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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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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악법’이 정당, 말이냐 막걸리냐

“유신 시절 긴급조치 수사·재판 자체는 불법행위
아니다” 대법원 판결… 점점 국가범죄에 관대해지는 ‘최후의 보루’
등록 2014-12-19 05:48 수정 2020-05-02 19:27

민간인 학살, 고문과 조작간첩…. 과거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정부의 방치 속에 수십 년간 억울함을 안고 살아왔다. 1999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여러 과거사 진상 규명 기구가 만들어져 그들의 피해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때까지 과거사위원회 활동은 이어졌지만, 피해자 명예회복과 손해배상을 책임질 제도적 장치는 마련되지 못한 채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끝으로 과거사 진상 규명 활동은 퇴장했다. 피해자들은 또다시 과거사위 결정문을 손에 쥐고 각자 재심과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 법원 문을 두드려야 했다.

3년 → 6개월, 청구 가능 기간 대폭 단축

법원을 통하는 길은 유일한 명예회복 방법이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배상금이 지나치게 많다’는 목소리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불완전한 과거사 정리 문제는 뒤로 빠지고 수억~수십억원의 배상금을 놓고 왈가왈부했다. 2011년 대법원은 “과잉 배상 문제”를 언급하며, 간첩 누명을 쓴 납북어부 유족이 받을 지연손해금(이자) 기산 시점을 바꿔 배상액을 대폭 깎았다. 이 여파로 인혁당재건위 사건 피해자들은 미리 받은 배상금 일부를 반납해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난 11월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이 ‘악법에 따른 수사나 재판 그 자제는 불법행위가 아니다’라는 대법원 판결에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지난 11월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이 ‘악법에 따른 수사나 재판 그 자제는 불법행위가 아니다’라는 대법원 판결에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뒤 손해배상을 까다롭게 인정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5월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가능 기간을 과거사위 결정 뒤 3년에서 6개월로 대폭 단축하는 판결을 했다. ‘과거사위 결정이라고 무조건 증거로 삼으면 안 된다’는 판례도 함께 내놓았다. 올해 3월에는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생활지원금을 받았다면 따로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지난 10월27일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유신정권 시절 긴급조치를 적용한 수사·재판은 그 자체로는 불법행위가 아니어서 손해배상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놔 시민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긴급조치는 ‘유언비어 날조·유포’ 행위 처벌을 명분으로 영장 없이 체포·구금을 가능하게 한 ‘희대의 악법’으로 불린다. 하지만 재판부는 “당시 유신헌법은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했고,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임이 (당시에) 선언되지 않았기 때문에, 긴급조치에 따른 수사를 집행한 것 자체는 불법행위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입증돼야만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생긴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최근 수년간 과거사 사건에서 국가 책임을 덜어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초헌법적 긴급조치가 정당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판결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이번 판결로 인해 앞으로 하급심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입증하기 어려운 피해자들은 배상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가 점점 국가범죄에 관대해지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와 함께 인종차별에 저항하다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담은 헌법을 만든 알비 삭스(남아공 초대 헌법재판관)는 그의 과거사 진실 규명 활동을 담은 저서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판사가 판결로써 국가의 존재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판사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2014년 한국의 사법부가 새겨야 할 말이다.


심사위원 20자평 ▶
문병효 나치의 법을 따른 공무원들은 모두 용서받았나?
장완익 국가 그 자체가 저지른 폭력이 불법행위가 아니라니!
최은배 국가권력이 모두 옳다고 보지 않으셔도 될 텐데.
이경미 사회부 법조팀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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