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제품 성능 높이며 일상에 깊숙이 침투… 물성 바꾸는 나노 구조물 산업화 여부 불투명
미국의 화학회사 듀폰사는 ‘화학을 통한 더욱 나은 삶을 위한 더욱 나은 제품’이라는 기업 슬로건으로 세계적인 화학회사 반열에 올랐다. 수십년 동안 섬유와 플라스틱은 듀폰의 전부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섬유와 플라스틱은 듀폰의 핵심사업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다. 이미 섬유 부분에 대한 매각이 끝났고 화학 플라스틱은 식물 원료를 이용한 분해성 플라스틱을 개발하고 있다. 대신 자회사인 듀폰 티태니엄사에서 나노파우더(Titanium Dioxide nanopowders) 특허권을 사들여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이 물질은 100nm(1나노미터: 10-9m, 1m의 10억분의 1) 이하 크기로 햇빛 차단·화장품·코팅 등에 쓰인다. “작은 것들이 아름답다”는 화두가 첨단산업의 슬로건으로 자리잡는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도대체 나노기술이 뭐기에 오랜 전통을 폐기하고 맨땅에 헤딩을 하려는 것일까.
“나노를 통해야 첨단기술에 이른다”
21세기 신기술은 나노기술을 통해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로마를 통하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 수 없었던 것처럼 작게 생각하지 않으면 첨단기술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전에 재료공학자·유기화학자로 불리던 연구자들이 미시 세계 개척자로서 작은 것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나노의 방주’에 서둘러 들어서고 있다. 나노의 방주에는 화학뿐만 아니라 물리·생물학·공학 등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들은 혜성처럼 등장한 나노라는 화두를 중심에 놓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기술의 향방을 결정하고 있다. 나노기술이 열려라 참깨식의 마술적 주문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전능의 신 노릇을 하는 나노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다른 기술에 놀라운 능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종교인들이 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듯 일상적 기술이 나노를 통하면 황금알을 낳는 신기술로 거듭나는 것이다.
세계 각국은 나노기술을 국가적 연구과제로 채택해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은 빌 클린턴이 나노기술계획(NNI)을 발표해 2000년 1월부터 정부부서 관련 프로그램으로 나노기술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12월3일 조지 부시 대통령은 나노기술 연구 개발에 앞으로 4년간 모두 37억달러를 지원하는 ‘21세기 나노기술 연구개발법’에 서명했다. 우리나라도 나노기술에 대한 기대가 각별하다. 2010년까지 나노기술 선진 5개국 진입을 꾀하며 2002년 12월에 나노기술개발촉진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비교우위 기술을 중심으로 2010년까지 총 1조5천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나노기술 강국을 지향한 나노기술발전시행계획’에 따르면 과학기술부를 총괄기관으로 교육인적자원부·국방부·산업자원부·정부통신부 등 8개 부처가 공동으로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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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노기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제품은 아직까지 제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나노 연구자가 크린룸에서 나노 제조 공정을 살펴보고 있다.(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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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기술은 정보기술·생명기술·우주항공·환경기술 등 다른 분야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나노기술을 기반으로 다른 분야에서 핵심기술이나 주요 공정과 소재 등을 개발할 수 있다.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혁명적 기술로 대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온갖 분야에서 뚜렷한 비전도 없이 나노를 내세우며 발빠르게 대응하는 것인지 모른다. 과학기술부 21세기 프런티어 나노소재기술개발사업단 서상희 단장은 “나노기술이 첨단기술의 혁신을 일으켜 기존 기술의 한계를 극복할 것이다. 실용화에 성공한다면 경제성장을 주도하겠지만 그 시기는 앞으로 10여년이 지나야 가능하다. 현재 나노를 내세운 상품은 기초 연구 성과에 바탕한 초보적인 성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미국 과학재단이나 일본 히타치 등은 2010년 무렵의 나노기술 시장 규모를 1조달러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상품화 걸음마 단계… 관건은 나노 구조물
사실 나노 열풍이 몰아치기 전부터 나노기술은 일상생활에 들어와 있었다. 전자공학 분야에서 디스크 드라이브의 헤드로 사용되는 거대자기저항(GMR·Giant Magneto Resistance)은 나노기술 응용의 대표적 사례이다. 자기 저장 매체들은 나노기술에 비롯된 ‘픽시먼지’(Pixie Dust·동화 <피터팬>에 나오는 팅커벨의 요정가루에서 나온 말)라는 물질을 사용한다. 이전 것보다 훨씬 민감한 자기 저장 매체는 연간 수십억달러 규모의 시장을 형성했다. 하이테크 숯검댕으로 불리는 나노 크기의 탄소가루 입자들은 100여년 전부터 타이어의 보강 첨가제로 쓰였다. 자연계는 나노의 표본실이라 할 만하다. 수십억년 이전부터 자연은 나노구조물로 생명현상을 보여주었다. 분자 수준의 생화학적인 현상을 이용해 DNA에 기록된 정보를 생물학적 프로그램에 따라 단백질을 만들어 생명체를 생성·조절·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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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 제품을 업그레이드하는 나노 관련 제품들. 이들은 나노 입자를 이용해 침투력을 높이고 항균 · 살균력 등을 높였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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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나노 세계에 진입하는 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나노기술을 한마디로 말하면 나노 크기로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노 크기의 구조체가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1nm보다 1천배 이상 큰 마이크론 크기(1m의 100만분의 1)의 구조체를 다루는 정도이다. 