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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거나 구태의연하거나

알고 보니 멋진 남자, 알고 보니 엄청난 고수… 만화에서 반복되는 클리셰 이벤트, 뻔하지만 반복적인 우리 현실과 닮아
등록 2012-04-07 11:21 수정 2020-05-03 04:26
<시마 과장> 시리즈는 성인 독자들의 정복·출세 판타지를 충족해주는 클리셰 이벤트를 촘촘히 채워넣어 큰 인기를 얻었다.

<시마 과장> 시리즈는 성인 독자들의 정복·출세 판타지를 충족해주는 클리셰 이벤트를 촘촘히 채워넣어 큰 인기를 얻었다.

기본적으로 장르물은 익숙한 것의 향연이다. 90%의 익숙함 위에 10%의 변주를 올려서, 지나치게 방대한 새로움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기보다는 좀더 가벼운 방식으로 즐기는 것에 최적화된 양식이다. 그런 익숙함의 요소인 ‘장르 코드’이자 줄거리상의 사건 요소인 것을 흔히 ‘이벤트’라고 부른다. 이벤트는 해당 작품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전개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 코드로서의 익숙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려고 별다른 고민 없이 그냥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활용되는 것을 통칭하는 용어가 ‘클리셰’다.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릴 지경으로 계속 생각 없이 반복되는 요소를 칭하는데, 원래는 활판인쇄 시절에 자주 반복돼 등장하는 문구를 아예 그냥 미리 조판으로 맞춰놓고 그대로 찍어버린 것에서 유래한다. 클리셰 이벤트는 구태의연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으나, 그 장르의 작품을 읽는 데 빠져 있다면 어딘가 어색하고 심심해지기 쉽다. 거의 전부 클리셰 이벤트만으로 짜인 줄거리로 진행되는 작품이라도 나름의 익숙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좀더 신선한 재미를 표방했는데도 장기 연재가 지속되며 결국 그런 것에 의존하다가 망가지기 시작하는 안타까운 작품도 있기 마련이다.

클리셰 이벤트가 잘 발달한 장르라면 역시 일본 주류 소년만화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발되는 것은 주인공급 캐릭터들의 관계 발전 요소로서의 해변 이벤트, 야시장 불꽃놀이 이벤트 같은 것들이다. 여성 캐릭터에 수영복과 유카타라는 이색 코스튬을 입혀서 소년 독자들의 눈요기를 충족시킴은 물론, 별로 섬세하게 설계하지 않고도 적당히 연애 요소를 슬쩍 충족시킬 수 있는 방식이다. 특히 판타지 격투같이 섬세한 감성이 주가 되지 않는 작품일수록, 대충 밀린 숙제 하듯 캐릭터 관계 진전을 위해 밀어넣기에 적합하다.

혹은 한국 순정만화에서 두드러지게 자주 활용되는 것으로 ‘알고 보니 멋진 남자·여자’ 이벤트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나쁘거나 무뚝뚝한 남자·여자로 인식되는 사람인데, 주인공 혼자만 보고 있는 어떤 순간에 갑자기 두근거리게 만드는 멋짐을 발휘해 감정 흐름의 전환점을 준다. 서서히 정들어가는 방식보다는, 뚜렷한 이벤트로 만들어버리는 게 훨씬 간단한 것이다.

기타 온갖 장르마다 그런 것은 넘친다. 무협물에서 가장 뻔한 클리셰 이벤트는 바로 ‘기연’이다. 허름한 상대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고수고, 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움을 얻어서 무공에 큰 진전을 이룬다. 남성향 성인 현대물 극화에서는 적진의 고위직 여성과 연애를 하는 클리셰 이벤트도 참 흔하다. 강대한 적을 이기기 위한 중간 과정이며, 성인 독자들의 정복·출세 판타지를 정확하게 건드린다(그 이벤트로 온 시리즈를 가득 채우고 일본에서 거의 국민적 사랑을 받은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런 것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기반은 물론 우리 현실 또한 적잖이 이와 닮은 덕분이다. 서서히 디테일을 축적하고 적절한 성찰을 이루며 파격을 실험하기보다는, 자동화돼 있으며 뚜렷하게 보이는 사건과 조처의 반복이 훨씬 익숙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본연의 사회적 보수성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그렇듯, 현실 세상에도 클리셰 이벤트는 널렸다. 학교폭력 같은 사회적 교육 문제가 발생하면 보수 언론과 정부 부처가 손잡고 벌이는 ‘만화·게임 등 청소년 선호 대중문화 비난 이벤트’라든지 말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고 적잖이 유치하고 조건반사적 반복이라서 식상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질 지경이다. 선거철마다 돌아오는 ‘사표를 방지하자’ 캠페인 같은 것도 클리셰 이벤트 속성이 넘치지만,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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