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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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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놀라지 않았다

- 우수성 인정받고 싶은 민족적 나르시시즘은 열등감의 발로, 경제와 스포츠는 ‘국가’를 매개로 끈끈한 결합
등록 2009-04-10 17:03 수정 2020-05-03 04:25

“열아홉 김연아 선수가 세상에 보여준 건 그저 피겨 요정의 화려한 몸짓이 아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용기였습니다.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더 큰 희망이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실린 어떤 기업의 전면 광고 일부다. 김연아의 우승을 즉각 ‘우리’로 연결시키고 결국 ‘대한민국’으로 환원한다. 나도 누구 못지않은 스포츠광이지만 국가대표 간 경기를 항상 민족과 국가의 코드로만 읽어내려는 한국 사회의 끈질긴 관성과 승리주의, 국가 간 경기에만 목숨을 거는 경향에 질리고 만다. 김연아 선수는 한국의 국가대표이지만 그의 세계선수권 제패는 우선적으로 김 선수 개인의 뼈를 깎는 노력과 탁월성에 기초한 것이다. 한 개인의 노력의 위대한 결실이라는 점에서 나도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즐거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아주 빼어난 선수이자 매력적인 인간이라는 점에서도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야지 그것을 자꾸 ‘대한민국의 희망’ ‘자랑스러운 한국인’ ‘2009 국민의 희망’이라는 식으로 국가적 차원의 사건으로 환원하려는 것은 ‘우리’가 국가주의의 블랙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10여 년 전의 경제위기 때 박세리 선수의 미국 US오픈 우승이 ‘국민에게 희망을 줬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되었다. “경기가 안 좋은 이때 국민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고 말이다. 별로 관계없는 두 영역, 경제와 스포츠는 ‘국민’을 매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3월17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WBC 일본전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모습. 사진 연합 /AP/DENIS POROY

3월17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WBC 일본전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모습. 사진 연합 /AP/DENIS POROY

“애국가가 울리자 연아는 눈물을 흘렸다”

‘국민’과 ‘피겨스케이팅’의 조합이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한 신문은 1면 상단에 굵은 글씨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연아의 두 볼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고 제목을 뽑았다. 왜 그의 승리가 애국가로 상징되는 국가에 의해 전유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김연아 선수가 눈물을 흘린 게 과연 애국가와 태극기 때문이었을까. 19살 소녀가 국가가 울려퍼질 때 가슴을 손을 얹은 것은 국기에 대한 경례 행위를 평상시에 반대해온 나로서도, 조금 안타깝지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눈물은 그간의 고생과 아픔이 한순간에 씻겨나가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닐까. (베이징올림픽 때 박태환 선수가 시상식에서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는 대신 두 손으로 꽃다발을 들고 있었던 장면은 내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별 의미 없는 우연이었는지 몰라도 말이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는 ‘국민’이라는 범주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장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한 의례는 운동선수들의 탁월성과 노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스포츠를 국가 간의 살벌한 경쟁으로 만들어버리면서 개인을 국가에 소속된 존재,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존재로 부각시킨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 결승에서 한국팀이 일본팀에 진 것을 보고, 김연아 선수가 아사다 마오 선수에게 ‘또 한 번의 한-일전’에서 ‘복수’할 것을 기대한 일부 네티즌의 소망은 국가대표 간 경쟁을 국민 간의 싸움으로만 읽어내려는 국가주의·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전방위성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국적을 떠난 개인들의 연대를 어렵게 하고 여러 내부적 모순, 특히 계급적·젠더적 격차를 지워버림으로써 특권적 블록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만다. 더구나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국가 브랜드’ 효과를 얘기할 때는 스포츠 안에 국가주의뿐만 아니라 재벌기업들의 실리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던 날 저녁의 뉴스는 맨 첫머리에 그에게 무려 여덟 꼭지를 할애했다. 금메달 소식은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더구나 피겨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스포츠다) 대단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지만 뉴스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의 중요성을 갖는 것일까. 한국인에게는 피겨스케이팅에 관한 관심은 거의 없고 오로지 그것을 도구화함으로써 지탱되는 국민·국가 의식 과잉이 있을 뿐이다.

영어 유창한 의사 봉중근, 영어 못하는 이치로

WBC 2차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한국 야구팀에 대한 보도에서도 애국주의는 넘쳐났다. 사람들을 감동시킨 김인식 감독의 어록 중에서 “국가가 있어야 야구가 있다”는 명언은 스포츠가 미학적이고 절제된 운동임을 넘어 거기에 국가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3년 전 제1차 대회에서 서재응 투수는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번에도 그런 의식은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영화 를 패러디한 ‘태극기를 꽂으며’가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꽂는’ 행위는 남성 중심적인 성정치를 암시한다. 더구나 ‘18살의 가냘픈 소녀’에 열광하는 데는 성적 매력과 외모에 이끌리는 남성적 페티시가 숨어 있지 않을까.

2009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응원단의 두 모습.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장년층(맨 왼쪽)과 ‘김연아 ’를 응원하는 청년층 응원단. 사진 연합 황광모

2009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응원단의 두 모습.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장년층(맨 왼쪽)과 ‘김연아 ’를 응원하는 청년층 응원단. 사진 연합 황광모

WBC 대회 준우승이나 김연아 선수에 대한 보도에서 넘쳐나는 것은 “세계가 놀라다” “세계가 매혹되다” “한국의 저력” “세계가 주목하다” 같은 문구다. 사실은 한국인의 욕망과 다르게 세계는, 일본과 한국을 제외하면, 놀라지도 않았고 크게 주목하지도 않았다. 본선이 열렸던 미국에서도 1단 기사에 그쳤다. 군소 언론, 온라인 신문 및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만이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경기에도 무관심했던 미국 사회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오류다. 김연아 선수에 대한 보도도 거의 매일 열리는 미국 프로농구에 한참 뒤처져 나왔다. 이러한 착각은 평소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민족적 나르시시즘이 작동하는 데서 나온다. ‘한국인의 우수성과 저력’을 국제사회가 인정하길 바라는 욕망은 사실은 열등감의 발로다. 국제 무대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면 이러한 ‘인정 콤플렉스’는 불필요하다. 불안감이 강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한국인이, 특히 한국 국가대표가 선전하면 세계가 주목한다는 민족적 자아도취에 쉽게 빠지고 만다. ‘봉중근 의사’가 발견되고 영어를 못하는 이치로와 대조적으로 영어로 ‘유창하게’ 심판과 대화를 나눈 그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는 얼마나 자기만족적인가. (이치로가 좀 ‘얄밉기’는 하지만 무슨 민족의 원수인가. 그가 영어를 못하는 게 죄악인가.)

또 하나의 문제는 WBC 대회에서 일본에 ‘분패’한 뒤 보여준 한국 언론의 태도다. 경기에서 패배했다고 감독이나 선수들을 질타하기보다는 “그대들이 있어서 행복했다”는 위로형 보도가 주축을 이뤘다. 패배에 대해 별 비판이 없었던 것은 한국팀이 선전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이 성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칭찬과 격려의 이면에는 상처받기 쉬운 한국인을 미리 달래려는 무의식적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상처를 그대로 두면 사회적 불만이 가시화되고 그 결과 기득권층의 질서는 위협을 받는다.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기에 언론은 자위적 보도를 일삼는 것이다.

국가주의 환기하는 국기 게양 없어져야

민족국가가 존재하는 한 국가 간 스포츠 경쟁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것을 국가주의적으로 환원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대회에서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를 없애야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특히 한국 사회는 국제경기보다 국내의 프로리그, 비인기 종목 및 사회체육에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언론홍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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