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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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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왜 이리 ‘괴물’이 많죠?

시스템 없는데 홀연히 나타나는 ‘기적’들,
괴물에겐 ‘중산층’의 ‘개인경기’라는 새로운 공식이…
등록 2009-04-09 18:46 수정 2020-05-03 04:25

언젠가 탄식한 적이 있어요. 2006년 말에 김연아 선수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첫 우승을 했을 당시 에 연재하던 ‘스포츠 일러스트’에서 “정말 이 나라엔 기적도 많군!”이라고 장탄식을 뱉었지요. 기적은 자고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보다 드물어야 마땅한 법이나, 한반도 스포츠엔 ‘기쁘다 그분 오셨네’ 승전가 울리는 날들이 끊이지 않아요. 아, 광란의 춘삼월! 김인식 마술사의 ‘위대한 도전’에 이어서 김연아 여왕의 백조가 되고픈 ‘거위의 꿈’이 심금을 울렸지요. “그래요~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아무렴 믿고 말구요. 이렇게 번번이 현현하는 기적 앞에서 어찌 배교도가 되겠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한반도 생태계, 아니 체육계엔 이렇게 개천에서 용이 나는 전설이 끊이질 않아요.

베를린 올림픽의 손기정,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뛴 차범근, US여자골프대회에서 우승한 박세리, 제1회 WBC 대회에서 미국을 꺾은 야구 선수들,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포효하는 박태환, 괴물의 계보는 이렇게 유구하다. 사진 왼쪽 위부터 한겨레 자료·한겨레 자료·AP 연합/ 아래 왼쪽부터 연합 김주성·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베를린 올림픽의 손기정,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뛴 차범근, US여자골프대회에서 우승한 박세리, 제1회 WBC 대회에서 미국을 꺾은 야구 선수들,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포효하는 박태환, 괴물의 계보는 이렇게 유구하다. 사진 왼쪽 위부터 한겨레 자료·한겨레 자료·AP 연합/ 아래 왼쪽부터 연합 김주성·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불모의 땅, 불굴의 정신으로 ‘자수성가’

‘무한도전’의 태초에 손기정 선생이 있었지요. 식민지 청년의 설움을 ‘자바라를 잡고서’ 훌쩍 날려버린 그분 이래로 기적의 역사는 시작됐어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꿈꾸는 일본이 무한투자로 어렵게 이룬 꿈들을 대한의 ‘용자’들은 홀연히 나타나 가뿐히 넘어버렸어요. 일본이 백년지 대계로 기타지마 고스케의 올림픽 평영 금메달을 ‘만들면’ 박태환 선수가 홀연히 나타나 자유형 금메달로 무색게 만들었죠. 일본수영연맹이 동양인 체형에 덜 불리한 평영 영법을 파고파도, 괴물 같은 박태환 앞에선 백년 공부가 반쯤은 ‘도로아미타불’인 거지요. 수영에 동양인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욕망이 담겼다면, 피겨엔 동양인의 스타일 콤플렉스를 뛰어넘고 싶은 환상이 들었어요. 역시나 일본빙상연맹이 불철주야 노력했죠. 아사다 마오 앞에는 2006년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아라카와 시즈카가, 1989년 세계선수권자 이토 미도리가 있었지요. 그러나 김연아 앞에는 김연아 없고, 박태환 전에는 박태환이 없었죠. 야구도 뒤지지 않아요. 5천 개 고교팀 일본에 50개 한국이 맞장을 뜨니, 일당백의 신화지요. 이렇게 한반도의 ‘괴물’들은 족보도 없이 홀연히 나타났어요. 정말로 한강엔 괴물이 살까요? 그럼요, 믿습니다! 믿고말구요!

2009년에 은반의 기적이 있다면, 1998년엔 녹색의 기적이 있었어요. 외환위기의 도탄에 빠진 한반도에 희망을 쏘았다던 박세리 선수가 있었죠. 사장님의 “나이스 샷!”으로만 알았던 골프로 단숨에 국민 영웅이 됐잖아요. 박세리 뒤에는 아빠가 있었죠. 불타는 교육열을 불타는 골프열로 변주한 아버지의 창의력 덕분에 박세리는 세계 정상에 섰다고 하지요. 그리고 한국인은 배웠어요. 잘 키운 골프 선수 딸 하나 열 판검사 아들 부럽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죠. 이제 박세리는 일가를 이뤘어요. 아직 미혼이지만, 박세리 키즈가 있잖아요. 당시 초딩이었던 신지애 같은 키즈들이 어느새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순위판을 점령하고 있잖아요. 김연아의 ‘피겨맘’도 아시죠? 아, 지금도 어디선가 김연아 키즈들이 점프하다 넘어져 울고 있겠군요. 잠시 샛길로 샜네요. 사자성어로 요약하죠. 한국의 스포츠 스타들은 불모의 땅에서 불굴의 정신으로 ‘자수성가’한다. 물론 맹자 모친 뺨치는 부모가 있지요. 이들은 강남 대치동 사교육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자녀의 재능에 ‘싹수’가 보이면 ‘올인’하는 가족사업을 벌이지요. 그렇게 한국의 괴물은 가족의 헌신으로 태어나요. 왠지 고시 공부하는 형을 위해서 공장에 다니는 동생들이 희생하는 쌍팔년도 드라마도 생각나요. 이렇게 스포츠 역사는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를 재방송하지요. 자, 다음은 배고픈 임춘애에서 우아한 김연아까지, 다이내믹 코리아!

