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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인질 삼다

번역료 분투
등록 2014-11-15 12:15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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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다보면 이따금 슬럼프가 찾아온다. 생활 리듬이 무너지거나 몸이 아프거나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도 슬럼프가 찾아오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원인은 받아야 할 번역료가 제때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번역료가 들어오지 않으면, 자금 운용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질 뿐 아니라 급기야 자신의 존재 가치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하긴 내가 마감에서 (기독교 용어로)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은 원고료 지급일을 예사로 어기는 출판사를 겪으면서다. 몇 년을 끌다 결국 책으로 받은 적도 있고, 동료 번역가 중에는 끝내 받지 못하고 포기한 사람도 있다. 그나저나 요즘은 착한 출판사들과 거래하고 있어서 다시 마감 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번역료는 계약금과 잔금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계약금은 번역 계약서를 작성하고 일주일 이내에 지급하고 잔금은 최종 원고를 넘긴 지 한 달 이내, 또는 책이 출간된 지 한 달 이내에 지급한다. 출간 뒤 지급의 경우, 원고를 넘긴 지 6개월이 지나도록 책이 출간되지 않으면 그냥 번역료를 지급하도록 계약서에 명시하기도 한다. 출판사에서 출간 뒤 지급을 주장하며 내세우는 명분은 번역 원고에 문제가 있을 경우 수정이나 재번역을 요청해야 하는데 번역료가 이미 지급되었다면 번역가가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번역 원고를 받자마자 편집자가 원고를 통독하고 수정·재번역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번역료 산정 방식은 인세와 매절이 있는데 때에 따라 둘을 절충하기도 한다. 인세는 선인세 조로 계약금을 일부 받은 뒤 판매량에 따라 대금의 일부를 받는 것이고, 매절은 판매량과 상관없이 원고 매수에 따라 일정한 금액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안 팔릴 만한 책은 인세로 계약하고 잘 팔릴 만한 책은 매절로 계약한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시라.)

나는 최종 원고 제출 뒤 한 달 이내를 고집하는 편이지만 출판사에 따라 출간 뒤 지급 방침이 확고하게 정해진 곳도 있어서 제출 뒤 절반, 출간 뒤 절반으로 타협하기도 한다. 번역 초기에는 번역료를 제때 못 받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아예 번역료를 받은 뒤에 원고를 넘겨주기로 계약한 적도 있다. 번역을 끝내놓고도 원고를 인질로 붙잡고 있는 것이 꺼림칙해서 결국 번역료를 받기 전에 넘겨주고 말았지만.

선배 번역가들에게 예전에는 번역료가 얼마였는지 물었더니 1990년대 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때보다 더 헐값에 하는 경우도 있다. 책값이 물가에 비례해 오르지 않은데다 판매량이 전반적으로 감소했으니 조금이나마 오른 것도 대견하달까.

노승영 생계형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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