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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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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먹은 기자들, 프리미엄을 알까

‘물 박사’와 워터 소믈리에가 평가하고
기자들이 맛본 백화점 워터바의 프리미엄 생수
등록 2014-07-31 06:06 수정 2020-05-02 19:27
서울 서초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지하 1층 ‘워터바’에서 고객들이 프리미엄 생수 수십 종 가운데 ‘좋은 물’을 고르고 있다.

서울 서초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지하 1층 ‘워터바’에서 고객들이 프리미엄 생수 수십 종 가운데 ‘좋은 물’을 고르고 있다.

[쇼핑 품목] 프리미엄 생수

“손님, 캐나다 빙하를 떠서 녹인 물로 드릴까요? 오스트레일리아 블루마운틴 동굴에서 떠온 알칼리수로 드릴까요?”

“워터 소믈리에가 맛있는 물로 추천해주세요.”

몇 년 뒤 당신은 식당이나 카페에 앉아서 이런 주문을 하게 될지 모른다. 비현실적인 상상이라고? 불과 2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했다. 왜 물을 굳이 돈 내고 사먹냐고! 생수 사업을 한다면 대동강 물을 팔았다는 봉이 김선달 취급받던 시절의 얘기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생수 판매는 허가되지 않았다. 1994년 대법원은 “먹는 샘물의 유통 금지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했다. 그로부터 20년. 국내 생수시장은 연간 6천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생수는 대형마트 음료 판매 순위에서도 올해 처음으로 과즙음료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수입되는 생수 규모도 2009년 663만달러에서 지난해 2477만달러(관세청 자료)로 4배 가까이 늘었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는 생수 종류만 100가지가 넘는다. 여기에다 최근 들어 탄산수가 인기를 끌면서 어떤 물을 마셔야 할지가 고민스럽다. 건강과 미용에 도움이 되는 ‘좋은 물’이라는 둥 듣기 좋은 말이 넘쳐난다. 물을 물로 보다가는 ‘물먹는’ 시대다. 물맛도 천차만별이다. 맥주나 와인처럼 ‘취향’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처럼 물을 까다롭게 고르는 소비자를 위해 백화점들은 자리를 내줬다. 바로 ‘워터바’ ‘워터테이블’이라고 불리는 매장이다. 2009년 국내 1호로 생긴 워터바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지하 1층에 자리잡고 있다. 롯데백화점도 인천 구월점에서 워터테이블을 운영하고 있는데 8월 수원점에도 입점을 준비 중이다. 그곳에 가면 ‘프리미엄 생수’라고 불리는 수십 종의 생수를 한번에 만날 수 있다. 이번 ‘카트21’에는 생수, 그중에서도 ‘프리미엄 생수’를 담았다. 과연 비싼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지, 실제로 맛의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쇼핑 장소] 워터바

지난 7월23일 서울 서초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지하 1층 식품 매장 한가운데 위치한 워터바를 찾았다. 쇼핑에 도움을 받기 위해, 물 환경·관리 정책을 20년 가까이 연구해왔고 지난해 (북마크)라는 책을 펴낸 ‘물 박사’ 이태관 계명대 교수(환경과학과)와 동행했다.

〈한겨레21〉 기자들이 블라인드 테스트로 맛본 8종류의 프리미엄 생수(오른쪽). ‘물 박사’인 이태관 계명대 교수(환경과학과)는 “국내 생수는 ‘살아 있는 물(生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겨레21〉 기자들이 블라인드 테스트로 맛본 8종류의 프리미엄 생수(오른쪽). ‘물 박사’인 이태관 계명대 교수(환경과학과)는 “국내 생수는 ‘살아 있는 물(生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에비앙, 피지워터 등 친숙한 수입 생수뿐만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생수까지 수십 종류의 물이 워터바 냉장고를 채우고 있다. 선뜻 어느 제품에 먼저 손이 가지 않았다. 삼다수, 아이시스 등 평소 마시는 국내산 생수는 워터바에서 팔지 않는다. 국내 제품으로는 강원도 고성 앞바다에서 생산되는 해양심층수 ‘천년동안’이 유일하다. 워터바 판매량 상위 제품을 3개만 꼽아달라고 했더니, 신세계백화점 쪽은 에비앙과 피지워터, 볼빅을 추천했다. 롯데백화점 인천 구월점에서도 에비앙과 피지워터가 많이 팔린다고 했다. 다만 롯데백화점 리스트에는 볼빅 대신 캐나다아이스가 추가됐다.

