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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장류진① 계산기 두드리는 여자 귀한 껍데기의 남자

등록 2020-08-24 12:22 수정 2020-08-26 03:20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1986년생, 05학번, 여성. 장류진(34) 작가와의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인터뷰 내용과 별로 상관이 없음에도 어떻게든 나와의 공통점을 찾아 엮어보려 애쓰는 건 오랜 습관입니다. 나이와 성별과 학번이 같다는 이렇게 뻔하디뻔한 답을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말하는 이유는, 장류진의 소설에는 주로 여성 화자가 등장하고, 여성들 간 연대가 주를 이루고, 198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 같은 성별로 태어나, 같은 해 대학에 들어간 나는 장류진의 소설을 읽으며 내 삶의 궤적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취업준비생(‘탐페레 공항’) 시절을 지나, 입사를 위한 합숙 면접(‘펀펀 페스티벌’)을 거치고, 직장에 들어가 일의 기쁨과 슬픔(‘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면서, 친구와 직장 동료의 청첩장을 받고(‘잘 살겠습니다’), 내 차를 장만해 운전연수(‘연수’)를 하고, 내 집을 마련해 주 1회 도우미 아주머니를 불러 청소(‘도움의 손길’)하기까지…. 내 상황,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은 이야기들, 덕분에 소설 속 주인공들도 나 또는 주변 사람들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주인공들은 장류진 자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7월30일 경기도 고양시 한 스튜디오에서 작가 장류진, 그리고 장류진을 조금씩 닮았고, 나와 내 주변인들을 조금씩 닮은 소설 속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묘하게 닮은 우리의 연대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의 첫 번째 소설집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으로 장류진은 2018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했습니다. 이 작품이 창비 누리집에 공개됐을 땐 서버가 마비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무료 공개 2주 만에 15만 명, 총 40만여 명이 이 소설을 웹으로 읽었습니다. 당시 장류진은 경기도 성남시 판교의 정보기술(IT) 회사에서 7년간 일하고, 1년간 쉬면서 대학원에서 소설 공부를 한 뒤 두 번째 회사에 들어간 지 사흘이 지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두 번째 회사도 퇴사하고 전업작가가 됐고요. 소설을 쓰기 위해 두 번의 퇴사를 한 셈이죠. 퇴사할 수 있었던 용기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소설이 너무 좋아서’라는 꿈같은 대답보단 “누울 자리를 봤다”는 현실적인 답을 해줬습니다. “대학원을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일한 지 7년 정도 됐어요. 그 정도 연차가 우리 업계에선 가장 이직하기 좋거든요. 그래서 1년 정도 휴직하며 대학원을 다녀도 새 직장을 구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역시 돌아오자마자 바로 취직이 됐죠. 두 번째 회사에 들어간 뒤 계속 원고 청탁이 들어왔고, 책도 계약돼 있었어요. 그만둬도 할 일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둔 거죠.” 퇴사를 고민한다면 “퇴로를 차단하지 말고 누울 자리 보고 간을 보라”는 장류진의 충고를 새겨들었습니다.

25000(축의금 대신 먹은 밥값)-13000(내가 청첩장 주면서 산 밥값)=12000

이제는 남편이 된 구재에게 내 계획을 들려줬다. 주말에 함께 들른 백화점의 생활용품 코너에서였다. 나는 언니에게 받은 만큼만, 딱 만이천원짜리 선물을 사서 축의금 대신 줄 거라고 했다.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 실린 첫 번째 작품 ‘잘 살겠습니다’에서 이 구절을 읽고 느꼈던 통쾌함을 잊지 못합니다.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느꼈던 묘한 서운함,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운하다기보단 빈정 상했다가 맞겠죠. 그 감정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릴 수 있다니 속이 시원했습니다. 당시 나는 친구들에게 이 소설을 꼭 읽어보라며 이 구절을 찍어 보내기까지 했죠. 그러곤 바로 후회했습니다. 그 친구들 모두 결혼한 친구였거든요. 내가 그들의 청첩장을 받으며 이렇게 계산기를 두들겼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자신들을 저격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면서요. 장류진도 같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을 쓰고 나서 내가 계산기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고민했어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가 나잇대가 비슷하고, 1인칭이고 해서 ‘작가=화자’라고 생각하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남에게 빚질까봐 경계해요. 내가 빛나 언니처럼 행동할까봐요. 어른이 되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많이 느꼈거든요.”

