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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혼타스 로맨스의 뒤안엔

15~17세기 중국의 정화, 유럽의 푸거, 아메리카의 포카혼타스의 역사가 보여주는 세계의 거대한 판도 변화
등록 2015-09-19 08:05 수정 2020-05-02 19:28
아름다운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곤 하는 포카혼타스. 그의 본래 이름은 마토아카이다. 그는 백인 이주민에게 납치당한 뒤 영국으로 가 식민지 투자 홍보대사 역할을 해야 했다. 한겨레

아름다운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곤 하는 포카혼타스. 그의 본래 이름은 마토아카이다. 그는 백인 이주민에게 납치당한 뒤 영국으로 가 식민지 투자 홍보대사 역할을 해야 했다. 한겨레

1609년 여름. 한 무리의 백인 이주민들이 인디언 포와탄족 마을을 급습했다. 백인들은 열네댓 살쯤 된 추장의 딸을 포로로 잡았다. 추장은 끝내 몸값 지불을 거부했다. 소녀는 백인 사회에 정착한 ‘최초의 인디언’이 됐다. 소녀의 이름은 마토아카(Matoaka). 포카혼타스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16세기 초반. 교황청이 발행하는 면죄부를 독점 판매하던 상인이 있었다. 판매 수익금의 30%를 대행 수수료로 챙겼다. 그(야콥)의 가문은 교황의 얼굴과 가문의 상징을 앞·뒷면에 새긴 주화를 발행해 유통시킬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왕은 군림하고 은행은 지배한다.” 푸거라는 성을 지닌 야콥네 가문의 ‘가훈’은 이랬다.

“왕은 군림하고 은행은 지배한다”

1405년. 한 동양인이 함선 300척에 나눠 탄 2만여 명을 이끌고 중국 항저우항을 떠났다. 뱃길은 인도양을 가로질러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다다랐다. 1424년까지 모두 여섯 차례의 원정이 이어졌다. 원정대 우두머리의 이름은 정화. 명나라 영락제 시절의 환관이었다.

어림잡아 200년 남짓한 시간대를 나눠 살다간 3명의 인물(가문). 살았던 시기와 무대도 서로 다르고, 세상에 남긴 흔적도 어느 하나 공통점이라곤 없다. 무엇보다 ‘피부색’이 제각각이다. 도대체 셋의 인생 사이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걸까? 시간 순서대로 다시 정리해보자.

15~17세기. ‘장기의 16세기’라는 표현이 있다.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때(1453년)부터 신·구교 종교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베스트팔렌조약이 맺어진 때(1648년)까지의 긴 시간대를 역사가들이 일컫는 말이다. 이전과 이후의 세상은 판이하게 구분된다. 앞선 때가 봉건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중세의 끝자락이었다면, 뒤쪽은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틀이 형성되는 기름진 토양이었다. 물론 전적으로 유럽 대륙에 한정된 이야기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 시간대는 동양과 서양의 판도가 근본적으로 뒤바뀐 대전환기와도 포개진다. 세 사람의 배역은 세계 역사의 갈림길과 맞닥뜨린 엇갈린 운명의 주인공들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정복당한 신대륙’ ‘발흥하는 구대륙’(서양), 그리고 ‘정체하는 구대륙’(동양).

왜 인류사의 시곗바늘이 유독 이 시간대를 지나는 동안 동양과 서양, 아시아와 유럽의 운명이 갈라서게 됐을까? 정화의 해양 원정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항해보다도 90년 남짓 앞섰다. 정화 원정대의 함선은 콜럼버스가 탄 산타마리아호보다 5배나 컸다. 이뿐 아니다. 화폐경제 생활만 보더라도, 유럽인들이 금속화폐에 매달리고 있을 때 인류 최초의 불태환지폐인 ‘교자’를 유통시킨 건 12세기의 동양(송나라)이다.

방대한 연구 결과가 쏟아졌다. 연구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리는 지점도 있다. 그럼에도 대략의 윤곽은 그려볼 만하다. 비밀을 풀 실마리는 세 개의 열쇳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역과 금융, 그리고 둘을 이어주는 항해. 바닷길 개척의 선두에 선 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스페인이 대서양 항로를 내는 데 좀더 집중한 편이었다면,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주된 활동무대로 삼았다. 나중엔 교황이 직접 나서 두 나라의 활동무대를 ‘교통정리’ 할 정도였다.