여기서 잠깐. 프리미엄 생수의 수원지는 프랑스(에비앙·볼빅), 피지공화국(피지워터), 캐나다의 빙하(캐나다아이스) 등 유럽이나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청정지역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물을 가장 많이 수입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지난해 수입량의 80%인 55만t)이다. 농심이 수입하는 ‘백산수’와 롯데칠성이 수입하는 ‘백두산 하늘샘’ 등이 중국산인 탓이다.

냉장고에선 흔히 보지 못했던 ‘와이웨라’와 ‘알카라이프’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와이웨라’는 뉴질랜드산 생수이고, ‘알카라이프’는 오스트레일리아 암반수에서 나온 자연알칼리수다. 이태관 교수는 “사실 전세계 시판 생수 제품의 절반가량은 수돗물로 만들었다. 수돗물을 떠다가 염소 성분을 제거한 뒤 미네랄을 넣은 것이다. 그런데 가격은 수돗물보다 1천~2천 배 비싸다. 수돗물보다 못한 생수도 많다”고 귀띔해줬다.

실제로 빙하수니 해양심층수니 하는 상표는 ‘눈가림용’일 때가 많다. 수자원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피터 글렉이 쓴 을 보면, ‘알래스카워터’는 주노시의 수도 배관 111241번에서 취수한 물이고 ‘악틱스프링’(북극의 샘)은 플로리다에서, ‘악틱클리어’(북극의 깨끗함)는 테네시에서 나온 물이다. 북극이나 빙하와는 거리가 멀다. 국내에서도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의 한 수원지에서 나오는 물이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풀무원샘물’ ‘롯데아이시스’ 등 서로 다른 상표를 달고 마치 ‘다른 물’인 것처럼 팔린다.

[주문 내역] 보스, 볼빅, 알카라이프, 에비앙, 와이웨라스틸, 천년동안, 캐나다아이스, 피지워터

워터바 점원과 이 교수의 추천을 받아 8개 브랜드 제품을 구입했다. 판매량이 많은 볼빅, 에비앙, 캐나다아이스, 피지워터를 구매 목록에 넣었고, 물의 종류도 따져서 빙하수(보스·캐나다아이스), 해양심층수(천년동안), 알칼리수(알카라이프) 등을 고루 포함시켰다. 생산지가 특정 지역에 쏠리지 않도록 유럽(에비앙·볼빅·보스), 태평양(알카라이프·와이웨라스틸·피지워터), 북미(캐나다아이스) 등도 적당히 섞어 넣었다.

가격이 비싼 순서대로 줄을 세워보니, 다음과 같았다. 10㎖당 가격 기준이다. 보스(160원) > 와이웨라스틸(78.7원) > 알카라이프(63.3원) > 캐나다아이스(50원) > 피지워터(45.4원) > 천년동안(28.5원) > 볼빅(23.6원)=에비앙(23.6원). 참고로 국내 생수 가운데 가장 싸게 팔리고 있는 제품(‘지리산수’)의 10㎖당 가격은 3.3원(사단법인 한국샘물협회의 2014년 6월 가격 조사 현황)이다.

‘보스’(VOSS)는 유리병에 담겨 있어서인지 가격이 가장 비쌌다. ‘멋’ 때문이다. 향수병이나 화장품병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유리병의 디자인은 캘빈클라인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닐 크라프트의 작품이다. 드라마 에서 세라 제시카 파커가 들고 다니던 간지 나는 물병이 바로 보스다. 워터바는 아예 입보다 눈이 더 즐거운 물병만 따로 전시해놨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워터바에서는 에비앙 한정판(리미티드 에디션) 유리병 제품의 경우, 1병(750㎖)당 1만2천원에 팔리고 있다. 워터바 점원은 “20대 젊은이들 가운데 유리병을 수집할 목적으로 사가는 경우도 제법 있다”고 말했다.

[쇼핑 후기] 물맛 블라인드 테스트

그렇다면 진짜 비싼 물이 맛있을까? 를 쓴 공승식 롯데호텔 와인 소믈리에는 “전체적인 향과 목을 넘어가는 느낌, 미묘하게 느껴지는 달큰하면서도 짭짤한 맛에 따라 물맛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수자원공사가 2012년부터 주관하는 민간자격검정시험인 ‘워터 소믈리에’ 자격증을 갖고 있다.

