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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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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을 날려버릴 박근혜의 ‘종이마패’

등록 2013-01-26 01:22 수정 2020-05-02 19:27

1970년 2월3일.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포철 사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조국 근대화를 내걸고 대일청구권 자금까지 동원해 짓던 포철의 공사 진척 상황을 보고받기 위해서였다. “구매 절차에 문제가 있습니다.” 박태준은 굳은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당시 포철의 설비 구매 과정에서 공급업체에 상납과 리베이트를 받아내려는 정치인들의 간섭과 압력이 극심했다. 대통령은 박 사장에게 건의 내용을 메모지에 적도록 한 뒤 왼쪽 상단 모서리에 친필 서명을 했다.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 대통령의 친필 서명 메모지는 포철 임원들이 외압을 물리치는 ‘종이마패’가 됐고, 지금도 포항의 포스코 역사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2004년 12월14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박지만씨의 결혼식에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뒤에 하객으로 참석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박태준 전 총리가 보인다. 국회사진기자단

2004년 12월14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박지만씨의 결혼식에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뒤에 하객으로 참석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박태준 전 총리가 보인다. 국회사진기자단

정부의 인사 개입 법적 근거 없어

포스코는 이런 어려움을 딛고 국민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지난 20년간의 최고경영자(CEO) 교체 역사는 말 그대로 잔혹사(殘酷史)다. 역대 회장들 모두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외풍에 휩쓸려 중도 퇴진하는 비운을 면치 못했다. 포철을 세계적 철강업체로 키우며 한국 철강업계의 대부로 불린 박태준 회장은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 10월 민자당 김영삼 대통령 후보와의 갈등 끝에 전격 퇴진했다. 2대인 황경로 회장도 김영삼 정부의 출범과 함께 6개월 단명으로 끝났다.

3대인 정명식 회장 체제도 1년 만에 막을 내린다. 김영삼 정부는 1994년 3월 김만제 전 재무부 장관을 4대 회장으로 내려보냈다. 4년 뒤 이른바 DJP 연대를 통해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며 박태준 명예회장(당시 자민련 총재)의 영향력이 살아나자, 김 회장이 물러나고 유상부 회장이 들어섰다. 2003년 3월 노무현 정부가 김대중 정부에 이어 정권 연장에 성공해 출범했지만 유 회장도포스코 CEO 잔혹사의 악순환을 피해가지 못했다. 후임자인 이구택 회장은 임기 중인 2006년 과거의 악순환을 끊고 투명하고 독립적인 CEO 선임이 가능하게 하겠다며 CEO후보추천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뒤인 2009년 결국 중도 퇴임하게 된다.

이 회장의 퇴진과 후임 회장 선정 과정은 포스코 CEO 교체 역사에서도 최악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회장은 비리 수사를 앞세운 사정 당국의 압수수색 으름장에 결국 백기를 들고 사임했다. 후임자 선임 과정에서는 대통령의 최측근인 천신일 전 세중나모 회장과,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의 측근인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개입 흔적이 도처에서 드러났다. 유력한 CEO 후보였던 윤석만 사장은 2009년 1월29일 CEO후보추천위원회에서 “(권력 실세로부터) 후보 사퇴 압력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포스코가 민영화된 이후 정부 주식은 단 한 주도 없다. 정부가 포스코 CEO 인사에 개입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시장경제 원리를 부정하는 범죄행위일 뿐이다. 권력이 포스코 CEO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포스코를 권력의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각종 이권을 챙기겠다는 야욕 때문이어서 어떤 이유로든 합리화하기 힘들다.

MB 정권 전리품으로 전락한 공기업들

정권의 개입 때마다 포스코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특히 MB 정부 실세들의 개입으로 조직 내부가 반목과 갈등에 휩싸였다. 정권 실세들이 각종 이권을 챙겼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아, 현 경영진에게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하지만 권력의 개입이 재연된다면 포스코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다. 장기 불황에 빠진 전세계 철강업계는 지금 누가 먼저 죽느냐를 놓고 눈치 보기를 하는 극심한 ‘치킨게임’이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코가 정권의 인사 개입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면, 주주들에게 집단소송을 당할지도 모른다.

