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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장강명① “70살까지 집중하려 합니다”

등록 2020-08-20 16:15 수정 2020-08-22 01:37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장강명(45) 작가의 소설을 읽은 건 <한국이 싫어서>가 처음이었다. 2015년 열대야가 이어지던 여름밤, 더위를 견디다 못해 이 책을 집어 들고 근처 카페로 피신했다. 한국에서 행복할 수 없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 20대 여성 계나가 우여곡절 끝에 성취로 얻어지는 ‘자산성 행복’과 일상의 안정과 여유로 얻어지는 ‘현금흐름성 행복’의 균형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어, 이거 뭐야 하고 빠져들어 읽었다. 두어 시간 만에 완독하고는 책을 가슴에 안고 집에 돌아왔다. 집 안은 여전히 후끈했지만 속은 조금 시원해져 있었다.

작가에 관심이 생겨 데뷔작인 <표백>(2011)을 읽었고, 2015년 나온 신간 <댓글부대>를 연달아 읽었다. 기자 출신이라 그런가, 성별·직업·계급 막론하고 등장인물들이 입체적이고 현실적이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이 신선하면서도 수긍이 갔다. 무엇보다 빠르게 읽히고 재미있었다. 다음해 출간된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2016)에서 로맨티시스트의 면모를 보았고, 2018년 탈북자 지성호씨를 다룬 르포르타주 <팔과 다리의 가격>을 읽었다. 고난과 역경을 강인한 의지로 헤쳐나온 주인공이 인상적이었다.

전작을 다 읽는 걸 전제로 장강명 작가 인터뷰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덥석 물었을 때는, 한 작가의 작품을 5권쯤 읽었으면 많이 읽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털썩. 데뷔 10년차에 장편소설 7권, 단편소설 3권, 에세이 1권, 르포르타주 2권, 도합 단독 저서만 13권이라니. 각종 문학상 모음집, 테마소설집, 리커버판, 앤솔러지 에세이 등을 다 합치면 37권이었다. 장르로는 이른바 문단문학부터 미스터리, 판타지, SF(공상과학), 소재로는 ‘자살 선언’부터 오타쿠 문화, 길고양이 영역 다툼, 서울 신촌 일대 지하에 사는 쥐-인간의 실존 문제, 한국 사회 노동문제, 문학 공모전까지. 주제로는… (내 주제론 설명 불가) 이걸 다 쓴 사람도 있는데, 읽는 걸로 징징대면 안 되지 싶으면서도 읽다보니 많긴 많더라. 그리고 읽어나갈수록 이 작가의 미친 생산력과 이야기 조직력과 계획성이 조금씩 무서워졌다. 7월28일 서울 개포동 북카페에서 장강명 작가와 만났다. 세 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를 키워드로 정리했다.

0. 엑셀 파일

작가들의 글쓰기와 삶을 담은 에세이집 <나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장강명 작가는 소설 쓰는 시간과 청소하는 시간 등을 합쳐 근무시간을 정해놨는데, 그 시간을 매일 스톱워치로 재서 엑셀 파일에 기록한다. 1년에 2200시간 이상 근무가 목표인데 지난해, 지지난해에도 목표를 달성했고, 올해도 문제없이 달성할 것 같단다. 인터뷰한 날은 집에서 운동을 조금 했고, 마감 중인 소설을 쓰다 왔다고 했다.

