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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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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 마뜩잖은 MB와 재벌들의 비밀

사회책임 꺼리며 자선활동·사회공헌 선호하는 재벌 총수들
돈 버는 과정이 정당하지 못한 부자들의 두려움의 발로인가?
등록 2011-08-25 08:21 수정 2020-05-02 19:26
» 현대중공업 그룹을 중심으로 범현대가 그룹사들이 사재를 출연해 5천억원 규모의 사회재단인 '아산나눔재단'을 만들기로 했다. 정진홍 재단준비위원장이 8월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사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설립계획 등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 현대중공업 그룹을 중심으로 범현대가 그룹사들이 사재를 출연해 5천억원 규모의 사회재단인 '아산나눔재단'을 만들기로 했다. 정진홍 재단준비위원장이 8월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사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설립계획 등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현대중공업·KCC 등 범현대그룹이 8월16일 5천억원 규모의 ‘아산나눔재단‘ 설립을 발표했다. 특히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현대중공업 대주주)는 2천억원을 기부하겠다는 통 큰 결정을 내렸다. 범현대가는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10주기를 맞아 고인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수들의 헌납, 돈으론 산 면죄부?

마침 이보다 이틀 전인 14일에는 미국의 억만장자인 워런 버핏이 에 ‘부자 감싸기를 중단하라’는 기고문을 통해 재정위기 해결을 위한 부자 증세를 제안했다. 버핏 회장은 “친부자 성향의 미 의회는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나와 내 친구들을 감싸왔는데, 이제 미 정부가 좀더 진지하게 고통 분담을 생각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의 발언은 심각한 재정적자와 그에 따른 국가신용등급 강등으로 위기감이 높아진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동안 대기업과 부자들의 감세 요구만 귀가 따갑게 들어온 우리 국민에게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음날인 15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시장경제의 새 모델이 요구되고 있다며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생 발전’을 화두로 제시했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탐욕경영’에서 ‘윤리경영’으로, ‘자본의 경영’에서 ‘자본의 책임’으로, ‘부익부 빈익빈’에서 ‘상생 번영’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점만 놓고 보면 범현대가의 5천억원 쾌척이 마치 워런 버핏이나 이 대통령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몽준 의원의 대권 행보와 연관짓기도 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범현대가의 한 그룹 총수에게 재단 설립의 결정 시기와 경위를 물어봤다. “(정 명예회장의) 10주기를 맞아 뭔가 뜻깊은 일을 하자는 얘기는 훨씬 전부터 있었어요. 그런데 지난 7월 말 고 김영주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정 명예회장의 매제) 1주기 모임에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됐고, 모두들 흔쾌히 동참의 뜻을 밝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회사 규모에 비해 좀 과하다고(?) 할 수 있는 150억원의 거액을 선뜻 내놓겠다며 분위기를 주도했다고 한다.

전말이 이렇다면, 범현대가로서는 외부의 의심스런 시선에 섭섭한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무조건 탓하기도 어려운 것이 솔직한 우리 현실이다.

국민들은 그동안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이 꼭 순수한 동기로 이뤄지는 게 아님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 중에서 기부액 규모로 역대 1·2위는 단연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과 현대·기아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이 꼽힌다. 이 회장은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삼성의 대선자금 불법 지원 공모를 안기부가 불법 도청한 사건)과 고려대생들의 박사학위 수여 저지 사건, 삼성에버랜드 등의 주식 저가 인수를 통한 편법·불법 상속 논란이 겹치면서 이른바 ‘삼성 제국 논란’이 거세지자, 2006년 2월 대국민 사과와 함께 8천억원의 사회 헌납을 발표했다. 이 회장은 삼성 비자금 사건에 대한 특검의 수사 결과 발표를 앞둔 2008년 4월에도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며, 수사에서 드러난 4조5천억원의 차명재산 중에서 삼성생명 주식을 제외한 나머지는 세금 납부를 하고 난 뒤 사회를 위해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 규모는 최소 1조4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몽구 회장은 이에 앞서 2006년 현대·기아차그룹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와 함께 1조원을 조건 없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국민의 눈에는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은 사회책임 이행이 아니라 돈으로 면죄부를 사려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 또 재벌 총수들의 사재 출연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훼손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잘못된 사회현상을 심화시킨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사회책임 국제기구 가입 부진한 이유

