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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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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공정사회는 유죄인가?



보수는 등 돌리고 진보는 날 세우는 친서민·공정사회론…

중도로 향하는 MB의 행보는 노무현 정부를 닮아
등록 2010-09-29 16:45 수정 2020-05-03 04:26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9월5일 청와대에서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서 공정사회 구현을 위한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당부의 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9월5일 청와대에서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서 공정사회 구현을 위한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당부의 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보수가 뿔났다. 자신들이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이명박 대통령이 은혜를 잊고 배신·변절했다는 것이다. “MB가 노무현 때와 똑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정권이 이미 좌파로 넘어갔다.” 보수의 분노는 MB가 지난 7월 이후 ‘친서민’과 ‘공정사회’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내세운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전에도 정부 정책이나 대응 방식에 대한 보수의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MB의 철학, 이념, 국정 방향, 도덕성을 총체적이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좌파 대통령의 우향우, 우파 대통령의 좌향좌

“MB는 원래 원칙이 없었다. 친기업을 강조한 사람이 친서민을 내세우다니….” “비즈니스 프렌들리도 선거전략에 불과했다.”(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표현의 강도만 보면 MB와 보수의 관계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하다. “MB 정부는 보수 정권이 아니다.”(이상돈 중앙대 교수) “MB는 도덕적으로 공정사회를 말할 자격이 없다.”(유석춘 연세대 교수) 심지어 지금껏 환호하던 친기업 기조에 대해서조차 “친시장은 몰라도 친기업은 원래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는 ‘커밍아웃성’ 발언까지 나온다. MB는 이미 보수로부터 ‘파문’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공정이라는 화두로 가장 재미를 본 사람들은 공산주의자”(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라며 MB를 ‘빨갱이’에 비유하기까지 한다.

MB가 개혁진보 진영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니다. MB가 강조하는 친서민·공정사회라는 어젠다는 개혁진보 진영이 주창해온 이슈들인데도 말이다. “정치적 쇼다.” “얼마나 가겠느냐.” “진성성 없는 국면전환용 구호에 불과하다.” 정권이 좌파에 넘어갔다고 하면 개혁진보 쪽에서 환호성이 터질 만도 한데, 현실은 딴판이다. “MB의 친중소기업 행보를 견인해야 한다”며 유연성을 강조하는 의견은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 같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MB로서는 자신의 지지세력은 등을 돌리고 기존 반대세력은 여전히 적대적인, 일종의 ‘정치적 미아’ 신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현상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7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정반대로 개혁진보 세력의 지지를 받아 집권했다. 하지만 출범 이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라크 파병, 재벌 봐주기, 대연정 추진은 지지세력으로부터 강한 반발과 비판을 불렀다. 개혁진보 진영은 “권력은 이미 시장(재벌)으로 넘어간 것 같다” “나는 좌파 신자주의자”라는 대통령의 말에 분노했다. 복지 확대, 한반도 평화정착 노력, 탈권위, 깨끗한 선거 등의 성과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기존 반대세력인 보수도 “경제 파탄” “세금 폭탄”이라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외견상으로 보면, 노무현과 MB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전통 지지층으로부터 버림받고, 비판세력에게 계속 공격을 당한 실패한 대통령이다(MB는 아직 5년 임기의 절반이 남았지만…).

좌파 대통령의 우향우, 우파 대통령의 좌향좌, 그로 인한 지지층 이탈과 반대세력의 외면 현상이 5년 시차로 되풀이되는 게 과연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두 대통령은 이념이나 지지세력에서 서로 다른 양극단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집권 이후에는 한 사람은 왼쪽에서 중앙으로, 다른 한 사람은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움직였다. 두 대통령이 중앙으로 이동한 원인은 각기 달랐다. 노 대통령이 한-미 FTA를 체결하고 이라크에 파병한 것은 국제 정치·경제 현실 때문이었고, MB가 친서민·공정사회를 제기한 것은 양극화라는 국내 현실 때문이었다. 안팎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은 현실 문제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최대 숙제는 이념적 대립의 심화다. 두 대통령은 양극단의 이념과 접근 방식으로는 현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인식했을 수 있다. 두 대통령의 탈극단과 중간지점으로의 이동은 정체성 훼손과 변절로 폄하될 수 있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사회 전체의 컨센서스 형성을 위한 합리적 수렴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양극단보다 중앙지점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훨씬 유리한 것은 상식이다.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할 수 있는 정책을 앞세워 집권에 성공했더라도, 일단 취임한 뒤에는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친서민+공정사회=친기업?