오늘 일과도 엑셀에 정리했는지, 그런 엑셀 파일은 몇 개인지, 얼마나 자세히 기록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파일을 두 개 쓰는데요, 하나가 제 생활을 관리하는 거고요. 일어난 시간이랑 글 쓴 양, 작업 시간, 운동한 날, 술 마신 날 등을 기록해요. 또 하나는 읽은 책, 본 영화와 만화 등을 정리하고 있어요. 생활 관리 파일은 연도별로 시트를 만들었고, 기록 관리하는 것에 책·영화·만화 시트로 나눠 쓰고 있습니다. 자기통제에 관한 강박이나 열망이 큰 것 같아요. 안 크면 안 되는 게, 가만두면 게을러지는 사람이라. 맘먹고 자면 24시간도 자거든요. 아니, 마음을 안 먹고 자면. (웃음) 또 전업 작가가 된 게 30대 후반이니까 그 전까지는 뭔가에 다 구속돼 있었거든요. 등교 시간이나 출근 시간도 있었고. 근데 회사 다닐 때부터 운동한 날 같은 건 적어놨으니까…. 본의 아니게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부지런한 사람인 척. (웃음)

1. 도망

장강명 작가의 소설에는 도망가는 결말의 작품이 여럿 있다. SF소설집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에 실린 ‘당신은 뜨거운 별에’나 ‘아스타틴’이 그랬고, 한국이 싫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 계나가 그랬고, 조금 다르지만 예정된 비극을 알면서도 속죄를 위해 떠나기로 결정하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그랬다. <5년 만에 신혼여행> 도입부에는 “대체로 무언가를 때려치우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면서 정체성을 쌓아오지 않았나 싶다”고 쓰기도 했다.

통제를 잃을까 두려워 도망가는 결말의 작품이 꽤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과 연관 있는지 궁금했어요.

여태껏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재수사>라는 소설을 쓰는데, 며칠 전쯤 쓴 부분에 통제력이 중요하다고 등장인물이 일장연설을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웃음) 제 소설은 끝에 어딘가로 떠나거나, 뭔가를 시작하겠다 다짐하는 게 많습니다. 제 소설이 대부분 어떻게 살 거냐,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뭐냐, 한국에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뭐냐, 그렇게 묻는 거로 많이 끝나요. 그럼 독자는 당신의 답은 뭐냐 묻는데, 사실 답에 대해서는 강박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게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질문을 최대한 날카롭게, 또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은 질문,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는데요. 그런 질문을 던지다보면 어떻든 결말을 지어야 하고, 그때 벌여놓은 질문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이것저것 답을 제시하거든요. 정답은 몰라요. 굳이 말하자면 작가가 등장인물에게 답을 맡기고 도망가는 거 같기도 해요. 제 소설 주인공들은 <오디세이>처럼 모험하고 있던 데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뭔가 숙제를 안고 끝나고, 저도 계속 제 인생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2. 허구

장강명 작가의 SF소설들에는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나 약이 개발된다. 그런데 그 기술을 도입해 사용해보니 이건 아니더라는 식의 결말이 많다. 모든 연인과 부부가 사랑을 유지해주는 약을 먹는 시대를 그린 단편 ‘정시에 복용하십시오’, 상대의 감정을 체험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돼 나치 전범 아이히만과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서로의 내면을 체험했더니 타인은 지옥이더라는 결말의 ‘알래스카의 아이히만’, 데이터 분석을 통해 사랑의 지속 기간을 알려주는 ‘데이터 시대의 사랑’ 역시, 결국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사랑이고 인생이라는 결말이다.

“대부분 기술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그 기술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지 않고 만들어냅니다. 심오하게 인간 본성을 바꾸는 기술도 많이 있거든요. 스트리밍 서비스가 음악산업 자체를 바꾸어놓았고, 출판산업도 잘 모르겠지만 기술의 영향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이미 트위터가 사람 본성을 많이 바꾸었다고 생각해요. 자동차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이 1년에 4천 명쯤 돼요.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많죠. 이게 질병이었으면 셧다운(봉쇄)해야 해요. 하지만 우린 자동차 타고 다닐 거야, 이게 우리가 20세기 즈음 선택한 삶입니다. 그런 기술이 발전하는 것에 반대하기보다 그것이 미칠 영향을 생각해보자는 게 목적입니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선 주인공에게 아들을 잃은 아주머니가, 자기 아들은 일진이 아니었다는 허구가 깨지니까 무너져버리잖아요. 그리고 또 다른 허구를 통해 구원받습니다.

