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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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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합과의 전쟁 성공의 조건들

담합행위 규제 강화 나선 공정위와 근절 의지 보이는 재계
소비자 집단소송제 도입, 과징금 현실화 등 제도 개선 필요
등록 2012-02-09 02:44 수정 2020-05-02 19:26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대기업들은 이런 규제 강화에 반시장적이라거나 반기업 정서를 조장한다며 반발해온 것이 상례다. 하지만 대기업이 정면으로 반발하지 못하는 예외적인 규제도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공적’으로 불리는 담합이다. ‘카르텔’ 또는 ‘부당 공동행위’로도 불리는 담합은 복수의 사업자가 공동으로 부당하게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다. 담합 유형은 상품·용역 가격, 거래 조건, 생산량 결정 등 다양하다.

» 대기업의 담합 행위 적발이 잇따르는 가운데 담합의 주범인 독과점 대기업, 담합을 규제하는 정부(공정거래위원회), 관련 소송을 맡는 변호사 3자가 모두 담합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1월30일 기업 담합 척결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 대기업의 담합 행위 적발이 잇따르는 가운데 담합의 주범인 독과점 대기업, 담합을 규제하는 정부(공정거래위원회), 관련 소송을 맡는 변호사 3자가 모두 담합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1월30일 기업 담합 척결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담합 근절 선언한 ‘반칙왕’ 삼성

주로 독과점기업들이 주도하는 담합은 공정한 경쟁에 위배된다는 인식이 오래전부터 확립돼왔다. 담합에 대한 최초의 명문화된 규제는 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15년 제정된 영국의 대헌장(마그나카르타)은 상인들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을 명문화했고, 이 내용은 이후 영국 보통법(시민법)의 대원칙이 됐다. 이 원칙은 절대권력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1602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친척에게 33년간 영국에서 카드를 홀로 생산·수입·판매할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법원은 “여왕의 독점권 부여가 영국 국민 전체의 이익과 자유에 배치된다”며 무효라고 판결했다.

산업혁명 이후 대기업의 출현으로 독점과 담합의 피해는 더욱 확대됐다. 미국은 보통법이 아닌 별도의 특별법으로 이를 규제한 최초의 나라다. 19세기 후반 록펠러로 상징되는 철도와 석유 등 대자본들은 트러스트 제도를 이용해 기업 간 경쟁을 배제하고 상품 가격을 멋대로 인상하는 등 횡포가 극심했다. 이를 막으려고 1890년 ‘셔먼 트러스트법’이, 1914년 ‘클레이턴법’과 ‘연방거래위원회법’이 제정됐다. 공정위의 김재신 카르텔총괄과장은 “담합의 피해는 특정 거래 상대방이 아니라 다수의 일반 소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미치고, 자유로운 경쟁에 기반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을 해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대기업들의 담합행위로 인한 소비자 피해 규모 금액은 천문학적이다. 한 예로 공정위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생명보험사들의 이자율 담합 사건의 경우 보험 가입자들의 피해 금액이 2001~2006년 7년간 16조3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금융소비자연맹은 추산했다. 담합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를 위협하는 일종의 반체제 범죄다.

공정위가 최근 산업 전반에 걸친 독과점 대기업들의 담합행위 적발을 계기로 다각적으로 관련 규제 강화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고도 반가운 일이다. 공정위는 올해 처음으로 소비자들의 담합 소송 지원책을 마련했다. 또 독과점이 담합의 구조적 온상이 되는 점을 중시해, 기업결합 신고 때 경쟁제한성 심사를 더욱 엄격히 하기로 했다. 리니언시제(자진신고감면제)도 손질했다. 리니언시는 담합 기업이 조사 과정에서 법 위반 사실을 자백하고 실제 납부할 과징금을 최대 50%까지 면제받는 제도다. 공정위는 한 번 리니언시 혜택을 받은 기업은 향후 5년간 다시 혜택을 받을 수 없도록 개정했다. 상습 담합 업체가 얌체짓을 못하도록 한 것이다.