물맛을 결정하는 건 물속에 녹아 있는 다양한 성분의 함량이다. 이를테면 칼슘과 칼륨은 단맛을 내고 마그네슘은 비릿하거나 쓴맛을 낸다. 흔히 ‘보디감’이라고 부르는 느낌(경도)은 물에 포함된 칼슘과 마그네슘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에 달려 있다. 경도가 높은 물은 진한 맛이 나고, 경도가 낮은 물은 담백하고 부드럽다. 한국수자원공사 수질분석연구센터 관계자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물을 가장 맛있다고 한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면 유럽 사람들은 에비앙이, 서울 사람은 아리수가, 충청도 사람은 대청댐이 수원인 수돗물을 가장 맛있다고 하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워터 소믈리에처럼 민감한 혀를 갖고 있지 않아도 물맛 구별이 가능할까? 기자 5명과 인턴기자 2명을 상대로 간단한 실험을 해봤다. 구매한 8개 프리미엄 생수를 각각 1~8번까지 번호를 붙인 컵에 따르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했다. 냉장고에 넣어둔 찬물은 무조건 ‘맛있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아, 가장 맛을 잘 느낄 수 있는 상온 10~15℃에 물을 보관했다가 실험에 사용했다. 각자 추천하고 싶은 물을 1~2개씩 고르고, 특별한 맛이나 느낌은 따로 기록했다.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미식가도 아니고 ‘절대미각’을 자랑하는 전문가도 아닌데 물맛을 그럴싸하게 파악해낸 것이다. 노르웨이 빙하퇴적층 아래 천연 지하암반수를 길어올린 ‘보스’가 가장 많은 3표를 받았다. “청량하다”(김성환 기자), “가볍다”(이완 기자), “느끼하지 않다”(서지원 인턴기자)는 느낌은 “물속에 함유된 무기물의 함량이 낮아 순수한 물맛을 느낄 수 있다”(공승식 소믈리에)는 전문가의 평가와 엇비슷했다. 그다음은 ‘피지워터’ 2표, ‘볼빅’과 ‘천년동안’ 각각 1표 순서였다. 구둘래 기자와 박수진 기자는 “부드럽다”는 이유로 각각 피지워터와 볼빅을 1순위로 꼽았다. 공승식 소믈리에는 “부드럽고 순한 첫맛 뒤에 살짝 비릿한 광물질 향이 느껴진다”(볼빅),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삼다수와 맛이 흡사하다”(피지워터)고 평한다. 국내 생수시장의 4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삼다수와 비슷한 맛에 익숙함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에비앙’에 대해선 평가가 극단으로 갈렸다. “비릿하다”(구둘래 기자), “찝찔하다”(박수진 기자), “입에 뭔가 남은 느낌”(박선희 인턴기자)이라는 비호감이 많았다. 에비앙은 프랑스 알프스산맥이 있는 에비앙이라는 지역에서 끌어올린 물로, 약간 쓴 뒷맛이 남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태관 교수는 가장 좋아하는 물로 에비앙을 꼽았다. 취수한 자리에서 바로 병에 물을 담는 ‘살아 있는 물’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교수는 “국내 생수는 각종 화학처리로 인해 ‘살아 있는 물’(生水)이 아니라 정수기 물이나 마찬가지다”라고 꼬집었다.

맛의 차이는 병에 부착된 라벨에 적힌 무기물질 함량에서도 확인된다. 에비앙은 칼슘 39~98, 마그네슘 16~32, 나트륨 4~10으로 무거운 반면, 보스는 칼슘 5, 마그네슘 1, 나트륨 6(mg/ℓ)에 불과해 가볍다.

이런 소비자에게 추천

지구촌 한편에서 마실 물이 없어 숨지는 아이들이 떠오른다면, 프리미엄 생수는 ‘비추’다. 프리미엄 생수 판매 가격이 수입 가격의 약 4.2배(지난 5월30일 관세청 자료)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면 역시 ‘비추’다. 그럼에도 수돗물을 믿고 마실 수 없게 만든 정부 탓에 수돗물과 국내산 생수의 안전성이 못 미덥다면, 그리고 유난히 물맛에 예민하다면 프리미엄 생수 구매를 말리지는 않겠다. 생수는 분명 “20세기 최대의 마케팅 성공작”()이다.

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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