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종합예술인은 아니지만 종합체육인이다. 야구면 야구, 축구면 축구, 피겨면 피겨 가리지 않고 즐긴다. 물론 대한민국 사람답게 그도 스포츠를 ‘하기’보다는 ‘본다’. ‘지식인’도 모르는 그의 스포츠 이력을 잠시만 돌아보면, 일찍이 중학생 시절에 머나먼 서울 종로까지 나가서 입장권을 예매한 다음에 88올림픽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여자핸드볼 결승리그 한국과 러시아 경기를 코앞에서 두 눈 부릅뜨고 보았다는 사실을 남모르는 자부심으로 20여 년 간직해왔다. 아, 어찌 잊으랴 그날의 감격을! 한국의 언니들이 러시아의 큰 언니들을 무너뜨리던 순간을! 이렇게 그의 민감한 사춘기는 독재정권의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에 ‘유린’당했지만, 그는 아직도 그 마수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비록 세파에 찌들려 이제 경기장에 가는 발걸음은 멈췄으나 88올림픽 꿈나무의 오래된 습관은 멈추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김한국, 올해로 꺾어진 일흔이다.
응원이냐, 비판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김한국씨의 3월은 아름다웠다. 미국에선 대학농구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토너먼트가 벌어지는 계절을 ‘3월 광란’(March Madness)이라고 부른다. 2009년 3월 한국씨의 3월은 미국의 마이클이 부럽지 않은 광란에 빠졌다. 축제의 계절은 야구로 시작해 피겨를 거쳐서 축구로 끝났다. 3월6일 아시아 예선 대만전부터 3월24일 결승전까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으로 즐거웠다. 가끔은 점심을 김밥으로 때우면서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을 이기고 멕시코와 베네수엘라를 꺾고 결승에 오르자, 나름의 스포츠 전문가 한국씨는 즐겁지만 기막혔다. 아니 벌써,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의 기적이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이러냔 말이다. 한국씨는 대표팀이 일본을 이기던 순간에 ‘태극기만은 제발 꽂지 말아주세요’ 짧은 기도를 했지만, 이승환의 노래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한국씨의 머리와 가슴은 이렇게 따로 논다. 그의 오래된 습관은 복잡한 반성을 부른다. 우리의 한국씨, 국기에 대한 경례는 ‘되도록’ 거부하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즉각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국민’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로 또다시 시험에 들었다. 연초부터 그의 올해 소망 중 하나는 김연아 선수가 ‘월드 챔피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언젠가 공공장소에서 김연아 선수 경기를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김연아 선수가 점프하는 순간에 몸을 가볍게 날려서 주변의 눈총을 받은 적도 있었다. 드디어 운명의 주말에,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죽음의 무도’가 끝나길 기다렸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세헤라자데’를 지켜봤다. 마침내 200점이 넘는 순간 그는 마치 브라이언 오서를 대신해 코치라도 된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며 “연아야…”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리고 시상식, 정말로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을 흘리는 김연아 선수를 보면서 그도 질끔 눈물을 훔쳤다. 진보 정당에 투표하는 한국씨는 어쩌나… 요즘엔 시상식에 올라가는 태극기만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난다. 역시나 그의 사춘기를 유린한 독재정권의 3S 정책 탓이라고 자위한다. 유행가 가사도 아니고,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니, 그대 나의 연아야~.
무릇 여왕님의 팬이라면 디시인사이드 김연아 갤러리로 향해야 하는 법. ‘은반의 여왕을 좇는 승냥이’를 자처하는 이들의 마음의 고향, 서로를 ‘횽’이라 부르며 팬심을 다지는 곳이다. 일은 둘째요 연아가 먼저인 한국씨는 회사에서도 틈틈이 갤러리에 올라온 ‘아사다 마오가 정신줄 놓은 사진’을 보면서 키득대고, WBC 결승에서 고영민 선수의 발을 잡아챈 나카지마 선수가 아사다 마오 선수의 다리를 잡아서 트리플악셀을 하다가 넘어졌다는 합성사진 ‘마오가 넘어진 이유’를 혼자만 보기가 아까워 동료에게 전달했다. 이렇게 잠시 정신줄을 놓았던 한국씨, 이치로 흉보기에 이어서 마오 미워하기가 마뜩잖다고 생각하지만, 도대체 저들은 어디서 저런 사진을 찾을까,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어서 한국씨는 축구를 보면서 ‘정신줄’을 놓는다. 월드컵 예선 남북한 경기, 이근호 선수가 결정적 찬스를 놓칠 때마다 “야아아~” 장탄식을 날린다. 종료가 가깝자 절망에 빠져서 “비기겠군” 혼잣말도 중얼댄다. 아, 그도 한때는 한반도기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조국 통일을 염원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주사파는 싫어해도 북한팀은 싫어하지 않았던 한국씨가 아니던가. 십수 년 동안 남북한 경기에서 차마 남한을 노골적으로 응원하지 못했던 한국씨는 이제는 편파 응원에 열을 올린다. 그의 경계심은 그렇게 고삐가 풀렸다. 경기가 끝나고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동료가 말한다. “(남북한이) 비겼으면 좋았을걸요.” 그제야 정신줄 잡은 한국씨, 어색하게 대답한다. “아, 예….”
