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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김초엽① 현실과 머나먼 우주는 떨어져 있지 않다

등록 2020-08-17 09:51 수정 2020-08-28 12:42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SF(Science Fiction·과학소설)는 지금 여기가 아닌 시공간에서, 지금 여기라면 벌어질 수 없는 사건을 다룬다. ‘사고실험’이란 말은 이런 SF의 특성을 설명할 때 흔히 쓰인다. 과학에서의 실험은 일정 조건을 인위적으로 설정한 뒤 그 결괏값을 산출한다면, 김초엽(27) 작가의 SF에서 사고실험은 그 결괏값까지 도출해주지는 않는다. “김초엽의 소설에서 진실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과정”(인아영 평론가)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을 좇다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가본 적 없는 거대한 우주를 유영하는 아득한 기분을 체험하면서도,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모순을 감각하게 된다. 새로운 세계로 나 있는 탈출구로 달려나갈 듯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김초엽은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에서 ‘관내분실’이 대상, 필명으로 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가작에 동시에 당선되면서 데뷔했다. 두 작품을 포함해 7개 단편을 묶어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2019년 6월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21쇄, 약 14만 부(2020년 7월 기준) 발행됐다. 김초엽은 한국 문단에 부는 ‘SF 열풍’을 설명할 때 가장 앞줄에 소환되는 작가 중 한 명이 됐다.

7월3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문학창작촌에서 김초엽 작가를 만났다. 김초엽은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문학 전문 창작공간 연희문학창작촌에서 7월부터 석 달 동안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뷰는 연희동 인근 카페로 자리를 옮겨 진행됐고, 한 차례 서면 인터뷰가 더해졌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서 인간

“김초엽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 세계가 1인치쯤 더 확장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강지희 평론가, 2020년 제11회 젊은작가상 심사평)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에서 공감했다. 인간 감정을 조형화해 소유함으로써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세계(‘감정의 물성’)나, 죽은 자의 ‘마인드’를 기록해 집적해놓은 도서관(‘관내분실’)을 읽다보면, 인간 신체의 외연이 확장되는 상상을 하게 돼서다. 김초엽은 2018년 대담에서 “기억, 감정, 마음 등 비물질적이라 여겨지는 개념을 물질적인 개념으로 변화해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안전가옥, <장르의 장르>)고 말한 바 있다. 왜일까.

“생화학에 관심이 많다보니, 인간이 사고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모든 것을 기본적으로 입자 단계에서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신경과학에서는 인간의 기분이나 사고가 뉴런 사이의 물질에 의해 조정된다고 보거든요. ‘인간은 물성을 가진 존재구나’ ‘물질세계 속에 살아가는 물질이구나’ 자연스럽게 이해했죠.”

김초엽의 말처럼 인간은 물질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물건을 산다. 우울증 치료약은 인간의 침체된 기분을 조절해준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인간 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다. 나아가 인간은 물질 자체가 될 수도 있다. 기술을 인간의 신체로 끌어들여, 인간이 물질 그 자체 혹은 일부가 될 때 생물과 기계장치의 결합체 ‘사이보그’를 맞닥뜨린다. “모든 테크놀로지는 궁극적으로 인간 몸의 확장”이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선언처럼, 기술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넓힌다.

과학기술을 매개로 한 ‘확장’과 ‘연장’의 가능성을 통해 마주하는 건, 인간이란 존재가 지닐 수밖에 없는 겸허함이다.

“인간을 너무 대단한 존재라 치켜세우기보다는, 우리도 다 똑같이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비인간적인 물질과 우리 인간은 동등한 존재구나. 인간이라고 해서 지구나 풀, 나무 이런 존재보다 엄청나게 뛰어난 존재가 아니고, 인간 자체도 우주 물질에 매인 존재구나. 과학 공부를 하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구나.’”

시인 어머니, 음악가이자 바리스타인 아버지의 영향 아래 자란 중학생 김초엽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과학을 접하게 됐다. 포스텍에서 화학(학사), 생화학(석사)을 공부했다. 혈액에는 질병 유무나 신체 상태를 나타내는 단백질이 있는데, 해당 단백질을 검출하는 디엔에이(DNA) 탐침을 이용한 바이오센서를 연구했다. 연구실 회식 자리에서 공모전 당선 소식을 들었고,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 ‘1년 정도는 글만 써보자’고 생각한 게 전업작가로 생활하는 지금에 이르렀다.(<씨네21> 인터뷰, 2020년 1월)

끊임없이 탐구하고 나아가려는 인물

과학도로서의 태도는 소설을 대하는 태도로 옮겨왔다.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당장 어떤 문제가 해결되진 않더라도, 실험 조건을 다시 설정하거나, 새로운 가설을 세우거나,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서 어떻게든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게 과학의 태도 같아요. SF도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는 게 아니고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있어요. 그게 과학의 방법론과 닮아 있는 듯해요.”