왜 최소한이 1이지? 0도 있잖아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연수’는 엄마뻘 나이의 운전강사에게 연수받는 내용입니다. 이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운전면허학원에 다니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를 위해 다시 읽었을 때는 운전연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느꼈죠. ‘작가는 운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운전에 대한 두려움을 쓸 수 없다’고요. 운전면허시험에서 두 번 떨어졌다는 부끄러운 내 경험과 함께 여전히 운전이 두렵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장류진은 자신이 “심지어 운전면허학원만 두 번 다녔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줬습니다. “스무 살 되자마자 운전면허학원에 다녔어요. 그런데 시험 보러 안 갔어요. 그리고 25살에 다시 학원을 다녔고 두 번 떨어졌죠. 그렇게 면허를 따고 나서 운전하지 않다가 서른두 살 때 해야겠다 싶어서 연수를 또 받은 거예요.”

그런데 ‘연수’ 속 운전강사와 ‘도움의 손길’ 속 도우미 아주머니는 어딘가 닮았습니다. “남편 밥 안 차려줘도 되냐”고 묻는 거나(‘연수’), 대뜸 “새댁도 내년엔 아기 가져야지”(‘도움의 손길)라고 말하는 것도요.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자녀를 낳을 거라고 전제하는 이런 태도는 때론 불쾌함을 느끼게 합니다. 장류진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까요? “남편과 연애를 너무 오래 해서 결혼할 거냐는 질문보다는 언제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돈 대줄 것도 아니면서요.(웃음)”

2015년, 대학교 때부터 연애했던 ‘최초의 독자’(작가의 말에 나온다)와 결혼한 장류진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막연히 한두 명 정돈 낳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대학을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게 인생의 순서라고 생각했죠. 이다음 단계에 언제 가야 하나 혼자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너무 힘들게 육아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는 두 명은 안 되겠다 싶었고 한 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나는 왜 최소한이 1이라고 생각했지, 싶은 거예요. 그래서 생각조차 안 했던 0을 생각하니 막막했던 가능성이 열리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명확하게 딩크를 선택했어요.”

‘연수’와 ‘도움의 손길’은 마치 연작 같은 느낌도 줍니다. 화자와 운전강사, 도우미 아주머니 사이에는 결혼과 자녀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만큼이나 계급·소득·세대 간의 간극이 크죠. “저도 소설을 완성하고서야 알았어요. ‘도움의 손길’ 다음에 ‘연수’를 발표해서 연작으로 계획했구나 생각하는 독자도 있는데, ‘도움의 손길’은 훨씬 예전에 아이디어가 있었던 작품이거든요. ‘도움의 손길’을 쓰면서 등장인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 미안한 마음이 ‘연수’로 들어가서 나도 모르게 이어간 것 같아요. ‘연수’에선 잠깐이나마 연대를 보여주니까요.”

여성 간 연대는 ‘연수’뿐 아니라 ‘잘 살겠습니다’에서도 보입니다. ‘잘 살겠습니다’에서 화자와 빛나 언니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 노동자’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면 다르지 않은 인물이죠. “여성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서로 도와야 할 수도 있고, 처지가 바뀔 수도 있죠. ‘잘 살겠습니다’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연대하고 싶은 동시에 ‘왜 저러지?’ 싶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썼어요. 그들을 미워했던 내 마음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었고, 또 그들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썼어요. 내가 누군가에겐 빛나 언니일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1을 노력하고 10을 과시하는 남자

“지훈씨. 지훈씨는 능력 있고 인기도 많잖아. 내가 다 알아요. 일 잘하지, 직장 번듯해, 응? 또 잘생겼고, 또 몸짱이시고.”(‘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나는 이제 이찬휘의 모든 것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다만 저 애의 얼굴과 몸, 그 껍데기만 빼고. 그건 아직까진, 아무리 봐도 싫어지지가 않았다. 그걸 싫어하지 못하는 나 자신만 자꾸 싫어질 뿐. 나는 누구에겐지 모르게 다급히 변명했다. 껍데기일 뿐이지만 이런 껍데기는 귀하다고.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다고.”(‘펀펀 페스티벌’)

장류진의 소설 속 남자들은 뭔가 ‘찌질’합니다. 대놓고 찌질하다기보단 겉으론 멀쩡한데 알고 보면 찌질하달까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속 지훈은 한때 짝사랑했던 그녀가 남편과 사별한 뒤, 일본 후쿠오카에서 지낸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무언가’를 기대하면서요.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자 눈물까지 흘리며 질척입니다. 특히 공항에서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엔화 동전을 종이컵을 들고 서 있던 할머니에게 쏟아붓는 장면이 압권이죠. 그 할머니는 동전을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커피를 마시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장류진은 이런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까요. “소설을 쓰기 전에 마인드맵 같은 가정을 해요. 후쿠오카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오호리공원이 참 좋았어요. 그때 상상을 해봤죠. 여기에 한국 여자가 혼자 산다면 왜 혼자 살까? 결혼을 했을까, 안 했을까? 남편이 죽었나? 이런 상상을 하다가 한국에 있는 친구가 놀러 오면 어떨까 가정했죠. 이 여자에게 마음을 품었던 남자가 오는 거로 설정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떠올랐어요. 하루키 소설을 보면 남자 주인공은 진짜 평범한데 항상 예쁜 여자가 나오고, 옷을 벗고 자고… 웃기잖아요. 그즈음 대학원에서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개념을 배울 때라 그렇게 써보고 싶었죠.”