바닷길 개척의 핵심 동인은 장거리 무역이었다. 엄청난 이윤이 보장돼서다. 1497년 포르투갈의 마누엘왕이 바스쿠 다 가마에게 내린 명령은 단순했다. “향신료를 찾아라!” 당시 유럽인들은 계피·정향·육두구, 특히 후추에 열광했다. 아라비아와 인도 지방의 특산물인 후추 한 주먹의 양이 노예 10여 명과 교환됐다. 스페인도 뒤지지 않았다. 16세기 들어 이미 멕시코 서쪽 해안과 필리핀 마닐라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개척한 스페인은 남미 대륙에서 캐낸 은을 아시아로 보내고, 돌아올 땐 비단을 실어 유럽 대륙에 풀었다.

교황청과 손잡고 면죄부를 독점 판매해 부를 축적했던 푸거 가문. 한겨레

교황청과 손잡고 면죄부를 독점 판매해 부를 축적했던 푸거 가문. 한겨레

‘과시’에 나선 중국, ‘이윤’을 좇은 유럽

유럽인들의 장거리 항해는 이윤을 노린 무역과 상승작용을 일으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세기 초 정화의 원정대가 항저우항을 떠날 때 배 안에는 비단과 도자기, 종이 등 진귀한 물건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인도양 상인들한테서 후추·진주·보석·상아 등을 구입했다(심지어 오늘날 케냐에 해당하는 말린디에서는 추장한테서 기린을 선물받아 배에 태워왔다).

하지만 정화 원정대의 주된 관심은 황제의 부와 권력의 과시, 친선 관계 수립에 방점이 찍혀 있었을 뿐이다. 교역은 곁가지였다. 서양의 뱃사람들이 상인과 해적, 해군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 만큼 ‘포악’했던 것도 이윤 추구라는 동기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장거리 무역의 발달은 금융거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롬바르디아라 불리던 이탈리아 북부도시 상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오늘날로 치자면 전당포와 환전상 정도였으나, 그들의 영업행위는 실물거래 중개에 머물러 있던 금융업의 근간을 뒤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무역에 따른 진성어음 거래가 일종의 신용공급 기능을 한다는 이치를 가장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차츰 실물거래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금을 유통시킬 목적으로 어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기업어음(CP)의 원조 격이다. 그들은 또 무역상들한테서 받은 약속어음을 할인(대출)해준 뒤, 돈을 받을 때는 외국에 있는 사무소(연락책)에 현지 화폐로 갚도록 했다. 금리와 환율의 원리를 온전히 터득한 셈이다.

이탈리아 상인들이 싹 틔운 선진 금융기법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부수 효과도 적지 않다. 푸거 가문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무역 및 금융망을 ‘정보통신’ 사업에 활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투자 위험을 분산하는 다양한 회사 형태(합자회사·주식회사)를 선보인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역과 금융, 그리고 항해. 세 개의 톱니바퀴가 하나로 맞물려 유럽인들의 심장을 뛰게 하면서, 유럽 대륙은 격렬한 패권 다툼의 무대로 탈바꿈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나 푸거 가문 등 근대국가 이전 세력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들고, 근대국가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물고 물리는 경쟁이 펼쳐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 네덜란드 → 프랑스와 영국이 마치 ‘이어달리기’하듯 차례대로 패권을 접수하는 흥미진진한 드라마였다.

대체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역할은 항로 개척의 선두주자로 마무리됐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그들의 최대 ‘공로’라면 이웃나라를 위해 대양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데 있다. 대서양과 인도양을 아우르는 ‘고속도로’를 깔았다고나 할까.

당시로선 최첨단 플랫폼의 열매를 처음 누린 주인공은 네덜란드였다. 무역행위를 대하는 태도가 운명을 갈랐다. 상업을 경시하는 전통적 사고에 젖어 있던 스페인 귀족들은 가격상한제를 실시하고 값싼 외국산 제품의 수입을 부추기는 등 중상주의 정책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항해엔 능했으나 무역과 금융에선 뚜렷한 한계를 보인 스페인의 패권은 1560년 무렵을 정점으로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1606년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지어낸 돈키호테란 인물은 스페인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풍차를 보고 적으로 간주하는 돈키호테의 행동은 전통적 사고에 매몰돼 신문명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귀족들의 자화상이다.

