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집을 나선다. 하루의 시작을 서두른 사람들을 버스와 지하철에서 만난다. 아침 6시50분 조회에 참석하고, 7시부터 일을 시작한다. 38층 건물을 짓는 공사장이 요즘 그의 일터다. 무거운 파이프를 나르다 타박상을 당하기 일쑤다. 용접 불꽃이 살갗에 화상 자국도 남긴다. 그는 뜨거웠던 지난 7월 어떤 날의 하루를 페이스북에 이렇게 기록했다.
“점심밥 먹고 ‘깜박잠’, 오전·오후 잠시의 휴식이 없으면 못 견딜 것 같은 폭염의 노동을 모두 꾸역꾸역 해낸다. 생존이기에.”
오줌이 튀는 것을 받아내며 화장실 소변기 철거 작업을 한 적도 있다. 얼굴을 알아본 현장 동료들이 의아해하며 묻는다.
“어떻게 이런 험한 일을 할 생각을 했어요?”
“국회의원을 한 사람이 공사장까지 나올진 몰랐다.”
그는 “먹고살아야 하니 나왔습니다”라고 얘기한다. 선거 출마로 진 빚, 집 얻을 때 대출받은 돈 등을 갚아야 하니 틀린 말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일당을 벌지 못하면 당장 먹고사는 게 걱정인 사람들”과 공사장 위험 구간에 함께 오르며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돌아보고 있다.
12월17일 서울 시내에서 만난 이상규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지난 6월부터 배관공으로 살고 있다. 하루 12만원 정도 받는 일이다. 추석 연휴가 있던 9월만 빼고 한 달 평균 25일 일했다. 이제 “이씨” “이상규씨”로 불린다.
공사장으로 출근하는 전직 국회의원“노동자·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려면 서민들의 삶이 있는 현장에 같이 있어야죠.”
의원 당선 전해인 2011년까지 배관 설비를 한 경험이 있다. 그때 파이프에 찧여 손가락 두 개의 끝마디가 으스러진 적도 있다. 배관공으로 돌아가려고 지난 5월 기능학교에서 20일간 실습도 했다. 공사장에서 실수할 땐 “모욕을 당하기도” 하지만, 7개월째 버텨내는 그를 현장에서도 달리 보기 시작했다.
지난해까지 그는 국회의원이었다. 2012년 총선 당시 모교 대학이 있는 ‘서울 관악을’에서 초선 의원이 됐다. 그는 의원 시절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증거가 은폐되는 정황이 담긴 경찰의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을 입수해 공개했다. 군 사이버사령부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 증거도 찾아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12월19일 진보당 해산을 결정하면서 당과 의원직을 잃었다. 그날은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두 돌을 맞은 날이다. 헌재 재판관 9명 중 8명(박한철·이정미·이진성·김창중·안창호·강일원·서기석·조용호)이 해산에 찬성했다.
의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단은 지난해 12월 말부터 올해 12월까지의 판결 중 가장 나쁜 판결에 헌재의 진보당 해산 결정을 꼽았다. 심사위원단은 “정당의 흥망성쇠를 국민의 선택에 맡기는 게 민주주의다. 헌재가 정당 해산을 결정함으로써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줘야 한다’는 헌재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허물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의원은 자신이 “불법 해고됐다”고 말한다. “해산의 법적 타당성이 없다”고 보아서다. 대법원은 지난 1월 이석기 전 진보당 의원 사건에 대해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내란선동은 유죄)로 선고하면서, 지하혁명조직(RO)의 존재를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며 내란 실행의 합의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앞서 헌재가 정당 해산을 결정할 때의 논리가 크게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헌재는 대법원 선고가 있기 전에 서둘러 정당을 없앴다. ‘북한의 사주를 받아 폭력으로 북한식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숨은 목적’이 있다는 정부와 검찰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헌재의 존재 이유를 허문 결정”이상규 전 의원은 “헌재의 결정은 내란음모와 RO의 실체가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과도 위배된다”고 했다. 그는 ‘재판관 8 대 1로 해산된 결정’에 대해 “재판관의 소신이라기보다 정권 의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정권 연장의 걸림돌이던 야권 연대를 깨려고 진보정당을 해산시키는 1차 목적을 달성한 뒤 노동자 해고가 손쉬운 노동법 추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등 우리 사회를 퇴행시키는 일들을 정부가 강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진보당 해산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상대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진보당 해산 때 우려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10만 명이 넘는 당원들에게 가해질 ‘종북 딱지’였다. 이 전 의원은 “지역 시민단체 등이 서명운동을 할 때도 같이 하자고 우리(옛 진보당 사람들)에게 손을 못 내미는 상황이다. 끼어주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일반 당원들은 당이 없어졌다는 상실감이 크다”고 했다.
“많이 겪는 일은 아니지만, 지난 4월 관악을 보궐선거에 재출마했을 때 ‘빨갱이들이 북한에나 가지, 왜 선거에 나왔냐’고 말하는 아주머니도 있었죠. 어떤 식당에선 ‘우리 집에 왜 종북을 하는 사람이 들어오냐’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럴 땐 ‘부족한 게 많지만 우리가 종북이라면 벌써 잡혀갔지요. 잘 헤아려주세요’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는 정당 해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진보당 자체에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흐름을 기억한다. 그는 “정권의 탄압보다 우리의 부족한 점을 10배, 100배 더 심각히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당 안팎에서 우리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했다”는 것이다.
옛 진보당 인사 4명이 최근 펴낸 책 에서 저자들도 “진보당은 박근혜 정부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진정한 패배는 국민의 냉담함이었다”고 적었다. 진보정치를 하며 무상급식, 복지 문제를 우리 사회에 전면화했지만 자신들의 신념이 다른 한편으론 ‘배타적인 선민의식’으로 나타난 점 등에 대한 성찰이다.
옛 진보당 인사들 출마 준비 중법을 전공한 이 전 의원은 지역에서 주민들이 요청하는 민원·법률 상담도 해준다. 그는 “정치적 복직”을 위해 내년 4월 총선에 출마하려고 한다. 같은 당 의원이었던 약사 출신 김미희 전 의원도 지역(경기 성남 중원)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김재연 전 의원도 청년을 위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면서 경기 의정부에서 총선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당 원내대표를 지낸 오병윤 전 의원은 출마할 의사 없이 호남의 한 사찰에서 지낸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정희 전 대표는 심신을 추스르고 있다. 이 전 대표 등 옛 진보당 당원 389명은 12월17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 정당 해산 결정의 부당함을 심리해달라는 진정을 냈다.
이 전 의원은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이 잡혀갈 때 의원들이 보이지 않더라. 의원으로 계속 있었다면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문제, 국정원 해킹 사건에도 집중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공사 현장에 나가면 하루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서민들의 절박함을 만나게 된다”고 했다. 의원직에서 해고된 ‘배관공 이씨’가 진보정치의 의원으로 복직을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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