‘펀펀 페스티벌’ 속 이찬휘는 대형 기획사 연습생 출신으로, 밴드에서 ‘미모의 프런트맨’ 역할을 맡습니다. 미모의 프런트맨 이찬휘를 “좀처럼 볼 수 없는 껍데기”로 소비하는 여성 화자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게 통쾌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소설에서 남성의 미모를 소비하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요. “지훈이나 이찬휘나 완전 지질하진 않아요. 외적으로도 드물게 빼어나고 자신감도 있고요. 나쁜 매력이라도 매력이 있어야 쓰면서도 재밌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했죠. 둘 다 미모도 되는 거로 했어요. 소설 속에 미모의 여자는 많이 나오는데 남자가 그런 경우는 잘 없어서 보여주고 싶었죠.”

장류진이 이찬휘를 통해 진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우리가 흔히 회사에서 볼 수 있는, 1만큼 노력하고도 10만큼 과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을 쓸 때 제시 제이의 <뱅뱅>이란 노래에 빠져 있었어요. 차로 출근하던 때라, 가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대충 따라 불렀죠. 그러면서 차 안에 누가 없고 나 혼자 있으니까 이렇게 대충 부르지 싶었는데, 문득 가사는 몰라도 아는 척 잘 부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입사를 위한 합숙 면접이란 설정을 하고 밴드 공연을 하는 미션을 줬지만, 회사 생활에서도 그런 사람 있잖아요. 실제 자기가 한 거에 비해 더 많이 한 척하는 사람들이 살아남잖아요.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렇게 믿어야 그렇게 할 수 있더라고요. 전 그렇게 못할 것 같았어요. 실무는 자신 있는데 회사는 피라미드 형태니까 언제까지 실무만 할 수 없잖아요. 모든 회사가 이런 엉뚱한 원리로 돌아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 장류진② 펀펀 페스티벌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33.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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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의 각주 소설

장류진 작가의 소설을 보면, 어쩜 이렇게 디테일할까 생각이 들다 못해 이 용어를 모르면 얼마나 디테일한지 알 수조차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류진 역시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투고하면서 각주를 한참 달았다고 했습니다. 이후 소설 출간을 앞두고 교정 과정에서 편집자 쪽에서 연락이 왔다고 해요. 각주를 빼면 좋겠다고요. 장류진은 ‘냉큼’ 빼도 좋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장류진의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친히 각주를 달려고 합니다.

애자일 영어로 ‘날렵한’ ‘민첩한’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사무실 부서 간 경계를 허물고 직급 체계를 없애고 소규모 팀을 꾸려 피드백을 계속 반영해 최종 결과를 만든다는 뜻이다. 문제는 리더들이 “애자일하게 개발하자” “애자일하게 조직 구성을 하자”고 말하며 ‘빠르다’만을 강조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업무를 지시하거나, ‘유연하게’를 강조하면서 기획서에 자꾸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길 요구한다는 점이다.

스크럼 럭비에서 유래한 용어. 공수가 불분명할 때, 팀원들이 어깨동무하고 상대편과 원을 이루고 어깨를 맞닿은 상태에서 중앙에 럭비공을 놓아서 경쟁하는 것을 말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보면,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어제는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각자 이야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에 스크럼 마스터가 전체적인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부분의 직장인은 상사가 스크럼을 조회라고 생각해서 문제라고 한다.

트렐로 웹 기반 프로젝트 관리 소프트웨어. 보드 안에 리스트, 리스트 안에 카드가 들어간다. 카드 안에 체크리스트를 만들 수 있고, 다른 사용자를 카드에 참여시킬 수 있다. 카드가 할 일의 기본 단위가 돼서, 할 일을 제대로 했는지 체크할 수 있다. 사용법을 한 번 숙지하면 굉장히 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용법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많은 직장인이 사용을 포기한다.

우동마켓 ‘당근마켓’을 따라 만든 이름. 당근마켓은 ‘당신 근처의 직거래 마켓’이란 의미로, 중고 거래를 할 수 있는 앱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선 ‘우리 동네 중고 마켓’이란 의미로 ‘우동마켓’이란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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