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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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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 하는 게 ‘전략적사고’다

공정거래법 위반한 효성 조석래 회장 3년 전과 달리 ‘경고’ 처분 내린 공정위
대통령 뜻만 따르는 정무적 판단보다 경제검찰 본연의 역할 중요한 시점이다
등록 2013-09-05 05:10 수정 2020-05-02 19:27

한국 경제관료의 양대 축은 과거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출신이다.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은 기획원 출신 행정고시 23회 중에서도 조원동 경제수석과 함께 쌍두마차로 불려왔다. 한만수 이화여대 교수가 수십억원대 해외 비자금 계좌 운영과 탈세 스캔들로 공정위원장 후보에서 낙마한 뒤 노대래 위원장이 새 후보로 지명되자 공정위 직원들은 반색했다. 사무관 시절 공정위 업무를 한 전력에다, 업무 능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신임 위원장에 대한 기대가 컸다.

가중처벌 대상인데 경고 처분

이런 노 위원장이 요즘 공정위 직원들에게 자주 쓰는 말이 ‘전략적 사고’다. 달리 표현하면 공정위 직원들에게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전략’은 본래 군사용어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일체의 행동계획을 뜻한다. 요즘에는 군사뿐만 아니라 대다수 분야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면서, 특정한 목표 달성을 위해 현실 조건에 기반해 짜낸 최적의 계획을 가리킨다.
하지만 공직사회에서는 이처럼 좋은 뜻이 담긴 ‘전략적 사고’가 꼭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8월23일 공정위가 재벌 총수가 위장 계열사를 운영하며 허위 자료를 제출해 공정거래법을 위반한 사건에 대해 경고라는 솜방망이 처분만 내려 ‘봐주기’ 논란을 키운 게 좋은 사례다. 효성그룹의 조석래 회장은 계열사인 공덕개발의 주식을 20여 년간 차명 소유하는 방식으로 위장 계열사를 운영하면서, 공정위에 제출한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 관련 계열사 현황 자료에서 누락시켰다가 지난해 하반기에 뒤늦게 신고했다.

지난 8월2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기업 회장단 오찬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의 30대 그룹 상반기 투자 고용 실적 및 하반기 계획 발표를 듣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8월2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기업 회장단 오찬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의 30대 그룹 상반기 투자 고용 실적 및 하반기 계획 발표를 듣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공정위의 경고 처분은 2010년에 있었던 유사 사건의 제재 수위와 비교할 때 형평성을 상실했다. 당시 한 재벌그룹 회장이 계열사 현황 자료를 내면서 7개 위장 계열사를 누락시킨 사실이 드러나자, 공정위는 검찰에 이를 고발했다. 공정위는 고발 이유로 재벌 규제의 실효성을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중대한 위법행위이고, 법 위반 행위가 20년 이상 장기간 지속됐으며, (총수가) 법 위반 사실을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같은 고발 이유는 3년의 시차가 있지만 이번 사건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더구나 3년 전의 그 재벌 회장은 다름 아닌 조석래 회장이다. 조 회장은 재범으로, 가중처벌 대상이다.

공정위는 왜 봐주기 제재를 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8월28일 청와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 10대 그룹 총수들의 오찬회동에 주목한다.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경제 살리기를 위한 투자와 고용 확대를 당부하는 시점에 공정위의 재벌 총수 고발 보도가 나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전략적 사고’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처럼 공무원들의 전략적 사고는 흔히 ‘정무적 판단’과 동의어가 된다. 정무적 판단을 잘하는 공무원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상황, 대통령의 의중, 여론의 향배 등 주변 여건을 종합적으로 잘 고려해 정책 수립과 집행을 하는 능력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눈치를 잘 보는 사람’에 불과하다. 공정위는 이번 사건이 전략적 사고, 또는 정무적 판단의 결과냐는 질문에 펄쩍 뛴다. 하지만 노 위원장은 이번 사건에 대해 “(공정위가) 죽도록 고생하며 일하고도 욕먹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일 때문”이라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대형 로펌 “일거리 없어 굶어죽겠다”