그게 참, 예전에 엉성하게 칼럼에서 설명하려다가 안 된 적이 있긴 한데요, 세상엔 별 의미가 없는데 한편으론 어떻게든 허구에 의존해서 의미를 만들어서 스스로 속이며 살 수밖에 없죠. <5년 만에 신혼여행>에도 그런 말을 썼는데요. 이중적이에요. 아마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런 작업들, 허구에서 나올 것이다 생각하고요.

<5년 만에 신혼여행>은 보라카이 신혼여행기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 작가의 작품에 관한 생각과 인생관 같은 게 녹아 있었다. 사실은 인생에 의미는 없지만, 인간은 의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허구를 통해 의미를 발견하고, 그 허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소설인 걸까.

“어떻게 보면 오만한 말이잖아요, 소설 쓰는 일은 정말 좋은 일이야라는. 저는 정말 돈을 많이 줘도 하기 싫은 직업이 있어요. 제가 대학 때 광고동아리가 인기 많았는데요, 창의적인 사람들이 시험 쳐서 들어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저는 좀 이해가 안 됐거든요. 누군가는 벽돌을 쌓으며 학교를 짓는다는 소명을 갖기도 하는데, 저는 소설을 쓸 때 의미를 만든다는 느낌이 있고 좋습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21이 사랑한 작가 장강명② 장강명의 계획표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25.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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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숫자

1 장강명 작가의 첫 책 <표백>은 2부로 이뤄졌다. 1부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 너무 완벽해서 개인이 더 보탤 것 없이 흰색인 세상을 이르는 말이다. 답이 정해진 세상에서 청년들이 할 수 있는 건 정해진 대로 대답하는 것(표백)밖에 없다. 2부는 ‘코마 화이트’.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세상에 저항하고자 자기를 파괴(자살)하는 자들의 논리가 반박하기 어렵게 정연하게 펼쳐진다. 1부와 2부의 제목은 메릴린 맨슨의 앨범 《메커니컬 애니멀스》의 첫 곡과 마지막 곡에서 따왔다.

2 2012년 발표한 두 번째 책, 연작소설집 <뤼미에르 피플>은 뤼미에르빌딩 8층에 사는 사람들을 다룬 단편 모음집인데, 실은 장강명 작가의 소설쓰기 계획표와도 같다. ‘806호-삶어녀 죽이기’에서 기사 한번 잘못 나가 인터넷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20대 여성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는 ‘팀-알렙’은 장편 <댓글부대>에서 국정원 여론조작을 위해 물밑에서 활약한다. ‘810호-되살아나는 섬’을 모티프로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다. 단편집 <산 자들>에 나오는 현수동도 이 소설집에 처음 등장한다.

3 세 번째 책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오타쿠(마니아)가 만든 <에바로드>라는 다큐 제작기다. 기자가 취재해 르포 형식으로 쓰는 액자식 구성인데, 이 기자는 <표백>의 등장인물 장휘영이다. 작가는 <에바로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문장 “꼭 랠리를 완주하세요. 어떤 숨은 선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는 살 이유를 못 찾아 ‘자살 선언’을 하는 <표백>의 주인공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답이라고 썼다(<표백> 10쇄 기념 작가의 말).

4 장강명 작가는 4개 문학공모전에 당선됐다. 2011년 한겨레문학상(<표백>), 2014년 수림문학상<(열광금지, 에바로드)>, 2015년 제주4·3평화문학상(<댓글부대>), 2015년 문학동네 작가상(<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5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고,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첫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에는 아내 HJ와의 연애담과 범상치 않은 결혼생활 이야기가 담겼다. 3박5일간의 보라카이 신혼여행기가 씨줄이라면, 날줄에는 허구를 통해 의미를 생산한다는 작가의 인생관과 작품관을 엮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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