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탈퇴하고, 목포상선회사와 사장을 거쳐 정치 역정을 시작했다. 세 차례 낙선 끝에 국회의원이 되어 신민당 대선 후보에 올랐으나,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95만 표 차로 패배했다. 그 시절에 품었던 이상은 우뚝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많은 책을 잃고 많은 저술을 남긴 한국 정치인은 없다. 그의 지적 호기심은 하의도 서당 시절부터 서울 세브란스병원 입원 직전까지 쉼없이 왕성했다.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된 뒤, 청와대에 가져간 책만 트럭 두 대 분량이었다.
그의 지적 편력은 사상의 변화에도 영향을 줬다. 정치 초년 시절인 1960~70년대 ‘초기 김대중’과 대통령 당선 뒤의 ‘후기 김대중’은 분명히 다르다. 특히 청년 시절 김대중의 생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를 톺아보기 위해 두 김대중의 ‘가상 대화’ 형식으로 반세기에 걸친 사상의 변화를 비교해봤다.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글을 인용해 재구성했다. 1955년 10월 에 발표한 ‘한국노동운동의 진로’, 1970년 에 발표한 ‘70년대의 비전’, 1986년 3월 발행한 단행본 , 1992년 1월 에 실린 대담 ‘나의 사상을 말한다’, 1997년 4월 발행한 단행본 등을 주로 참조했다. 편집자
김대중 대통령(이하 김 대통령)= 반갑습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요즘 소장파 의원 가운데서도 활약이 대단하시더군요.
김대중 의원(이하 김 의원) = 저도 뵙고 싶었습니다.
김 대통령 = 경제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김 의원 = 실은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요. 해운업을 조금 했었는데, 처음에는 그 회사 노조위원장도 맡았거든요.
김 대통령 = 아, 예전에 노동문제연구소를 열어 직접 운영하셨다는 이야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요즘 노동계에 무슨 현안이 있나요.
김 의원 = 많지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경제의 후진성을 지양하자면서, 우선 자본주의부터 발전시켜놓은 뒤에 서서히 노동자의 후생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물고기가 고인 물에 갇혔습니다. 당장 구원해도 시원찮을 판에 동해물을 끌어들일 때까지 기다리라 하면 되겠습니까. 그전에 말라 죽어버릴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할 때까지 노동자와 근로계급이 겪을 고초와 희생은 뭘로 감당할 작정입니까.
김 대통령 = 흠, 지금은 시대가 다릅니다. 김 의원님은 아직도 근로계급을 언급하시는군요. 영국은 ‘복지국가병’에 걸려 신음하다 대처 총리가 집권하면서 비로소 사회민주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전환했고, 그 덕분에 경제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이런 국제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무역·투자·자본부터 개방화·자유화를 서둘러야 합니다.
<font color="#00847C">“노동자 후생 대책” vs “무역·투자 자유화”</font>김 의원 = 대통령님은 그걸 ‘인본적 경제 제일주의’라고 하셨지요. 지난 대선 직전부터 개방화·자유화를 많이 강조하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 '인본적 경제 제일주의’가 차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이명박씨가 말하는 실용주의하고 무엇이 다른지 저는 모르겠군요. 저는 대중민주 체제, 대중경제론을 주장합니다. 대중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생산력 발전의 담당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대중이 항상 정당한 배분을 받도록 제도와 정책의 양면에서 보장받아야 합니다.
김 대통령 = 글쎄요. 경제 운영은 철저히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해야만 합니다. 기업을 정부가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야 김 의원이 말하는 공정한 소득분배도 이뤄질 겁니다. 김 의원이 말하는 대중경제론이란 것은 그나마 보호무역이 허용되던 시기의 논리 아닌가 합니다. 지금에 와서 그걸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김 의원 = 저도 대통령님처럼 자유경제에 대한 소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통령님은 기업에 더 비중을 두는군요. 저도 개발독재를 반대했습니다. 그것이 노동자·농민·중산계층을 수탈하고 독점재벌을 살찌우는 길이니까요. 그럼,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민족자본인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해야 합니다. 중소기업이 성장하려면 정부가 나서는 게 당연합니다. 과도적으로 국영기업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민간인이 경영을 맡고 국가는 자본 부족분을 공급하는 형태의 합작을 하면….
김 대통령 = 어허, 큰일 날 소리. 정부가 경제를 끌고 가던 시대는 끝났어요. 우리나라의 경제위기는 정부 주도형 경제체제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발생한 겁니다. 그러니까 시장이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거죠. 정부가 주도하면 투자가 대기업에만 집중되는 걸 왜 모르시오. 중소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관치경제는 안 돼요. 게다가 지금 같은 세계경제 체제에서 그게 통할 것 같습니까?