공정위 역사에서 정무적 판단이 낳은 실패 사례는 여럿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임 김동수 위원장 시절에 공정위가 정부의 물가 단속 기관으로 전락한 일이다. 공정위는 시장경제의 파수꾼으로서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공정위가 조사를 빙자해 기업들의 팔을 비틀어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것은 옳지 않고, 성공할 수도 없다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2011년 초 취임하자마자 “공정위가 물가기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들은 사표를 쓰라”고 압박했다. 물가 안정에 힘쓰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에 순종한 것이다. 공정위를 물가안정위원회로 전락시킨 것은 국제적으로도 손가락질 대상이 됐다. 세계적인 경쟁 분야 전문지인 영국의 (GCR)은 지난 7월 전세계 주요국의 경쟁 당국을 대상으로 발표한 2012년 평가에서 한국 공정위의 등급을 기존 별 4개에서 3.5개로 하향 조처하며 “한국 공정위가 지난해 많은 시간을 핵심 업무인 카르텔(담합) 조사 외에 가격통제에 투입했다”고 지적했다.

김동수 위원장과 그 전임인 정호열 위원장이 함께 연루된 4대강 입찰 담합 늑장 처리 사건도 공정위의 정무적 판단이 빚은 참사다. 이명박 정부 최대의 국책사업인 4대강은 사업 초기인 2009년 가을부터 국회를 중심으로 담합 의혹이 제기됐다. 공정위는 신속한 조사를 통해 사업 초기 담합 혐의를 잡고도 2년6개월 이상 시간 끌기로 일관했다. 결국은 4대강 사업이 다 마무리된 뒤인 지난해 6월에야 뒤늦게 제재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에도 공정위 업무에 정무적 판단이 작용했다.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워 규제 완화 등 친기업 정책을 밀어붙였다. 공정위도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기업의 반칙 행위를 조사해 엄중하게 제재하는 본연의 역할에서 움츠러들었다. 공정위 간부는 “당시 기업 조사와 과징금 부과 실적이 예년에 비해 크게 줄었다”면서 “최근에도 비슷한 분위기”라고 털어놨다. 공정위로부터 제재를 받은 기업들을 변호해 돈을 버는 대형 로펌들이 요즘 “공정위가 조사를 하지 않아 (일거리가 없어) 굶어죽는다”고 하소연한다는 풍문까지 들린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걸고 당선됐다. 지난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에는 140개 국정과제를 발표하며 경제민주화 관련 내용을 대거 포함시켰다. 하지만 올해 하반기 경제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경제 살리기로 전환하면서, 경제민주화는 후퇴 분위기가 완연하다. 지난 8월28일에는 대통령이 10대 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나 과도한 규제로 변질되지 않고 본래 취지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재벌들에게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한 셈이다.

공정위는 시장경제의 심판

경제민주화의 주무부처인 공정위의 중심 잡기가 중요한 시점이다. 공정위 안에서는 이런 때일수록 공정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시각과,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뜻에 순응해야 한다는 시각이 교차한다. 노대래 위원장은 최근 외부 전문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공정위는 다른 정부부처와 달리 (기업에 대한) 조사와 제재를 하는 곳”이라는 소신을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공정위 직원들 간에는 “수출 대기업에 대한 조사를 자제하라”는 상부 지시가 있었다는 상반된 얘기도 흘러나온다.

경제검찰인 공정위는 시장경제의 심판이다. 선수가 동일한 행위를 했는데도, 심판이 외부 환경에 따라 어떤 때는 반칙 휘슬을 불고 어떤 때는 불지 않는다면, 경기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공정위는 정무적 판단보다, 법대로 처리하는 게 훨씬 중요한 곳이다. 공정위에는 그것이 가장 전략적인 사고다.

곽정수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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