이제껏 정말로 몰랐다. 광란의 3월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알았다. 한국씨 자신의 소속팀이 ‘스포츠클럽(Sports Club) 대한민국’이고, 자신은 열렬한 서포터란 사실을. 축구팬의 이야기를 담은 의 저자 닉 혼비가 잉글랜드 축구팀 ‘아스널 FC’에 평생의 열정을 바쳐왔다면, 한국씨도 각종 다양한 종목의 대표팀에 적어도 닉 못지않은 열정을 바쳐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다만 매번 선수가 바뀌고 종목이 바뀌니 그저 몰랐을 뿐이다. 그러니까 영국 리버풀의 스미스가 ‘FC(Football Club) 리버풀’의 팬이라면, 서울의 한국씨는 ‘SC(Sports Club) 코리아’의 서포터였던 것이다. 더구나 ‘SC 한국’에는 각종 다양한 종목이 일체 구비돼 있다. 2년마다 번갈아 열리는 동·하계 올림픽을 밤새워 보기도 벅찬데, 월드컵에도 꼬박꼬박 출전해주시니 예선까지 보려면 친구 만날 시간도 쪼개야 하고, 이제는 김연아에 박태환에 각종 세계선수권대회까지 놓치지 않아야 하며, 3년마다 찾아오는 WBC 명승부도 챙겨줘야 한다. 그러니까 종합스포츠클럽 한국의 종합체육인 한국씨, 국가대표 스포츠 일정만 좇아도 어느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
그러나 이렇게 스포츠만 즐기기엔 여전히 시절은 하 수상하다. 한국씨가 월드컵에 열광하고 올림픽에 한눈 파는 사이 ‘나이키 재벌’ 박연차 회장님께서는 5천원 아니 5천만원씩 금배지 단 분들의 주머니에 찔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씨는 매일 출근길에 버스 타고 지나는 용산에선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눈을 감는다. 이치로의 방망이질보다 잔인한 진압봉에 짓밟힌 철거민을 생각하면 스포츠 따위에 열광하는 자신이 밉다. 그래, 선현께선 종교가 인민의 마약이라고 하셨지, 지금은 스포츠가 마약이야, 내일이면 텔레비전 중계 앞에서 무너질 반성도 밀려든다.
이렇게 가끔은 무쓸모 반성도 밀려온다. 4천만 명 ‘SC 코리아’의 서포터가 일심단결 똘똘 뭉친 나라는 과연 괜찮은 것일까. 국방부 금지도서도 한두 권은 읽은 한국씨는 가끔 의문도 품지만 이내 기억을 더듬어 해답을 찾는다. 그가 언젠가 읽었던 글에는 “서구 사회는 노동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학교를 만들었지만, 한국은 국민을 만들기 위해 학교가 존재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렇군, 그래서 그들이 노동자 정체성을 가지고 공장에서 시작된 지역의 클럽을 응원한다면, 우리는 국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국가대표를 응원하는 거야. 그래 이건 내 탓이 아니야, 교육 탓이야! 노동자가 귀족정당을 찍는 풍토와 국가대표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과연 무관한 것일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의문을 애써 누른다. 이렇게 심란한 마음에 깜빡 잠에 빠진 한국씨의 꿈에 진중권 선생이 나타나 위로를 하신다. “독도도 양보 못하지만 야구는 더욱 양보 못한다!” 아, 야구는 야구일 뿐이라는 말씀. 잠에서 깬 한국씨, 스포츠 공화국에 태어나 즐겁고도 괴롭다고 햄릿처럼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응원이냐, 비판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데… 다음 월드컵 예선은 언제지? 이렇게 중독된 한국씨는 한반도 남쪽 어디에나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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