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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여, 성기 집착을 버려라

여성 성기 수술 없이도 성별 정정 첫 인정…

국가 “정체성 어긋난 삶 강요 안 돼”
등록 2017-12-20 17:16 수정 2020-05-02 19:28
은 매해 말 그해의 주목해봐야 할 ‘올해의 판결’을 선정해 기본권과 인권을 용기 있게 옹호하는 판결을 내린 판사(재판관)들을 응원하고, 그 반대편에 선 판결들을 경고·비판해왔다. 2008년 시작된 ‘올해의 판결’은 올해로 벌써 10회째를 맞았다. 그동안 ‘올해의 판결’이 축적해온 기록은 한국 사법정의의 현재를 가늠하는 흔들림 없는 지표로 자리잡았다.
성기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수술은 성전환 관련 수술 중에서도 위험성과 후유증이 큰 편이다. 한겨레

성기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수술은 성전환 관련 수술 중에서도 위험성과 후유증이 큰 편이다. 한겨레

“A의 가족관계등록부 중 성별란의 ‘남’을 ‘여’로 정정함을 허가한다.”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지원장 신진화)은 2월14일 신체 외부에 여성 성기를 만드는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에게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국내 첫 판결을 내렸다. 법원이 성소수자에게 또 한 걸음 전향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A씨는 남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성기에 위화감을 가졌고 같은 남성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화장하고 머리는 기르는 등 외모를 여성처럼 꾸몄다. 2005년 성주체성 진단을 받았고 그 무렵부터 여성호르몬 요법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2014년 양쪽 고환 절제 수술과 가슴 확대 수술을 받았다. 주위 사람들은 A씨를 여성이라 인식했고, A씨는 여성화장실을 이용했다.

하지만 A씨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여전히 ‘1’로 시작했다. 그가 여성 외부 성기(질, 음핵 등)를 만드는 수술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원은 그동안 이 수술을 받아야만 성별 정정을 허가했다. 외부 성기 수술은 음경 피부를 몸속에 밀어넣거나 내장의 일부를 잘라 질을 형성하는 수술이다. 그렇게 인공적으로 질을 만든다 해도 깊이가 충분하지 않고 확장기를 일상적으로 질 안에 넣고 다녀야 해 수술 위험성과 후유증이 큰 편이다. A씨는 수술을 원치 않았다. 그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 공익소송 기금’의 지원을 받아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에 등록부정정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A씨의 신청에 “여성으로서 성별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 성기 형성 수술은 필수적이지 않다”며 성별 정정을 허가했다. “수술을 받지 않은 성전환자는 사고나 질병으로 생식기를 잃은 경우와 다르지 않다. 성별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법원은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가는 각 개인이 자신의 기본적인 정체성과 어긋난 형태로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강요받도록 하면서까지 신분관계 체계를 경직되게 운영해선 안 될 것이다.”

이런 법원의 인식은 성전환 수술 등을 하지 않고도 성별 정정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세계적 추세와 일치한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11년 1월11일 성전환 수술을 법적 성별 정정의 필수 요건으로 하는 성전환자법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영국, 스페인, 스웨덴, 핀란드 등 다수의 국가와 미국 일부 주에서도 성전환 수술 없이 성별 정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이 있었다.

한국도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하는 경우 2013년 3월 성기 수술 없이 성별 정정이 받아들여진 전례가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엔 ‘수술이 덜 어렵다’는 이유로 그동안 성별 정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A씨의 변론을 맡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은 이 판결 이후 논평을 내어 “성전환자의 인권 증진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판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심사위원 20자평


김태욱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법원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입증한 결정
김한규 다양성 존중과 소수자 보호가 민주사회의 시작
안진걸 실존 건 요구들을 재판부는 더 많이 이해하고 보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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