권력이 아무 근거 없이 CEO 인사에 불법적으로 개입하는 민간 기업은 비단 포스코뿐만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4년 전 최대 통신회사인 KT의 CEO로 이석채 회장을 앉히려고 회사 정관까지 멋대로 바꾸었다. 퇴진을 거부하는 KT와 KTF의 CEO들을 비리 혐의로 수사한 것은 포스코와 판박이다. 이석채 회장 취임 이후 KT에는 MB 관련 인사들이 ‘낙하산부대’ 규모로 대거 영입됐다. 한국 금융산업의 간판 격인 금융지주회사들도 정권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대통령의 측근인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사임)은 금융계에서 ‘4대 천왕’이라고 불렸을 정도다.

“5년 전에는 서로들 권력 실세들에게 줄을 대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 임원이 전하는 최근 분위기다. 예전에는 CEO들의 교체를 기정사실화하며 서로들 인수위의 권력 실세에게 줄을 대려고 무한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들 입조심, 몸조심하고 있다. 오히려 하마평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면 불리하다는 소문이 돌아 긴장한다. 언론에 자기 이름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역으로 청탁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지고 있다. 여당의 한 인사는 “인수위 인사를 봐라. 언론에 하마평이 났던 사람들 중에서 누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런 변화는 무엇보다 박근혜 당선인의 인수위에 대한 태도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 당선인은 인수위원들에게 낮고 겸손한 자세를 강조하며 인수위가 권력기관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5년 전에는 인수위에 권력 실세들이 모두 들어갔다. 이들이 실제 각종 인사에 개입했고, 줄을 대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지금은 박 당선인의 철통 보안 지시와 맞물려 인수위 사람들과의 접촉 자체가 어렵다고 모두들 입을 모은다. 대기업의 한 대관업무 담당자는 “전화도 안 받고 심지어 문자메시지도 씹는다. 모두 다 접근이 안 되니까 차라리 속 편한 측면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물론 오랜 인사 개입 관행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는 쉽지 않다. 박 당선인의 신중한 행보가 정부 출범 이후까지 계속 이어질지도 불확실하다. 포스코와 KT의 회장도 이명박 정부 출범 1년 뒤에 바뀌었다.

정부 불법 개입에 종지부 찍어야

“국민들께도 큰 부담이 되는 것이고, 다음 정부에도 부담이 되는 것으로 잘못된 일이다.” 박근혜 당선인은 지난해 말 이명박 정부의 임기 말 공기업과 공공기관에 대한 낙하산 인사를 겨냥해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전문성이 없는 낙하산 인사의 폐해는 두말할 필요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정부가 권한도 없는 민간 기업의 CEO 인사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 악순환을 끊으려면 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박 당선인의 포스코에 대한 생각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정희 성공신화’의 상징과도 같으니 그럴 만도 하다. 또한 고 박태준 회장은 박근혜 당선인과 동생인 지만씨가 어려울 때 챙겨준 은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만씨가 경영하는 삼양산업은 원래 포스코의 협력업체로 제철소에서 나오는 산화철을 재활용하는 업체였다. 박태준 회장은 1989년 지만씨를 이 회사의 부사장으로 취직시켜줬고, 지만씨는 나중에 회사 지분을 모두 인수해 실질적인 사주가 됐다.

고 박태준 회장은 정치 외풍으로부터 포스코를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해왔다. 이제는 박 당선인이 정부의 불법 개입에 종지부를 찍는 ‘종이마패’를 쓸 차례다. 그런 다음 포스코, KT, 금융지주 자체적으로 투명하고 합리적인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현 최고경영진이 후배들을 위해 결단을 내리도록 하는 게 순리다.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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