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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최은영②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등록 2020-08-24 12:52 수정 2020-08-27 02:33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최은영① “우리는 모두 소수자성을 가졌죠”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134.html

여성 화자? 남성 작가도 그런 질문을 받을까요

그는 2016년 첫 책의 ‘작가의 말’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썼다. 그의 소설들은 이를 증명한다. 레즈비언(‘그 여름’ ‘고백’)이나 빨갱이 자식이고 전라도 출신인 숙모(‘손길’), 그리고 “존재만으로 민폐”(‘모래로 지은 집)인 사람들이 목소리를 낸다.

“저는 백인, 자본가,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 건강한 사람, 교육받은 사람 등의 정체성으로만 구성된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어느 정도 소수자성을 가졌다고 생각하고요. 제 안에도 여러 소수자성이 있어요.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어째서 이러이러한 소수자성을 지닌 사람의 삶을 글로 썼느냐는 말이요. 당연히 제 이야기가 아니냐는 질문을 들으면 말하고 싶었죠. 그건 제 이야기이고 제 정체성이라고요. 저의 인물들은 저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에요. 저 자신은 아닐지 모르지만 제 경험과 밀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요.”

그의 소설 속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그들이 경험하는 폭력의 풍경은 익숙하다. 대학 동아리 술자리에서 선배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애들, 뭉칠 줄도 모르고 도무지 조직이라는 걸 이해 못하잖아요.”(‘먼 곳에서 온 노래’) 그리고 그 선배에게 “당신이나 잘하라”고 말하는 다른 선배가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함께 분노해주는 한 사람이 있다.

“대학에 가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왔던 저 자신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어요. 왜 나와 불화했는지,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페미니즘의 언어로 설명되는 경험을 했어요. 왜 엄마가 아들을 낳지 못했을 때 그렇게 불안했는지, 마침내 아들을 낳았을 때 해방감을 느꼈는지, 왜 어느 자리에 가나 외모로 평가받고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에 집착하면서 제 외모에 대해 불만족했는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착하게 굴기를 강요받았는지, 그런 것들이요. 예전부터 괴로웠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 설명되는 경험이었어요.

왜 여성 화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요. 저는 그때마다 남성 작가들도 그런 질문을 받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그냥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인데,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목소리로 하면 보편적이지 않다고, 치우쳐 있다고, 그래서 특이하다고 해석되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세상에는 여성의 목소리가 너무나 부족해요. 남성이 보고 남성이 말하는 방식에는 익숙하고 그것을 보편이라고 여기죠. 처음에는 내가 여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여성의 목소리를 자연스레 썼지만, 이제는 여성의 이야기와 여성의 목소리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의식적으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줄임말 뒤의 말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희원이 대학원 시절에 만났던 한 여성 강사의 이야기다. 학생들은 그 강사에게 정교수였다면 하지 못했을 행동을 한다. 강사는 이렇게 답한다.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난 희원씨가….” 희원은 세월이 지난 뒤 그 줄임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는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어쩌면 최은영 작가에게 소설 쓰기는 그런 ‘빛’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소설의 효용은, 효용만이 전부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가장 비효용적인 행위인 자유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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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최은영 작가는 2020년 봄부터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 <밝은 밤>을 연재 중이다. 2021년 여름께 단행본으로 나올 예정이다.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라고만 알려줬다. 말을 아꼈다. “징크스가 있는데, 글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뜸 들이기 전에 냄비 뚜껑 열어서 설익은 밥이 되듯이 글 또한 그렇게 안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장맛비 속에 도서관에서 ‘밝은 밤’을 읽고 말았다. 그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작년 한 해는 소설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도 인간과 윤리를 말한다며 글을 쓰고 발표하는 사람을 봤다. …더 이상 사람과 세상을 예전만큼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작가의 말) 그는 “그 일을 겪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을 향해 조건 없이 주었던 신뢰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다정해서 나는 전화통을 붙들고 내 고통을 주절주절 이야기했다.

비에 바짓가랑이가 젖은 채 곧 태어날 장편의 한 자락을 읽었다. 그는 부서지지 않았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 여자들이 시대의 고통을 넘어 살아 있었다.

최은영 제공

최은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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