김초엽이 만든 캐릭터는 끊임없이 탐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SF는 여성이나 소수자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놀이터’가 된다. 비평가이자 SF작가인 조애나 러스는 이렇게 말한다. “SF의 신화는 개념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필요한 물리적 또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고, 테크놀로지적 변화나 기타 다른 변화의 결과를 평가하는 흐름을 따라간다. 이것은 남자로서의 남자, 여자로서의 여자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지능과 적응능력을 다루는 신화다. 이 신화는 젠더 역할을 무시할 뿐 아니라, 문화에 구속되지도 않는다.”(<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포도밭, 2020) 압도적 현실이 인물을 압박하는 순문학과 다른 점이다.

‘스펙트럼’에서 생화학자 희진은 외계 생명체의 군락에서 지내며 루이(들)가 사용하는 색채 언어를 이해하려 애쓴다. 모그로서 시지각 이상증을 겪는 ‘광장’ 속 마리는 그의 춤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시지각 이상증을 경험하게 하는 일종의 테러를 벌인다. 타자를 이해하고 공존을 이뤄내는 건 결국 불가능하고, 이들이 남긴 건 미세한 균열에 불과할지라도, 그 변화와 전복의 몸짓은 역설적으로 희망을 남긴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데이지의 말처럼.

김초엽이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누굴지 궁금했다. 그는 우주비행사 최재경을 꼽았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속 최재경은 마흔여덟 살 여성이자 동양인이고 비혼모다. 그는 우주의 웜홀 터널을 통과하는 극한 상황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신체 개조 프로젝트 사이보그 그라인딩을 거치지만, 우주로 가지 않는다. 모두의 기대를 뒤로한 채 바다로 뛰어든다. 최재경 이모를 롤모델로 삼는 우주비행사 가윤은 최재경이 바다로 뛰어든 이유를 “새로운 인간으로의 재탄생, 사이보그 그라인딩 그 자체”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배반하는 인물’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모든 소설을 다 그렇게 쓸 수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도덕적인 윤리를 어느 정도 배반하면서, 현실의 독자가 요구하는 윤리에 너무 어긋나지 않는 위험한 선택을 하는 인물을 좋아해요. 재미있는 게, 최재경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엇갈렸어요. 여성 독자는 최재경이 바다로 간 선택을 좋아하는데, 남성 독자는 국가 지원을 받고도 이기적인 선택을 한 인물이라며 좋게 포장하는 게 별로였다고 하더라고요.

현실에서 보면 욕먹었겠지만, 소설적으로는 해방감을 주는 인물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SF는 현실의 개연성과 접점이 있다는 점에서 판타지와 다르다. ‘이 이야기가 언젠가 실현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독자는 현실을 헤쳐나갈 용기를 얻게 된다. 기술 발달이 가져올 또 다른 세계가 디스토피아인가 유토피아인가, 이는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이유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 김초엽②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김초엽으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09.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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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논픽션

“형체가 없는 추상적인 개념을 손에 쥘 수 있는 물질로 바꿀 수 있다면 작가님은 어떤 개념을 갖고 싶으세요?”

김초엽 작가에게 물었다. 김초엽은 “갖고 싶은 게 딱히 없다”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집중력? 어떤 천재지변이 닥쳐도 마감할 수 있게 마음이 차분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사실 제가 마감을 못하고 (인터뷰에) 와서….(웃음)”

이날 마감은 소설 마감을 뜻했지만, 2019년까지만 해도 김초엽 작가는 다수 매체에 논픽션을 연재했다. 포스텍 교지 편집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타 학교 교지에 과학 칼럼을 실었던 그는 2017년 한국과학문학상 대상·가작 수상으로 데뷔한 뒤에도 ‘김초엽 작가의 과학을 펼치다’(<서울신문>), 김원영 작가와 함께 ‘사이보그가 되다’(<시사IN>)를 연재했다. 과학 저서를 대중에 소개하거나, 과학적 사실과 인문학적 통찰을 결합하는 논픽션이다.

“픽션에서는 메시지가 앞서지 않게 하지만, 논픽션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적으로 할 수 있죠. 우리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하나의 축이 과학기술이기 때문에 ‘삶 속의 과학’과 ‘과학 속의 삶’을 고민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쉬운 언어로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건 어차피 한계가 있어요. 전문가 영역은 전문가 영역으로 존중하되, 과학과 삶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과 더불어, 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 ‘접촉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중요해요.”

긴 분량의 책을 한 호흡에 집필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싶어서 올해부터 논픽션 연재를 모두 그만뒀지만, ‘사이보그가 되다’ 책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첨단 기술 영역에서 장애인을 기술 발전의 홍보모델로 활용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장애인이 웨어러블 로봇을 착용하고 걷거나 인공지능 스피커로 청각장애인이 말하도록 돕는 사례를 홍보에 이용하는 식이다. 이처럼 기술이 장애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테크노에이블리즘)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기술과 결합돼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삶에서 경험하는 ‘사이보그의 현실’을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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