역동적이고 생산적이었던 유럽의 패권 경쟁

이후 네덜란드는 급속히 유럽의 돈과 사람을 빨아들였다. 자금이 넘쳐나던 암스테르담은행의 금리는 여타 지역 은행들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르던 스페인 국왕조차 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전쟁비용을 충당했을 정도다. 네덜란드가 훗날 세계경제에 남긴 유산은 적지 않다. 토지소유권 보장, 법적 분쟁 절차의 확립, 해상보험, 부기교육 제도화 등의 원조는 네덜란드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지닌 한계 또한 명백했다. 금융과 무역에서 산업생산으로의 결정적 도약에 끝내 실패한 탓이다. 암스테르담 금융시장의 화려한 얼굴 이면엔 산업화의 후진성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익히 알다시피, 세계 최초의 산업혁명 몫은 18세기 이후 온전히 영국의 차지였다.

결과적으로, 15~17세기 내내 벌어진 치열한 패권 경쟁이 유럽(서양)을 살찌웠다. 고만고만한 나라들 사이의 물고 물리는 다툼이었기에 역동적이었고 동시에 생산적이었다. 전쟁은 선박과 대포 제조 기술의 발전을 강요했고, 특히 전쟁비용을 충당하는 과정에서 채권시장 개설 등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자금 조달 방식이 세상에 등장했다. 서양의 눈엔 ‘골든크로스’, 동양의 눈엔 ‘데드크로스’는 이렇게 찾아왔다.

결과는? 1616년. 포카혼타스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 땅을 방문했다. 국왕이 그를 직접 맞았다. 사연이 있었다. 포카혼타스를 납치했던 백인들이 세운 제임스타운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존 롤프라는 농장주가 토착 담배에 순한 자메이카 종자를 교배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품질 좋은 환금작물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제임스타운이 있는 버지니아엔 영국으로부터 돈과 사람이 몰려들었다. 식민 모국이 ‘문명화된’ 원주민 포카혼타스에게 기대한 건 바로 식민지 투자 ‘홍보대사’ 역할이었다.

1995년 디즈니가 선보인 장편 애니메이션 를 관통하는 코드는 단연 ‘로맨스’다. 제임스타운 건설 직후인 1607년 이주민 대표인 존 스미스가 포와탄족에 납치된 일이 있었는데 그가 죽음을 맞기 직전 포카혼타스가 구출해줬다는 게 17세기 중반부터 내려오는 전설의 뼈대다. 진실성을 두고 논란이 분분한 이야기를 디즈니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포장했다. 정복당한 신대륙(원주민)의 역사는 오직 자신들을 정복한 백인(서양)과의 화해 속에서나 기록되고 전승될 권리를 얻은 걸까.

정경유착의 화신이던 푸거 가문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물론 페루, 칠레의 광산까지 모조리 손에 넣었다. 무역거래를 뒷받침하는 촘촘한 금융망도 차지했다. 푸거 가문의 전체 재산은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메디치 가문의 5배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끝은 찾아왔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써붙였을 때, 교황청만 겨냥한 건 아니다. 교황청의 위탁을 받아 면죄부를 팔던 푸거 가문 역시 ‘공공의 적’이었다. 루터가 푸거 가문의 폭정에 시달리던 광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참고로, 1901년 미국에선 아이다 타벨이라는 이름의 탐사 전문 저널리스트가 석유재벌 록펠러의 행태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어 화제가 됐는데, 그는 록펠러에 의해 강제로 파산당한 석유업자의 딸이었다. 하나 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결코 급진적이지 않았다. 급진성은 내용에 있었던 게 아니라, 인쇄술의 발달로 유럽 전역에 30만 부 ‘인쇄·배포’됐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푼돈은 노동자에게, 큰돈은 자본가에게

영락제가 죽은 뒤 중국은 해금법(海禁法)을 공포했다. 돗대를 두 개 이상 단 선박을 제조하는 행위 자체가 금지됐다. 정화의 후예에겐 선조와는 전혀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 노동자들은 광산과 철도 건설 현장을 전전했다. 얼마 뒤 석유 열풍이 일었을 때, 미국인들은 중국 노동자들을 찾았다. 동양에선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하 깊숙한 염수층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기법이 널리 퍼져 있었다. 염수층 밑에는 대개 석유와 천연가스가 묻혀 있다. 전통 기술은 석유 시추에도 효험이 있었다. 물론 정화의 후예가 손에 쥔 건 푼돈뿐. 막대한 돈은 오로지 록펠러와 같은 소수 백인 자본가 차지였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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