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판사가 대선 개입 사실을 애써 외면”

“정치 개입은 맞지만 대선 개입은 아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1심 선고…
국정원 댓글 활동 제보자 김상욱 “개인 일탈 주장은 국정원이 무능한 조직이라는 것”
등록 2014-12-19 05:35 수정 2020-05-02 19:27
국가정보원의 대선 여론 조작 댓글 활동 등을 제보한 뒤 국정원 내부 정보를 유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국정원 전 직원 김상욱씨가 지난 2월 1심 선고가 이뤄진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김씨는 1심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 국정원법 위반 혐의 등에 대해선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선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국가정보원의 대선 여론 조작 댓글 활동 등을 제보한 뒤 국정원 내부 정보를 유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국정원 전 직원 김상욱씨가 지난 2월 1심 선고가 이뤄진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김씨는 1심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 국정원법 위반 혐의 등에 대해선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선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정치적 판결이죠.”

그는 그렇게 보는 이유를 덧붙였다. “국가정보원이 2012년 대통령 선거 직전까지 (여당 후보를 지지하고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과 트위터를 달았습니다. 그 행위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삼척동자도 아는 거 아닙니까? 이게 선거 개입이 아니란 판결은 말이 안 됩니다.”

오늘 한 일 보고했는데 계획성 없다?

지난 12월10일 만난 김상욱(51)씨는 국정원의 대선 여론 조작 댓글 활동 등을 국정원 담장 밖으로 끄집어낸 제보자다. 국정원에서 부이사관(3급)까지 지내다 2009년 퇴직한 전직 국정원 직원이다. 하지만 지난 9월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는 2012년 대선 개입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선고에서 ‘정치 개입은 맞지만(국정원법 위반은 유죄), 대선 개입은 아니다(선거법 위반은 무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의 ‘올해의 판결’ 심사에서 심사위원 모두가 이 판결을 ‘나쁜 판결’로 뽑았다. 당시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지시로 국정원이 정부와 여당 정치인을 찬양하고 야당 정치인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며 정치에 불법적으로 관여했으며,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죄가 무겁다”며 국정원의 정치 개입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대선 개입 무죄’란 결론에 이른 재판부의 논리에 대해 김상욱씨는 “판사가 (대선 개입 사실을) 애써 외면한 것”이라고 했다.

-외면을 했다?

=진실은 하나다. 재판부도 불법적으로 정치에 관여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정당이 정권 획득을 위해 겨루는 게 대선이다. 정당의 정치 행위의 핵심이 대선인데, 국정원이 정치에 관여했다면서 선거 개입을 하지 않았다고 (별개의 문제로) 구분한 것은 맞지 않다.

-원 전 원장이 ‘박근혜 후보를 도우라’고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 후보를 당선시키려는 목적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게 선거 개입을 무죄로 본 재판부의 첫 번째 논리였다.

=정치 개입 댓글·트위터 글이 작성된 첫 번째 요인은 원장(원세훈)이 국정원을 국가 정보기관, 국가 보위기관이 아니라 정권 보위기관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 전 원장이 직원들에게 전달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보면, 그건 새누리당 정권이 선거 심판을 받지 않고 새누리당 정권이 계속 가도록 하자는 뜻이다. 2012년 대선 당시 유력 후보는 두 사람(박근혜·문재인)이었다. (원장이 누구를 도우라는 건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름(박근혜)을 거명하지 않았다고 범죄가 아니냐?

(김씨의 말처럼, 원 전 원장은 ‘지시·강조 말씀’에서 “야당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하면 강에 처넣어야” 한다거나, “인터넷을 종북좌파 세력이 점령하고 있는데, 인터넷을 청소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라”고 지시했다. 1심 재판부도 “국정원 심리정보국의 게시글을 보면 원 전 원장이 지목한 정치적 쟁점이 빠짐없이 게재됐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심리전단의 트위터 글 개수가 대선에 임박할수록 줄어든 것을 볼 때 박 후보를 당선시키려는 계획성과 능동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는데.

=그건 2012년 12월11일에 (정치 개입 관련 글을 작성한)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위치가 알려진 뒤 국정원이 증거를 인멸하면서 (대선 직전에) 트위터 글 등이 없어진 거다. 그리고 (정치 개입) 글은 한 건이라도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국정원 직원들은 ‘오늘 할 일과, 오늘 한 일을’ 보고해야 하는데, 계획성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트위터 글 등을 작성한 국정원 직원이 단순한 타자수였나? 그게 무슨 의미(정치 개입)인 줄 알고 작성한 건데 뭐가 능동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가?

