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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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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x이명박’에서 무엇이 상상되나요?

‘x’ 뒤에 숨은 상상력의 폭발…
이름 두 개를 엮어 캐릭터 성격을 완전히 재해석해 향유하는 독자문화 ‘공수 커플링’
등록 2012-02-11 11:12 수정 2020-05-03 04:26

만화애호가들이 그들의 매체 공간에 남기는 내용을 보다 보면, 이름 두 개를 ‘x’로 결합한 표기를 종종 볼 수 있다. ‘오징어소녀x케로로’같이 주로 작품 속 캐릭터인 경우가 많지만, 가끔은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얼추 분위기를 보면 두 사람을 함께 묶는 것인데, 실제는 좀더 정교한 장르 법칙을 한 무더기 장착해서 이야기를 함축해 넣는 절묘한 독자문화다.

남성 동서애물에서 발전한 ‘공수 커플링’은 주어진 단서들로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중요한 팬덤 현상이다.

남성 동서애물에서 발전한 ‘공수 커플링’은 주어진 단서들로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중요한 팬덤 현상이다.

x로 표기되는 이른바 ‘커플링’은 소비와 창작을 겸한 독자문화, 즉 동인문화의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작품 또는 현실에서 실제로 어떤 관계를 맺는 등장인물들이든 간에, 독자의 상상 속에서 그들의 관계를 새로 설정한다. x보다 앞에 나오는 이는 ‘공’(攻)으로,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역할이다. 뒤에 오는 이는 ‘수’(守)로, 소극적 또는 수동적이지만 결국 그 관계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맡는다. 이쯤 되면 쉽게 눈치챌 수 있듯, 이들이 맺는 관계는 바로 애정관계다. 동료나 라이벌인 두 남자 주인공의 관계를 독자의 상상 속에서 끈끈한 동성애로 묶는 것은 흔해빠졌고, ‘공수’라는 설정을 통해 캐릭터의 성격을 완전히 재해석하는 향유 행위가 널렸다. 공에 해당하는 이는 내심 공격적·적극적으로 강조되는 쪽으로 다시 읽히고, 수에 해당하는 이는 원래 작품 줄거리가 어땠든 간에 사실은 수동적으로 애정을 기다리는 섬세한 측면을 품고 있다는 식으로 재창조된다.

x로 묶이는 공수 커플링은 일본 동인계, 특히 의미 없는 패러디에서 시작해 현재는 남성 동성애물이 대부분인 ‘야오이’ 장르에서 발전된 방식이다. 하지만 원류는 지금도 번성 중인 영미권 팬픽(Fanfic·팬(Fan)과 픽션(Fiction)의 합성어) 문화인 슬래시 픽션에서 찾을 수 있다. 1970년대 미국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 커크 선장과 스폭 부관의 동성애 로맨스 동인 창작글을 쓰며 ‘커크/스폭’으로 표기한 것이 대표적이다. 즉, 이런 식의 재창조 접근법은 대중문화가 발달한 곳이라면 생각보다 여러 문화권에서 보편적 호소력을 지녔다고 볼 수도 있다.

공수 커플링은 오늘날 만화와 만화 중심 콘텐츠에서 가장 흔하다. 아무래도 그런 상상력을 그럴듯한 일러스트나 창작 서사물로 풀어내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특히 일본과 한국은 만화 동인지의 저변이 상당히 넓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커플링은 금기의 관습에 대한 전복적 재미와 작품에 대한 능동적 참여의 즐거움을 준다. 게다가 그것을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라서, 캐릭터 간 관계를 간단히 기호화해 제목 자체에 이미 내용과 상당한 양의 장르 법칙을 내포해 상상력을 전달한다. 즉, 전복의 재미와 장르 서사에 꼭 필요한 예상 가능함을 제목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셈이다. 덕분에 주어진 단서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사소한 망상을 붙여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재미를 느끼도록 해주는 중요한 팬덤 현상이다. 동인 패러디로서의 향유 활동임을 명확히 드러내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모욕을 느낄 이유도 없다.

다만 아무래도 기존 장르 법칙, 특히 캐릭터 중심의 장르만화에 익숙지 않은 이들에게 그 절묘함을 전달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건희x이명박’이라는 제목을 볼 때 곧바로 현실 사건들과 장르 클리셰가 뒤섞인 망상 스토리가 연상돼 오한과 폭소를 동시에 터트릴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지만 그런 쪽에 익숙한 이들에게만큼은 확실한 재미를 보장해줄 수 있다. ‘총공’인지 ‘다정공’인지 ‘약공’인지 문외한들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으로 논쟁하며 더욱 상상에 몰입할 수도 있다(굳이 말하자면, 필자는 이 경우 총공(모든 ‘수’들의 공)이라고 생각한다). 만화팬이라서 누릴 수 있는 확실한 즐거움 중 하나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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