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야, 이거 진짜 맛있는 갈치야. 뻥 아니야.”
“귤이 싸요, 진짜 싸.”
바깥 거리는 12월 들어 가장 춥다는데, 시장통은 장사꾼들의 걸쭉한 입담에 뜨듯하다. 지난 12월15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은 평일 낮인데도 손님으로 북적였다. 두꺼운 파카와 털부츠, 목도리로 중무장한 시장 상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신나게 목소리를 높였다. 떨이 상품을 잔뜩 꺼내 쌓아놓은 슈퍼 앞은 사람에 치일 지경이다. 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갈라치면, 가뜩이나 추워서 웅크린 어깨를 더 동그랗게 웅크려야 한다. 이렇게 오밀조밀한 가게 86곳에 상인 400여 명과 그 가족들의 삶이 들어앉아 있다.
양창영(44) 변호사는 망원시장 단골이다. 그냥 단골이 아니라, 시장 형편을 속속들이 아는 한가족이나 다름없다. 어느 가게 사장님 성격이 걸걸하고 입담이 센지, 어느 가게가 제일 장사가 잘되는지 훤하다. 과일가게 김미숙(50) 사장님은 19년 된 고참급이고, 최경병(59) 사장님은 17년 동안 쫄깃한 족발을 썰었다. 망원시장 상인회 ‘마당쇠’인 고종순(53) 사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소한 깨를 볶는다.
양 변호사가 망원시장을 찾기 시작한 지는 10여 년이 되었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2002년 그만두고 나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무렵부터였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근처에 사는 양 변호사는 대형마트 계산직으로 일하던 아줌마들이 비정규직법에 맞서 싸우다가 경찰한테 끌려나오는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봤다. 만화 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사건이다. 그 뒤로 그는 대형마트에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 대신 생활협동조합이나 전통시장, 동네마트를 이용한다.
2008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그는 소상공인들 편에 섰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민생경제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대형마트가 영업시간 제한, 의무휴업일 지정에 반발해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낸 소송 관련 업무를 도맡았다. 서대문구, 동작구, 노원구 등 그가 변호를 맡은 지자체만 다섯 손가락을 넘어간다. 지자체를 대리했지만, 실은 시장 상인들을 대변한 셈이다.
대형마트와 시장 상인들 간에 법정 싸움이 시작된 건 2012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회에서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을 개정하면서 시장·군수·구청장이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대해 오전 0시부터 8시까지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매달 1~2일씩 의무휴업일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한 게 법정 싸움의 ‘불씨’가 됐다. 유통법은 이를 어기는 사업자에게는 3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도록 했다.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보호해 건전한 유통질서를 확립하고, 대형마트에서 야간 근무하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2012년은 ‘경제민주화’라는 이슈가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동네 빵집과 커피숍을 넘보는 대기업, 골목상권을 침해하는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다. 4·11 총선에서 여야 모두 경제민주화를 앞세운 공약을 내놨고, 이런 흐름은 그해 말 대통령 선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대형마트 쪽에선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반격에 나섰다. “일요일에 의무휴업을 하면 맞벌이 가족이 주말에 장 보는 데 불편하다” “대형마트에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은데 야간·휴일 근무가 없어지면 임금이 줄어든다” “지자체 행정처분이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의 시장접근 제한 금지 조항을 위반해 통상 마찰이 우려된다” 등등.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6곳은 각 지자체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내는 공동 작전에 들어갔다. 대형 로펌이 변호인으로 가세했다. 대부분의 소송은 1심에서 지자체 승소로 끝났다.
대형마트를 대형마트라 부르지 못하고그런데 지난해 12월, 전세가 역전됐다. 뜻밖에 대형마트가 승소한 판결이 나온 것이다. 서울고법 행정8부(재판장 장석조)는 대형마트 6곳이 서울 동대문구청과 성동구청을 상대로 ‘영업시간 제한과 의무휴업 지정 등의 행정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다소 엉뚱한 이유를 댔다. 소송을 낸 회사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점포가 “법에서 정한 대형마트로 볼 수 없다”는 이유다.
유통법에는 대형마트, 백화점, 복합쇼핑몰 등 대규모 점포의 종류를 6가지로 구분한다. 이 법에서 규정된 대형마트는 ‘매장 면적 3천m² 이상으로 점원 도움 없이 소매하는 점포 집단’이다. 그런데 해당 이마트나 롯데마트 등은 채소·과일 코너에 제품의 무게를 재거나 포장해주는 점원, 정육·생선 코너에 제품을 손질해주는 점원의 도움이 있으니 대형마트가 아니라고 재판부는 설명했다. 이마트를 ‘대형마트’라고 부르지 못한다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판결’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재판부는 또 전통시장의 보호 효과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데도 지자체가 소비자 선택권을 과도하게 제한했다고 봤다. 한-EU FTA의 시장접근 제한 금지 조항 위반이라고도 판단했다. 대형마트 규제 이후 소상공인 사업체 552곳을 조사했더니 전통시장 매출액이 18.1%, 고객 수는 17.4% 증가했다는 결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상은 달랐다. “진짜로 난리가 났죠. 하루에 ‘품절’ 방송을 몇 번 했는지 몰라요.” 2013년부터 망원시장은 대형마트가 의무휴업을 하는 매달 둘째·네째 주 일요일마다 ‘망원시장 난리났네!’ 할인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서정래(53) 망원시장 상인회 회장은 “채소가게, 정육점 여러 곳이 뭉쳐서 ‘생고기 한근 1900원’ ‘동태 1천원’ 전단 광고를 냈던 게 할인행사의 시초”라고 기억했다.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을 ‘전통시장 가는 날’이라고 각인시키려면 “조금 손해 보더라도 고객을 모아보자”며 시작했다. 두 번째 할인행사 때는 우유가 품절됐고, 세 번째에는 5개 묶어 1천원에 판 오이가 동났다. 명절 대목처럼 손님이 몰렸다. 서울고법 재판부가 망원시장에 와봤다면 ‘대형마트 규제 효과가 없다’는 탁상머리 분석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공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사건 내용을 꿰뚫고 있는 양창영 변호사, 판사 출신으로 서울시 고문 변호사이기도 한 이림 변호사가 전통시장 상인들을 대변하기 위해 동대문구청과 성동구청 쪽 변호인단에 합류했다.