무슨 의미인 줄 아는데 능동성 없다?

-원장 지시가 아니라 직원의 개인 일탈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보나.

=국정원 특성상 절대 그럴 수 없다. 오히려 그건 국정원 직원들이 나가서 놀면서 트위터·댓글이나 다는 무능한 조직으로 만드는 거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9월 대선 개입 혐의는 무죄를 받았으나, 정치 개입 혐의에 대해선 유죄를 인정한 1심 선고가 나오자 항소할 뜻을 밝히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9월 대선 개입 혐의는 무죄를 받았으나, 정치 개입 혐의에 대해선 유죄를 인정한 1심 선고가 나오자 항소할 뜻을 밝히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재판부는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은 대선 기간 훨씬 이전부터 해왔기 때문에 선거 시기에 이를 반복한다고 해서 선거운동으로 전환했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도 폈다.

=(트위터 글 등을 작성한) 국정원 심리정보국이 선거를 위한 조직이 아니란 논리인 것 같은데, 국정원이 기존 대북심리전단을 심리정보국으로 확대 개편한 게 2011년 말이다. 대선이 2012년 12월인데, 한 달 전인 11월부터 선거운동을 하겠나. 이미 정당들은 1년여 전부터 사실상 선거 체제로 들어간 상태였다. 국정원은 2011년 말에 심리정보국으로 확대 개편한 것은 명목상 ‘종북좌파 세력 척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활동 내용은 정치 관여였고 선거 개입이었다.

-직원들은 왜 정치 개입 사이버 활동을 멈추지 못했을까.

=조직 생리상 (개인이 거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국정원 직원들은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국가 최고 정보기관에 들어와 자부심을 갖고 일해왔는데, (위의 지시로) 댓글이나 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직원들도 (조직의 지시를 따르는) 직장윤리와 민주사회 가치와의 충돌을 겪게 되는데, (정치 개입 활동이) 국정원을 넘어 알려지게 된 것이 내부 직원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고 본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에게 (불법적인 활동을) 말해준 것 아닌가.

-원 전 원장이 정치 개입 유죄 부분도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했다.

=직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직원들은 용서해달라’는 모습마저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원세훈)이 잠깐 원장을 했다고 국정원 출신이라고 하면 난 국정원 출신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원 전 원장과) 같은 국정원 배지를 달고 싶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의 선거 개입 여부가 ‘나와 무관하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대통령 직속기관의) 정치 관여 행위이니 대통령이 단호하게 (불법을) 끊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어야 했다. 대통령 임기는 5년이지만 대한민국은 계속 (앞으로) 가야 하지 않나.

김씨, 원심 깨고 무죄 선고

대법원은 지난 12월3일, 이번 1심 판결을 두고 “법치주의는 죽었다”고 비판한 김동진 수원지법 부장판사에게 정직 2개월의 징계를 가했다. 제보자 김상욱씨는 대선 여론 조작을 세상에 알린 뒤 국정원의 고발로 법정 싸움을 벌여왔다. 국정원은 김상욱씨가 전직 직원이긴 해도 댓글 활동 등 국정원의 내부 정보를 국정원장 허가 없이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에 유출했다며 국정원법 위반 혐의 등으로 그를 고발했다. 지난 7월 2심 재판부는 김씨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관련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새누리당은 김씨가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 예비후보로 등록(공천은 받지 못함)한 전력 등을 들어 “국정원 정보를 제보하고 공직을 얻으려는 매관매직 시도”라고 공격해왔다. 하지만 참여연대는 지난 12월8일 “외부 감시와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을 드러냈다”며 올해의 의인상 6명 중 한 명으로 김씨를 선정했다. 그는 “잘못된 것을 잘못했다고 얘기한 것”이라며 “국정원 직원들이 입을 닫고 지내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심사위원 20자평 ▶
김성진 ‘창조경제’만큼이나 창조적인 판결.
문병효 정해진 결론, 놀라운 판결, 실증주의 법 해석의 전형!
박진 돌아갈 수 없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루비콘강.
오정진 충정 어린 일꾼은 그리 보살핌을 받는군요.
이광수 그건 아니올시다.
정남순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는 국정법은 위반하였으나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는 공선법 위반은 아니다.
하태훈 대선 때 정치 관여가 선거 개입은 아니라는 재판부 상식은 어느 나라 상식일까.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