선진국, 특히 양당제를 유지하는 선진국에서는 경쟁하는 두 당의 정책이 중간으로 수렵되는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다. 미국의 공화당은 작은 정부, 친기업, 감세 등을 정책적 특징으로 한다. 반면 민주당은 큰 정부, 기업 규제, 정부 주도의 복지, 증세 등을 강조한다. 하지만 ‘젊을 때는 민주당원, 나이가 들면 공화당원’이라는 미국 속담이 있듯이, 양당의 정책은 일부 쟁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선거참모였던 딕 모리스는 “상대방의 이슈를 선점하는 중도주의가 선거에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도 집권 당시 “바지 입은 대처(보수당 출신의 여성 총리)”로 불렸을 정도다. 양당제하에서 두 당의 정책이 중앙으로 수렴하는 현상을 설명한 것이 ‘중위투표이론’이다. 양당제에서는 중간층의 지지를 많이 확보하는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 불리는 백용호 청와대 정책실장을 사석에서 만나 질문을 던졌다. 백 실장은 정식 인터뷰는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그의 말은 현 정부의 의중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MB 정부는 친시장을 내걸었는데 실제 시장은 대단히 취약하다. 시장을 위협하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과 원칙의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양극화에 의한 사회적 갈등이다. 법과 원칙이 무너지면 시장은 붕괴된다. 공정사회는 법과 원칙을 제대로 세우자는 것이다. 또 양극화가 심화되면 결국은 혁명으로 이어진다.” ‘혁명’이라는 말이 흥미롭다. 보수는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공정사회 실현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취지로 들린다. 워런 버핏 등 미국의 부자들이 정부의 상속세법 폐지 추진에 “자본주의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훼손할 수 있다”며 반대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MB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반기업으로의 선회가 아니라, 국민의 친기업 정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친서민·공정사회가 곧 친기업인 셈이다. 백 실장은 좌우에서 모두 MB를 공격하는 것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친서민·공정사회를 강조하는 데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다. 과거의 잘못을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래지향적 사고다. 지금의 상태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공정사회를 이뤄야 국민소득 2만달러의 늪에서 빨리 벗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보수는 공정사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공정성은 주관적이어서, 포퓰리즘의 부작용이 우려되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대신 법치주의로 충분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보수는 법치주의 훼손이나 도덕성 결여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공정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치이자 어젠다일 수 있다.

뒤늦으나마 방향 수정은 다행

보수나 진보의 MB 비판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전대미문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규제완화와 감세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밀어붙여 양극화 심화에 일조한 게 MB다. 비리 정치·경제인들을 무더기 사면해주고, 공정사회의 주역으로는 자격이 부족한 인사들을 총리·장관 후보자로 내정한 장본인도 MB다.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일관성이 중요하다. 또 같은 말도 누가 얘기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 처음부터 흠없는 사람이 올바른 철학으로 적확한 정책을 수립했다면 최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처음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알고서도 계속 고수하는 게 현명한 일은 아니다. 뒤늦게나마 다수 국민을 위한 방향으로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는 것은 대통령을 위해서나 국민을 위해서 다행이다. MB는 친대기업 정책을 쓰면 성장의 과실이 서민·중소기업에도 골고루 흘러갈 것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양극화가 심화됐다. 정부·여당은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패한 뒤 국민의 뜻을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치는 생각이 각기 다른 수많은 국민 속에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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