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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일 전쟁’ 일본은 ‘한국 타도’

다섯 번의 WBC 한-일전을 현지 취재한 일본 기자의 기고, 언론이 ‘국가’ 문제 부추겨
등록 2009-04-07 11:16 수정 2020-05-03 04:25
일본공산당 기관지 (赤旗)의 스포츠 담당 기자가 최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이어진 한-일전에 대한 일본 내의 반응과 이를 바라보는 개인적 소회를 밝혀왔다. 편집자

도쿄, 샌디에이고, 로스앤젤레스. 무대를 바꿔가며 5번이나 맞붙었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일본과 한국. 그 모든 경기를 현지에서 취재했다. 우선 3월7일 도쿄돔. 4만5천 명을 넘는 대관중 속에서 치러진 한-일전의 결과는 일본의 콜드게임 승. 일본 매스컴의 보도에서는 이번 한국 대표가 베이징올림픽 때보다 전력적으로 약세가 아닌가 하는 논조가 눈에 띄었다. 현장에서의 분석은 조금 달랐다.

일본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경기 뒤 기자회견에서 “오늘 한 번의 시합으로 한국이 벅찬 상대라는 의식을 불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의 김인식 감독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며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사무라이 재팬, 화이또!” 지난 3월24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 경기에서 연장 접전 끝에 일본 대표팀이 한국팀을 5 대 3으로 이기고 우승을 확정짓자 도쿄의 한 패스트푸드점에 모여 있던 일본 야구팬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 연합/AP/ ITSUO INOUYE

“사무라이 재팬, 화이또!” 지난 3월24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 경기에서 연장 접전 끝에 일본 대표팀이 한국팀을 5 대 3으로 이기고 우승을 확정짓자 도쿄의 한 패스트푸드점에 모여 있던 일본 야구팬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 연합/AP/ ITSUO INOUYE

결승전 순간 시청률 50% 넘어

역시나, 3월9일 도쿄 라운드 조 1위 결정전은 한국이 투수진의 호투로 1 대 0 승리. 특히 메이저리그 출신 왼손 투수 봉중근의 완급을 조율하는 투구는 대단했다. 하라 감독은 “상대 투수가 좋은 상태로 던지면 받아칠 수 없다. 아시아의 대표로서 두 팀은 다음 라운드로 나아간다. 서로 아시아의 야구를 세계에 알려나가고 다시 한국과 싸우게 된다면, 가슴과 가슴을 부딪쳐 안으며 당당하게 승부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미국으로 경기장을 옮겨서도 한-일 대전이 계속되는 상황을 보며, 같은 대회에서 몇 번이고 싸워야 하는 시합 형식에 일본에서도 의문과 비판이 나왔다. “마치 일본 시리즈 같다”는 야유성 기사도 있었다. 이렇게 결승전을 포함한 5번의 대결, 이래가지고서야 양 국민도 더더욱 들뜰 수밖에 없다.

이번 WBC는 텔레비전 시청률도 남달랐다. 평일임에도 TV 평균 시청률은 36.4%. 결승전의 순간 최고 시청률은 50%를 넘었으며, 휴대전화로 시청한 사람이 4명 중 1명꼴이었다. 한 신문 칼럼에서는 휴일보다 더 벌떼처럼 새까맣게 거리 모니터에 모여든 사람들, 모든 매스컴에서 연일 ‘사무라이 재팬’(일본 야구 대표팀의 애칭)의 모습을 세세히 보도하는 열기 뒤에 숨은 무서운 면도 지적했다. 한국 미디어는 ‘한-일 전쟁’이라 표현하고, 일본의 스포츠신문에는 ‘한국 타도’라는 표제가 뛰쳐나온 것이다.

샌디에이고 한-일전이 끝난 뒤 준결승 진출 티켓을 딴 한국 선수들이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것은 패자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일본에서는 ‘태극기 굴욕’이라고 보도됐다. 평소 침착하게 프로야구 중계를 하는 〈TBS〉의 아나운서도 “사무라이 재팬은 이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멘트를 할 정도였다. 한-일전이 있는 날이면 서울특파원이 한국팀의 응원 상황과 경기에 대한 관심 등을 전해 일본의 분발을 촉구하는 양상도 보였다. WBC 2연패라고는 하나, 당일 아침은 물론 이후 며칠 동안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사무라이 재팬’의 무용담으로 도배됐다.

물론 결승전에서 한국팀이 9회에 한 점을 보태서 동점을 만들고 경기를 연장으로 이끈 부분에서는 “역시 한국팀은 저력이 있다”며 실력을 깨끗이 인정하는 모습이 일본에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것은, 대열전이었던 결승전 뒤 그라운드 위에서 양쪽 선수들이 서로의 건투를 바라는 모습이 없었다는 점. 전력을 다한 선수들이 서로 야구의 동료로서 악수를 나누며 어깨를 안아줌으로써 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마무리 장면이 흘렀어야만 했다.