대법원은 지난 9월18일 공개변론을 열었다. “그날 변론할 때 보니까 목소리에 칼이 들어 있더라고. 나야 당사자지만, 변호사한테서 그런 절박함이 느껴지다니. 방청석에 앉아 있는데 양 변호사가 말할 때마다 울컥울컥했다.” 서정래 회장이 그때 기억을 들춰냈다.
상생발전 위해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다윗’ 변호사들이 승리했다. 법무법인 태평양과 김앤장을 상대한 값진 승리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지난 11월19일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대형마트에 대한 영업시간 제한, 의무휴업일 지정이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해당 점포는 ‘대형마트’가 맞고, 의무휴업으로 인해 주변 전통시장과 중소 소매업체의 매출이 실제 증가했다고 대법원은 항소심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았다. 또 ‘통상 마찰’ 우려와 관련해서도 한-EU FTA 등 통상협정 위반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이미 시장 진입이 허용된 외국계 대형마트에 국내 기업과 같은 규제를 적용해도 ‘시장접근 제한 금지’ 조항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헌법 제119조 2항,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을 자세히 인용했다. 사실상 사문화됐던 경제민주화 헌법 조항을 대법원이 판결문에 적시한 것은 처음이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헌법 제119조 2항)
‘대형마트 영업의 자유’ ‘소비자의 선택권’이라는 사익과 ‘대형마트 경제력 남용 방지’ ‘전통시장 보호’라는 공익이 충돌할 때 경제주체 간의 조화로운 공존은 어떻게 가능할까?
대법원은 헌법 제119조 2항을 바탕으로 “상생하는 경제질서를 구축하고 공공복리를 실현하기 위해 법률로써 어느 경제주체의 경제활동의 자유 등을 제한하게 되더라도 그 제한이 정당한 목적과 합리적인 수단에 의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해당 경제주체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방향을 잡아줬다.
유통법이 공익 실현을 위한 경제규제 입법이고, 해당 지자체가 이해당사자에게 의견 청취 등의 절차를 거친 이상 대형마트와 소비자가 다소 불이익을 입거나 불편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에둘러 말했지만 탐욕스런 자본에 대한 법원의 경고 메시지임이 분명했다. 프랑스, 독일 등 외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대형마트 출점 지역과 영업시간을 제한해왔다.
이림 변호사는 “헌법 제119조 2항을 대법원이 거론한 사건은 이례적이다. 10년 이상 논의된 끝에 국민적 합의에 따라 국회를 통과한 경제민주화 관련 법의 입법 취지를 살려야 한다는 측면에서 대법원이 아주 법리적인 차원에서 판결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공개변론에서 “소비자들도 심야나 한 달에 1~2번 일요일에 대형마트 쇼핑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고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모처럼 정착돼가는 ‘상생발전’의 싹을 꺾지 말아달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시장 자생력 위해 실험 지속하는 전통시장대법원 판결 이후, 전통시장 상인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싸움은 아니다. 서정래 회장은 “상생이란 명목하에 일부 상인단체와 대형마트 간에 의무휴업일을 평일로 옮기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걱정했다.
서 회장은 망원시장에서 23년 동안 옷장사를 해온 토박이다. 그는 “대형마트가 의무휴업을 한다고 해도 시장의 자생력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망원시장은 기업 사내행사 맞춤 서비스인 ‘걱정마요 김대리’, 전통시장 최초로 시도한 ‘티머니’ 결제 서비스 등 여러 실험을 통해 고객 마음 잡기에 나섰다. 시장 입구에 세운 상인회 건물 지하에서는 ‘요리 프로그램’도 열 계획이다. 지역 상인과 주민들이 힘을 모아 기업형 슈퍼마켓 입점을 막아낸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자신감’이다. “대형마트랑 싸워서 이길 수는 없지만 지지는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장을 좀더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상인들의 힘도 잘 결집됐다.”
대법원이 잊혀져가던 ‘경제민주화’를 다시 불러냈다. 하지만 예전처럼 경제민주화 열기가 뜨겁지는 않다. “(대법원 판결로)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온 거죠.” 양창영 변호사가 농담처럼 말했다. 뼈 있는 농담이다. “선거 때나 경기침체기에 ‘경제를 살리자’는 하나의 방편 정도로만 경제민주화를 바라봐선 안 된다. 경제주체가 고르게 발전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 충족되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좀더 정치적인 기본권에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경제민주화가 일시적인, 정치적 구호로 끝나선 안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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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연 골목길이 뚫려야 큰길도 안 막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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