분야인 성냥산업의 패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교묘한 사기 행태가 곳곳에 끼어든 격이다. 합법과 범죄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고나 할까. 천재(Genius)와 사기꾼(Swindler)이란 두 단어가 마치 합성어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오늘날까지 잘 알려진 여러 ‘금융혁신’ 사례 가운데 크뤼게르의 흔적이 뚜렷한 게 꽤 있다. 그는 자산담보부증권(ABS)이나 차입매수(LBO)란 개념을 구체화했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주식과 채권의 중간 형태인 금융상품도 선도적으로 선보였다. 1920년대엔 기업들이 의결권을 지닌 보통주와 의결권이 없는 보통주를 나눠 발행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이런 차등의결권(Dual Class Ownership) 제도를 고안한 것도 크뤼게르다. 그가 1%의 지분으로 자산 6억달러 규모의 제국을 지배할 수 있던 배경이다. 1차 세계대전의 상흔 속에 신음하던 잿빛 유럽 대륙에 투자의 불씨를 지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하지만 그의 명백한 불법행위를 가릴 순 없다. 그는 피라미드 사기 행각을 감추고자 분식회계와 부외거래를 숱하게 일삼았고, 벌어들인 소득은 세금 징수를 피해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에 은닉했다. 1933~34년 미국 정부는 주식시장 공시제도를 강화하고,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엄격히 구분하는 글래스-스티걸법을 제정하는 등 일련의 금융규제를 도입했다. (1999년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폐지됐다가, 최근 버니 샌더스가 부활 주장을 펴는 바로 그 법이다.) 한 천재사기꾼에 농락당한 투자자들의 투자금 4억달러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본 미국 정부가 서둘러 내놓은 대책이다.

1932년은 ○○의 출생연도

지포 라이터는 하필 성냥왕이 세상을 떠난 1932년에 탄생했다. 위키피디아

지포 라이터는 하필 성냥왕이 세상을 떠난 1932년에 탄생했다. 위키피디아

크뤼게르 제국을 붕괴시킨 기폭제 역할을 에릭손이 맡은 건 아이러니하다. 크뤼게르는 1930년 보유 중인 에릭손 지분을 경쟁사인 미국의 전화기 제조사 국제전화전신(ITT)에 매각했는데, ITT는 그가 에릭손의 자산을 고의로 부풀린 사실을 뒤늦게 알고 계약 무효와 판매대금(1100만달러) 반환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크뤼게르의 오랜 피라미드 사기극이 한 꺼풀씩 벗겨졌다. 압박을 견디다 못한 크뤼게르는 1932년 3월 프랑스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지었다.

부채 6억5천만달러, 자산 2억달러. 크뤼게르 제국의 유산이었다. 그의 개인 빚은 당시 스웨덴 정부의 예산보다 많았다. 에릭손은 발렌베리 가문으로 넘어갔고, 이제 스웨덴 경제의 대표 주자는 누가 뭐래도 발렌베리 가문이었다. 금융시장의 돈놀음에 크게 덴 스웨덴에선 이후 40년 이상 사회민주당의 독주가 이어졌다. 묘한 운명 한 가지 더. 성냥왕이 떠난 1932년은 ○○의 출생연도다. 지금껏 5억 개 이상 팔려나갔다는, 그 유명한 지포(Zippo) 라이터!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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