마침 삼성이 담합 근절 선언을 했다. 삼성 최고위급 임원들은 사장단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담합은 해사 행위이고 담합에 절대 관용은 없다”며 담합 근절 의지를 밝혔다. 담합을 부정과 똑같은 해사 행위로 간주해 무관용으로 처벌하겠다고도 선언했다. 삼성의 선언은 재계 1위 재벌이자, 그동안 상습 담합 기업으로 지목돼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삼성의 변화는 담합 관행이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 1년 사이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한 담합 사건은 모두 36건이다. 이 중에서 삼성이 관련된 사건은 무려 8건에 이른다. 거의 한 달 보름마다 1건씩 적발된 셈이다. 삼성 계열사가 담합 사건으로 부과받은 과징금은 3500억원에 육박한다. ‘삼성=반칙왕’이라는 타이틀이 붙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재벌, 담합 사건 제재에 예외 없이 소송

갈수록 강화되는 국제카르텔 규제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금까지 국내 기업들이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에서 제재를 당한 사건은 모두 12건이다. 부과된 벌금이나 과징금만 2조4천억원에 달한다. 관련 임직원 15명이 기소됐고, 이 중 12명이 최장 1년 이상의 징역형을 살았다. 삼성은 반도체 D램, 브라운관 등 4개 사건에서 적발됐다. 삼성전자 고위 임원은 “매출 160조원이 넘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기업이라는 위상을 고려할 때 관행처럼 벌여온 담합을 뿌리 뽑지 않으면 신뢰도 추락 등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1위 기업인 삼성의 변화가 다른 기업들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한다. 당장 재계 4위인 LG의 구본무 회장은 2월3일 신임 임원 교육에서 직접 담합행위 근절을 선언했다.

최근에는 법조인들까지 담합 근절을 위해 들고일어났다. 서울변호사회는 지난 1월30일 기업담합 척결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2월2일에는 삼성생명·대한생명 등 생명보험회사들의 이자율 담합 피해자 30명을 대리해 공익소송을 제기했다. 서울변호사회 오영중 인권이사는 “기업담합은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선진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헌법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결국 담합의 주범인 독과점 대기업, 이를 규제하는 정부(공정거래위원회), 담합 관련 소송을 맡는 변호사 3자가 모두 담합과의 전쟁을 선언한 셈이다. 그 어느 때보다 담합 근절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배경이다. 하지만 결실을 거둘지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대기업들이 담합 근절을 강조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삼성은 담합행위를 뿌리 뽑겠다며 2010년부터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4월 마지막 주를 ‘준법경영 선포주간’으로 정해 임직원 교육과 사내 점검을 한층 강화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담합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대기업들이 공정위의 담합 사건 제재에 거의 예외 없이 소송을 제기하는 행태도 담합 근절 의지를 의심받게 하는 요인이다. 담합 관련 임직원들에 대한 사후 처리도 근절 의지와는 거리가 있다. 담합 사건을 많이 다룬 공정위의 한 조사관은 “국내 기업들에서 담합 관련 임직원이 처벌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며 “외국계 기업들이 관련 임직원들을 엄하게 징계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고 지적했다. 국내 대기업의 한 영업담당 임원은 “담당자들은 항상 실적 경쟁에 쫓기기 때문에 위법인 줄 알면서도 담합의 유혹을 항상 느끼게 된다”며 “최고경영자들도 담합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이를 묵인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 삼성그룹 계열사의 최근 1년간 담합 적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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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징금, 매출액의 1.5~2% 수준에 불과

담합을 실질적으로 근절하려면 인식의 전환과 함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우선 담합 사건에 대해 소비자들의 피해 구제가 손쉽게 이뤄지도록 ‘소비자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또한 담합 피해자들이 손배배상소송을 더 쉽게 제기할 수 있도록 공정위의 피해 금액 산정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담합 사건에 대한 제재도 더 엄격히 해야 한다. 현행법은 담합 사건에 대해 관련 매출액의 1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하지만 공정위의 실제 과징금 부과율은 관련 매출액의 1.5~2% 수준에 불과하다. ‘솜방망이 처벌’이다. 반면 선진국의 벌금이나 과징금 부과 기준은 훨씬 엄격하다. EU는 우리처럼 관련 매출액의 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하지만, 관련 매출액의 산정 기준이 전세계 매출액으로 훨씬 크다. 미국은 담합으로 인한 부당이익의 2배, 담합으로 인한 피해액의 2배 중에서 큰 금액을 벌금으로 부과한다. 담합 사건에 대해서는 피해액의 3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공정위가 2007년 이후 최근 5년간 시정명령 이상의 제재 조처를 내린 담합 사건은 모두 194건이다. 이 중에서 공정위가 검찰에 고발한 사건은 27건으로 고작 14%에 불과하다. 공정위의 담합 엄벌 방침이 무색할 지경이다. 법 위반 업체가 중소기업이거나 피해 규모가 작은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검찰에 고발하도록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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