재벌 총수들이 사회환원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불신도 크다.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이건희 회장이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받고, 경영에 복귀한 지 이미 1년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차명재산의 사회헌납 약속 이행은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정몽구 회장은 2007~2009년 세 차례에 걸쳐 총 1500억원 상당의 글로비스 주식을 기부했다. 정 회장이 애초 약속한 2013년의 시한까지는 아직 2년이 남았지만, 약속한 금액 기준으로는 15%에 불과하다. 불법행위로 사법처벌을 앞둔 재벌 총수들이 재판에서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려고 국민과 사법부를 속였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근본적으로 재벌 총수들의 사회 출연은 진정한 기업의 사회책임 이행과는 거리가 있다. 지난해 11월 사회책임에 관한 국제표준으로 정식 출범한 ISO 26000의 정의를 보면, 사회책임은 기업과 같은 사회조직들이 투명하고 윤리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결정과 활동이 사회와 환경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 ISO 26000 개발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오스트리아 빈 국립대학의 마르틴 노이라이터 교수는 이를 좀더 쉽게 설명한다. “기업의 사회책임과 자선활동은 다르다. 자선활동은 기업의 이윤 중 일부로 남을 돕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책임은 이윤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7대 원칙(투명성·윤리적 행동·이해관계자 존중·법치주의 존중·인권존중 등)을 잘 지키는 것이다.”

재벌들은 흔히 자선활동이나 사회공헌으로 사회책임을 대체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우리 속담을 인용한다. 하지만 이는 사회책임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돈을 버는 과정 자체가 정당해야 한다. 재벌들이 아무리 많은 매출과 이익을 올려도,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거래 중소기업의 납품단가를 후려치고(공정거래 관행 위배), 노동자 권리를 짓밟고(인권과 노동 관행 존중 위배), 영세 자영업자들의 생계까지 위협한다면(지역사회 발전 위배),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재벌과 총수들이 ‘사회책임’이라는 용어를 꺼려온 비밀도 여기에 있다. 사회책임이라는 말은 윤리·준법·투명경영·이해관계자 존중경영을 제대로 하지 않는 재벌들에게는 자신의 추한 얼굴을 보여주는 ‘백설공주의 거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의 사회책임 관련 국제기구 가입이 부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엔이 인권·노동·환경·반부패에 관한 10대 기본 원칙의 이행 확산을 내걸고 전세계 기업을 대상으로 펼치고 있는 글로벌콤팩트에 가입한 국내 민간기업은 130여 개다. 전세계의 가입 회원이 7천여 개에 달하는 것에 비추어보면 매우 저조하다. 그나마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10대 그룹의 계열사는 14개에 불과하다. 올해 4월 현재 10대 그룹 전체 계열사(617개)의 2%에 그친다. 삼성, 포스코, 현대중공업, 한화는 아예 1개의 회사도 가입돼 있지 않다. 유엔글로벌콤팩트 관계자는 “회원사들은 매년 10대 원칙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벌들이 아직 기업의 사회책임의 기본조차 제대로 이행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얘기다.

재벌과 별 차이 없는 MB의 인식

이명박 대통령도 기본 인식에서 재벌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대통령은 공생 발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지만 핵심 내용은 다름 아닌 기업의 사회책임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대통령이 강조한 공정사회, 동반성장도 모두 기업의 사회책임에 포함된다. 이미 글로벌 표준까지 제시돼 있는 사회책임이라는 용어를 굳이 피하며, 낯선 용어를 꺼내들어 국민에게 체계적이거나 구체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로는 재벌의 탐욕을 나무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재벌과 마찬가지로 사회책임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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