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생활 30년 만에 텔레비전에 처음으로 웃는 모습이 나왔다.”
1996년 문화방송 의 ‘이경규가 간다’ 코너를 연출한 김영희 PD는 당시 김대중(DJ)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에게 들었던 말을 이렇게 전했다. 그렇게 정치인 김대중은 딱딱한 이미지로 굳어져 있었다. 1996년 30분간 방송된 ‘이경규가 간다’는 독재 정권이 만든 김대중의 30년 이미지를 단숨에 뒤집었다. ‘이경규가 간다’ 팀은 당시 경기도 일산에 살았던 DJ의 집을 새벽에 무작정 찾아갔다.
다행히 DJ는 흔쾌히 촬영을 승낙했고, 마침 부부가 산책을 나가는 중이라 개그맨 이경규가 동행했다. 김 PD는 “1분도 사전에 상의한 적 없는 질문에도 유머 넘치는 답변을 해서 놀랐다”고 돌이켰다. 산책을 하면서 DJ 부부가 주고받는 농담은 이들을 비로소 ‘이웃집 할아버지·할머니’로 보이게 만들었다. 김 PD는 “방송이 나가고 난 다음에 유명한 개그맨이 ‘김대중씨가 빨갱이인 줄 알았는데 방송을 보고서 부드러운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고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DJ는 근엄한 선생님도, 빨갱이 투사도 아닌 ‘보통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당시 목요일 녹화가 끝나고 일요일 방송이 나가기 전에, 우여곡절도 있었다. 김 PD는 “당시 문화방송에 출입하던 안기부 직원이 방송사를 발칵 뒤집었다”며 “경영진·국장들이 녹화분을 보여달라, 내용이 무어냐 자꾸 물어서 곤욕을 치렀다”고 돌이켰다. 이미 녹화 사실을 김대중 총재 쪽에서 언론에 알려 차마 방송을 막지 못하는 상황이 됐지만, 어쨌든 방송의 파급 효과를 줄이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동안 정치인 김대중의 이미지가 딱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역으로 알려주는 일이었다. 김 PD는 “방송을 10분, 7분으로 줄이라는 얘기도 들었다”고 전했다. 결국 방송은 원래대로 30분 동안 나갔다. 이렇게 딱딱한 정치인 김대중을 개그맨 이경규가 인터뷰하는 역발상은 ‘선생님’의 이미지를 확 바꾸었다.
그리하여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DOC와 함께 춤을〉을 개사한 노래 〈DJ와 함께 춤을〉에 리듬을 맞추는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로 거듭났다. 보수 세력의 색깔론으로 붉게 덧칠됐던 이미지가 비로소 달라진 것이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부드러운 행보는 계속됐다. 대통령 취임식에 마이클 잭슨을 초대했고, 이희호 여사와 함께 오락 프로그램 등에 나왔다. 그렇게 문화를 사랑하는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대통령은 개그맨이 사랑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개그맨 배칠수는 문화방송 표준FM 의 ‘3김 퀴즈’ 코너 등에서 11년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 성대모사를 해왔다. 배칠수는 “고인은 자주 ‘에~’ 하면서 말을 잇는데 아마도 즉흥 연설을 많이 해서 생긴 버릇 같다”며 “11년 전에 그분의 성대모사로 개그맨이 됐다”고 돌이켰다. 이어 그는 “스치듯 만난 자리에서 고인이 먼저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며 “실제로 만나도 따뜻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당분간 그는 추모의 뜻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더구나 재임 시절엔 2002 월드컵 4강의 행운도 있었다. 이렇게 1970년대 독재 정권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정치인 김대중은 부드러운 통치자로 변해갔다. 그리하여 청년 김대중과 노년 김대중의 이미지가 조금은 다르다.