김 의원 = 기업의 자유, 자유 하는데, 자본가만 자유가 있고 노동자는 자유가 없습니까? 노동운동의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 그게 민주주의 국가냐 아니냐의 잣대입니다. 사회주의가 망한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지 않은 사회주의가 망한 것입니다. 자본주의도 민주주의를 안 하면 망했습니다. 히틀러와 일제의 독점자본주의가 대표적이지요. 지금 한국에서 경제가 잘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노동자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민주주의가 없는 나라에서 무슨 경제 발전이 가능하겠습니까.
김 대통령 = 말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김구 선생입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신탁통치도 거부하고 단정 수립도 거부하면서 대안을 내놓지 못한 것은 애석해요. 정치는 대중보다 반 발짝 앞서 제기하고 그들의 정서를 따라야 하는 것이지, 너무 앞서나가면 국민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조급하면 실패합니다. 자유경제 아래서는 기업인의 창의와 모험심으로 경제를 역동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어요. 노동자 역시 양심적 기업인을 후원해야 한다는 것이 내 오랜 신념이기도 합니다.
김 의원 = 왜 우리가 독재 정권을 비판했습니까? 대중을 무시했기 때문이죠. 대중의 욕구는 항상 소수 특권층이나 엘리트에게 짓밟혀 무시됐고, 그 정책은 항상 반대중적 조치였습니다. 대중을 복지에서 소외시키면 대통령님이 말하는 대중의 생산 능력도 마비될 수밖에 없어요. 사회주의가 생산수단의 사회화에만 중점을 뒀다면, 이제는 기업운영과 이윤분배에서 사회화가 필요합니다. 노동자와 기술자를 자본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처우해야죠.
김 대통령 = 김 의원은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오?
김 의원 = 아닙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환상입니다. 이리를 쫓아내려다 곰을 불러들인 격이지요. 저는 혼합경제를 지지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한국적 혼합경제 말이죠.
김 대통령 = 그게 결국 관치경제 아닌가요? 예전에 압축 고도성장을 할 때에는 권위주의적 관치경제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요. 상당한 성과도 있었고. 그렇지만 관치경제는 ‘정부가 만능’이라는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심었어요. 사유재산권 같은 기본권을 무시해서라도 목표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식이죠. 대기업 규제를 염두에 둔 것 같은데, 그걸 사후적으로 억제하는 것보다는 경쟁질서를 확립해서 미리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게 바람직하죠.
김 의원 = 독재 정권에 탄압받았던 대통령님이 지난 대선 직전부터 개발독재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신 것이 저로선 흥미롭고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김 대통령 = 내가 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적 시장경제입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김 의원과 생각이 같습니다.
김 의원 = 아닙니다. 저는 대중을 우선시하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돼 있어야 시장경제도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같은 말인 듯하지만, 조금 다르지요. 대통령님 취임 이후, 지니계수가 1997년 0.399에서 1999년 0.437로 높아졌습니다. 빈부 격차도 커졌다는 뜻이죠. 대신 재벌 독점은 강화된 것 같군요. 하위 재벌들은 워크아웃됐지만, 현대·삼성 같은 5대 재벌의 시장 지배 품목 비중이 1998년 39.8%에서 1999년 45%로 높아졌습니다. 이런 수치들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김 대통령 = 나는 기업을 우선시하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권력 분산, 광범한 중산층 육성, 도시와 농촌, 그리고 공업과 농업의 건전한 관계를 만들어서 공동체를 회복해야지요. 그 공동체가 자유경쟁의 살벌함에서 인간성을 보호할 수 있어요.
김 의원 = 그것 보세요. 지금 대통령님은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되, 나머지는 공동체에 맡기자는 거잖습니까. 안 되죠. 국가의 모든 조세·금융·투자 정책은 어떤 국민도 절망과 저주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데 초점을 맞춰야지요. 경제는 국민 대중의 경제적 건강을 보호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김 대통령 = 이 늙은이를 너무 몰아붙이는군요. 요즘 나는 퇴임사를 고민하고 있어요.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며 살겠다”고 말할 겁니다. 나도 젊은 시절엔 이런저런 이념을 검토했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민족과 국가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민족주의자가 맞아요. 아까 말했지만, 나머지 문제는 국민의 생각보다 반 발짝 앞서가는 식으로 풀자고 생각해왔습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아마 그렇게 할 겁니다. 국민의 생각보다 늘 반 발짝 앞서갈 겁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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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으로 자격 있는 거야?” 묻고 싶은 건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