김연아 ‘연습 방해’ 발언 해프닝

애초 일본 야구대표팀의 애칭은 감독의 이름을 따서 정한다. 이번 대표팀은 ‘하라재팬’이라고 불러야 했다. 그런데 이번엔 ‘사무라이 재팬’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것은 용감무쌍함이나 팀의 승리를 위한 자기희생 정신 등을 강조하는 의도가 있지만, 스포츠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디어는 ‘사무라이’ 일색이었다. 또 한국전에서 부진했던 선수를 인터넷상에서 ‘전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일본의 스포츠 미디어는 특정 상대나 경기에 국한하지 않고 시합에서 특히 부진하거나 실수를 범한 선수에게 ‘전범’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원래 ‘전범’이란 침략전쟁을 일으키거나 적병과 포로를 비인도적으로 대우하고 민간인 살상 등을 저지른 이들을 일컫는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스포츠 세계에 가져오는 면에서 일본 스포츠미디어의 선동 경향과 몰이해가 있다. 스포츠를 전쟁에 비유하는 예로 ‘전범’ 이외에도 ‘육탄전’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부대장’ ‘핵탄두’ 등의 표현을 볼 수 있다. 스포츠는 본래 경기를 통해 우호와 친선을 키우는 것으로, 상대는 무찔러 쓰러뜨려야 하는 ‘적’이 아니라 같은 경기에 정열을 쏟아붓는 ‘동료’다. 그 본질이 아직도 이해되지 않고 있다.

언론이 한-일 대결을 부추기는 가운데, 일본에서도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이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이다. 대회 전에 “경쟁 상대 선수에게 시합 직전에 연습을 방해받았다”는 ‘연아 발언’이 보도됐다. 한국의 미디어가 이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일본 선수로 단정하는 바람에 한국 국민의 심한 비난이 일본 선수에게 쏟아졌다. 이것을 인터넷으로 본 일본 팬들로부터 “즉각 항의해야 한다”는 전화와 전자우편이 일본스케이트연맹에 쇄도했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 본인도 한국스케이트연맹도 “특정 나라나 선수를 명시한 것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선수가 조우하는 상황을 말하려 했다. 우리들은 이러한 오해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회답했다. 이는 명백하게 미디어 쪽이 오해를 이끌어낸 것이다.

김연아가 한국의 국민적인 인기 선수라는 것은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다(밝은 성격에 해맑은 마오가 일본에서 인기가 있지만 ‘국민 여동생’ 정도까지는 아니다). 주니어 시절부터 점프가 장기인 마오와 표현력이 풍부한 연아, 서로 절차탁마할 수 있는 좋은 라이벌로 보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한 사람의 스케이터가 큰 기술로 세계 정상에 도전해나가는 것은 호의적으로 볼 수 있다. 김연아도 마오도 “자신을 자극하고 성장시켜준 존재”로 서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 좋은 관계를 이번의 보도 행태가 망가뜨렸고, 김연아 선수 자신도 상처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 내에서도 호의적이었던 김연아 선수의 이미지가 다소 변한 게 사실이다. 스포츠 보도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상당히 유감이다.

국경을 넘는 것이 스포츠의 가치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다. 그것이 스포츠의 세계다. 이겼으니 모든 것이 좋고, 졌다고 다 나쁜 것이 아니다. 일본에는 예로부터 “이겼다고 오만 말고, 졌다고 기죽지 마라”는 격언이 있다. 김연아의 우승이 결정된 뒤, 대부분의 일본 미디어는 그의 안정된 연기를 칭찬했다. 마오가 쇼트프로그램에서 시동이 늦게 걸렸고, 프리에서도 넘어져 큰 차이를 내고 만 것도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수들의 퍼포먼스와는 별도로,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은 것도 사실이다.

한국인의 가슴속에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해 식민지배한 현대사의 아픔이 있다. 일본의 집권 여당이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것도 양국 관계를 위험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스포츠의 세계에, 이러한 국민감정이나 정치 문제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 국경·종교·정치·사상·신조를 넘어서 같은 필드에 서는 것이 가능한 것이 인류의 유산으로서 스포츠의 가치다. 일본에서는 이전과 비교해 선수에게 ‘국가’를 짊어지게 하는 것은 옅어졌지만, 미디어가 이를 부채질하는 경우는 매우 많아졌다.

일본과 한국은 스포츠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아시아의 라이벌이다. 한국 선수들이 일본전을 특별히 의식하고 있는 것도 안다. 일본 선수에게는 그 정도의 특별한 의식은 없지만, 시합을 하다 보면 상대방 감정의 격함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맞춰 일본 선수 역시 감정이 격해지는 경향도 있다. 그 때문에 주변에서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난질처럼 양자의 대립을 선동하는 것은 당사자인 선수를 비롯해 양 국민과 스포츠 자체를 상처내는 일이 될 것이다.

시로타 유키히로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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