열 명 이동국보다 한 명 김연아

피겨여왕에 골프여제라니, 과거의 한국인이 언감생심 꿈이나 꿨나요. 그러나 거위의 꿈은 백조의 현실이 됐어요. 기적의 증거는 많은데 기적의 이유는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이런 얘기가 있어요. 저변도 없는데 대박이 터지는 이유를 정희준 동아대 교수(스포츠과학부)는 “선수를 가혹한 훈련으로 몰아가는 풍토에 일단 운동을 시작하면 운동만 하는 여건, 그리고 부모의 투자”라고 말해요. 가족·학교·코치의 삼각동맹이 만든 성과이자, 운동을 하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상한 나라’의 결과란 것이죠. 그런데 말이죠. 어느덧 배고픈 임춘애가 최고의 선수가 되기는 어려운 시절이 됐어요. 피겨나 골프나 한 달에 수십만원이 들어가는 ‘교육비’가 없으면 시작도 어렵죠. 어느 중산층 부모가 남들이 과외비로 쓰는 돈을 우리는 훈련비에 써보자, 결심해야 가능한 일이죠. 예컨대 올림픽 금메달을 줄줄이 따는 쇼트트랙 선수들도 중산층 출신이 많아요.

이렇게 ‘패밀리 비즈니스’가 성공하면 달콤한 결실도 따르죠. 물론 외국에도 테니스 윌리엄스 자매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한국의 ‘골프 파더’만큼 흔하진 않아요. 어두운 얘기도 해야죠. 오직 금메달만 찬미하는 승자독식 풍토에서 약육강식·적자생존·이판사판 같은 자본주의 경쟁 논리를 스포츠를 통해서 학습하는 효과도 부인하지 못하죠. 스포츠를 좋아하는 여성주의자 이김나연씨는 말해요. “스포츠가 외형적으로 갖는 중립적 가치 안에서 자본주의적 경쟁의 부정적 요소를 은폐하고, 가족의 헌신을 찬미하면서 더욱 강력해진 가족주의를 미화한다.”

다시 속담 패러디요. “열 명의 이동국보다 한 명의 김연아가 낫다.” 정윤수 스포츠 평론가의 말인데요, 단체종목 선수보다 개인종목 선수가 좋은 이유를 뜻해요. 개인종목 선수는 팀의 구속이 없으니 광고를 통해서 대박을 터뜨리기 더욱 쉽다는 거죠. 일찍이 박세리 효과로 학습이 됐잖아요. 그러니 이제는 개인종목이 화수분인 거죠. 이것은 아프리카 축구 선수들, 중남미의 야구 선수들은 누리기 어려운 고국의 선물이죠.

그러나 지금까진 애국가 덕분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괴물의 탄생이 이어졌지만, 괴물의 지속 가능성은 장담하기 어려워요. 시스템에 바탕한 ‘또 다른 아사다 마오’가 나올 가능성은 높지만 ‘또 다른 김연아’가 또 나올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죠.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학)는 “백남준이 왜 외국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었냐”며 “다른 분야도 뛰어난 이들이 성공할 생태계가 한국엔 마련돼 있지 않아 개인이 돌파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해요. 기적의 일상화가 이런 현실을 잊게 한다는 것이죠. 그래도 박세리 키즈 같은 역증거도 있으니 무어라 장담하긴 어려워요.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 차범근 같은 탈아시아 괴물이 왜 한국에서 나왔냐는 의문도 있어요. 한국판 괴물의 계보는 유구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아시아 축구계 최고의 전설인 차범근을 최고의 현역인 박지성이 잇고 있잖아요. 일본·사우디아라비아·이란도 만만치 않은데 왜 하필이면 한국이냔 거죠. 조금은 ‘불편한 진실’인데요. “다른 아시아 선수에 견줘 한국 선수의 체격이 조금은 좋다”고 이유를 꼽는 이들이 적지 않아요. 지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 선수가 “조선 사나이의 장대한 기골” 운운했다잖아요. 홈런을 뻥뻥 날리니까요. 그래서 한국 야구를 ‘스몰볼+롱볼’이라고 하지요. 일본이 원조인 스몰볼에 호쾌한 장타를 때려대는 롱볼을 더했단 거지요.

아시아 선수로서는 무시무시한 체격

김성원 〈IS 스포츠〉 기자는 “우리에겐 일본뿐 아니라 미국도 따라가야 할 모델이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하더군요. 수영 금메달이 평영이 아니라 자유형에서 나온 것도 이런 특성과 무관해 보이진 않아요. 차범근 선수도 당시 아시아 선수로는 무시무시한 체격과 체력을 갖췄죠.

재일동포 축구칼럼니스트 신무광씨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서도 이렇게 말해요. “일본 (축구) 선수들이 해외 유학 가듯이 해외 진출을 한다면, 한국 선수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간다.” 유럽에 진출한 선수들 인터뷰에서 한국 선수들은 한결같이 “이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일본 선수들은 “훌륭한 기술을 배워서”라고 말한대요.

이렇게 불편한 진실까지 동원해도, 왜 괴물이 한강에 자주 출몰하는지를 설명하긴 어려워요. 변명을 하자면, 원래 설명되지 않는 것이니까 기적이죠. ㅋㅋ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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