전 정권과 다를 바 없던 대미 관계·노동 정책386 이전 세대가 DJ를 사자후를 토하던 투사로 기억한다면, 386 이후 세대에게 DJ는 인자한 할아버지 이미지에 가깝다. 1987년 당시에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던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아직도 보라매공원 집회를 기억한다. 그는 “당시에 김대중 후보는 민주 투사, 김영삼 후보는 정치인 이미지에 가까웠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 그를 알았던 세대가 생각하는 느낌은 다르다. 지난해 청소년 기자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던 이건준(부산반여고3)군은 “성대모사 같은 걸로만 알았던 분을 만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며 “인터뷰가 끝나고 달려가 악수를 했는데, 연예인 만나는 것보다 짜릿했다”고 돌이켰다. 당시에 함께했던 옥다혜(부산외고2)양도 “‘햇볕정책이 퍼주기 정책이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불편한 질문에도 오히려 ‘관심을 보여줘 고맙다’는 말로 시작해 차분히 설명해줘서 정치인이 아니라 할아버지 같은 친근감이 느껴졌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두 명의 김대중이 있었다. 아니 여러 명의 김대중이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청년 김대중부터 보수 야당 총재를 지냈던 정치인 김대중을 거쳐 신자유주의 전도사로 비판받은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변신은 세상의 흐름을 좇아서 변해온 결과다. 장석준 진보신당 미래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세계사적 시간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온 여러 얼굴들”이라며 “다중인격보다는 오히려 미덕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해방 공간에선 좌우 합작을 추구했던 조선신민당 당원에서 건국 이후엔 자유주의 정당에 가담해 민주당 신파가 되었다. 장석준 실장은 “민주당 구파가 지주 세력과 연계됐다면, 신파는 신흥자본가 세력을 대변했다”며 “당시 그가 등에 기고한 노동문제 관련 글을 보아도 한국 자본주의가 어떻게 흘러갈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한반도를 넘어선 세계사의 나침반을 읽었단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인이 세상의 흐름 좇아 변한 것”이렇게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장고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정치인 김대중의 좌표는 변했다. 장석준 실장은 “신자유주의 김대중도 집권 이후에 갑자기 나온 변화가 아니다. 이미 80년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레이건의 초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며 “대외 개방론, 수출 입국론 등을 받아들인 결과가 에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이렇게 변화한 ‘DJ노믹스’는 집권 이후에 한국적 신자유주의로 나아갔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래서 평화인권 대통령이었지만, 노동정책은 보수적이었다는 평가가 따른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민주노총 대변인을 지냈던 손낙구씨는 “DJ는 인권 대통령으로 불렸지만, 노동권 등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사회권 개념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라는 사정이 있었지만, 정리해고가 법제화되고 비정규직 확대가 본격화된 것도 당시였다. 2009년 쌍용차 사태를 보면서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를 떠올리는 이들도 적잖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노동자는 사회의 기초가 되는 집단으로 노동운동을 배제하면 민주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며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대통령이 노동운동에 귀족 딱지를 붙이고 배제를 하니까 누구나 이들을 두드려도 되는 시대가 열렸다”고 비판했다. 실제 김대중 정권에서 구속된 노동자가 김영삼 정권 때보다 많았다.
미국에 대한 태도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주한미군 폭격장으로 쓰이던 매향리 소음 문제가 불거져도,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이 깔려 숨져도, 김대중 정부는 이전 정권과 별로 다르지 않은 대응을 보였다.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색깔론에 스스로 발목이 잡혔다”라고 말했다.
선비의 원칙과 상인의 감각을 동시에 품어이렇게 DJ는 장구한 세월을 다양한 얼굴로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두 가지 지표를 지키고자 노력해왔습니다. 하나는 ‘행동하는 양심’이고, 다른 하나는 ‘실사구시’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이란 서생의 희생정신이라 할 수 있고, ‘실사구시’라는 것은 상인의 현실감각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인간 김대중은 좌우로 흔들리는 한반도의 현대사 속에서 선비의 원칙과 상인의 감각을 동시에 품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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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은 그를 붙잡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주로 외국 방문기였다. 오정해씨는 “인터뷰하듯 자세하게 들려주는 얘기가 알아듣기 어려워 괴로울 때도 있었다”며 웃었다. 한번은 1시간 이상 이야기를 듣다 배가 고파 “저기 배고프지 않으세요?” 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이 잘못 알아듣고 “너무 늦었지. 어서 가라”고 해서 얼떨결에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정가에서 주례를 서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딱 한 번 그 원칙을 어겼다. 1997년 오정해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면서 언론의 관심이 뜨거웠다. 오정해씨는 “철부지라 몰랐는데 기사화된 것을 보고 엄청난 일을 저질렀구나 싶었다”며 “내가 누구라고, 몇 년 전 약속까지 지키며 이렇게 해주셨나 싶었다”고 했다.
동교동 집은 김 전 대통령을 만나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북적였다. 오정해씨는 “선생님은 그런 분들을 한 분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한번은 아침을 세 번 드시는 것도 봤다”고 회상했다. 노년의 김 전 대통령은 따뜻함이 넘쳤다.
김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에도 오정해씨는 그를 ‘대통령님’ 대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발길을 끊고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친분 있다며 나서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뵙는 것 자체가 민폐라 생각했다”고 했다. 그래도 직업이 국악인이라 공연을 통해 가끔 만났다. 오정해씨는 “선생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라 걱정만 하셨다”면서 “우리가 보낸 시간을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정치인으로 오해를 샀던 부분을 떠나 인간적인 그분의 모습을 알리고 싶었다”며 경황이 없음에도 기자의 전화에 답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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