지금의 마이크로 전자공학은 폭이 100nm의 미세한 구조물을 제작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이는 머리카락의 1천분의 1 정도로 일상적인 표준이 되는 것들보다 훨씬 미세하다. 하지만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보자면 더욱 가늘어져야 한다. 직경 100nm의 와이어는 실리콘 원자 500개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나노기술은 물질을 100nm 수준에서 다뤄야 하며, 분자 구조의 물리·화학적 특성들을 완벽하게 제어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나노물질을 서로 결합해 구조물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나노기술의 실용화 가능성 여부이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수명을 무드셀라(900년 넘게 살았다는 성서 속의 인물)에 가깝게 연장하고, 설탕 분자 크기의 로봇 군단이 자기복제를 통해 대량 학살을 감행하는 식의 나노기술은 창조적 영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원자나 분자를 레고블록 쌓듯 하나씩 쌓아 올리거나 자기 조합에 의해 나노 단위의 세계를 제어하고, 이를 기반으로 극한에 이를 정도로 미세한 회로를 만들어내는 것조차 버거운 현실이다. 테라급나노소자개발사업단 이조원 단장은 “나노기술은 퓨전과학이라 할 수 있다. 독자적으로 성장한 개별과학을 바탕에 두고 이를 응용 융합했을 때 나노기술이 위력을 발휘한다. 첨단과학이 나노기술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노기술을 통해 초고집적도 반도체도 제작하고 개인의 건강도 챙길 수 있으리라 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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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노 기술이 다루는 미시세계 (자료: <10의 제곱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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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혁명적 변화 예고하는 퓨전과학
이렇듯 나노기술이 놀라운 가능성을 지닌 것은 우리가 모르는 신천지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노 세계는 개별적 원자와 분자의 영역 그리고 거시세계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물질의 특성이 나타난다. 나노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은 1980년대에 단일 분자와 원자의 영상을 보여주는 주사형터널링현미경(STM)과 원자력현미경(ATM) 등의 도구가 개발되면서 열렸다. 스위스 취리히의 IBM 연구소는 마이크로칩에 1천개 이상의 연결 장치가 달린 미세한 나노미터 크기의 탐침을 보유해 나노 세계에 깊이 다가서고 있다. 이처럼 세계적인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한계에 이른 실리콘 기반 전자공학을 대체할 나노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요즘 주목받는 나노압인(Nanoimprinting) 기술로 회로를 찍어내고 설계하면 기존의 미세식각기술(Lithography)보다 저렴하면서도 성능은 월등한 초고집적 칩을 만들 수 있다.
나노기술은 디지털 세상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의학혁명에도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한톨의 쌀에 100만개 정도 들어가는 탄소분자가 인체에 들어가 암과 에이즈 등 난치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이 탄소분자는 60개의 탄소원자로 이뤄진 원형 구조물로 약물을 담아 병든 세포를 향해 날아간다. 이전의 약물이 융단폭격식으로 무차별적으로 인체에 살포돼 멀쩡한 세포까지 괴사시킨 데 비해, 나노 약물은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한 JDAM(합동정밀직격폭탄)처럼 목표물에 꽂히는 걸 목표로 삼는다. 캐나다 토론토의 C 식스티는 ‘풀러린’(fullerene)이라는 ‘스마트 약물 전달 시스템’을 개발했다. 풀러린에는 유도 시스템으로 사용되는 항체가 있어 암세포의 화학신호를 탐지해 인체 투입 과정에서 파괴되지 않고 정확하게 치료 부위에 전달된다. 이런 나노 약물은 전기 펄스를 사용해 피부에 고통 없이 주입되거나 에어로졸 형태로 폐 깊숙이 도달하도록 설계됐다. 미국 칩알렉스사가 개발한 체내 이식 칩 나노셀(nanoshell)은 미세한 전류를 이용해 체내에서 약물을 투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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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노기술의 환상여행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정서영 박사팀은 국내 최초로 먹는 인슐린 ‘나노 큐비클’을 개발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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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나노 세계가 ‘멋진 신세계’가 되리라고 확신하기는 이르다. 나노구조물은 나노튜브를 감싸는 분자에 따라 물질의 특성이 바뀐다. 예컨대 나일론 분자를 나노튜브 표면에 붙이면 비행기 외장제, 낙하산 등을 강화시키는 유연한 나일론 섬유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이 장치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장치가 작기에 외부의 진동이나 흡착, 탈착 등 작은 변화에 의한 안정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최소동력으로 작동하는 나노구조물은 열진동에 취약하고 잡음층을 유발해 신호를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전혀 생소한 나노 장치가 경제성을 가질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 반도체 공장을 세우는 데 적어도 10억달러 이상이 들어간다. 만일 나노 반도체를 양산하려면 이보다 훨씬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나노의 잠재력을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할 문제들이 나노기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셈이다.
나노는 세상을 바꿀 첨단기술인가
이제 나노기술은 미래의 신기술이 아니다. 이미 나노 파우더를 이용한 주름살 제거제, 자외선 차단제, 피부 미백제 등의 화장품을 비롯해 반도체 메모리, 배터리 연료 등으로 활용분야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언젠가는 세포 발전소 구실을 하는 미토콘드리아를 빼닮은 나노 극미세 발전소가 페인트 형태로 등장할 태세다. 나노기술은 지구환경 문제를 해결할 청정기술로 주목받기도 했다. 음용수와 폐수용 필터시스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등을 나노 수준으로 디자인하면 미세 불순물을 제거한 청정 음용수와 연료를 얻을 수 있다. 생산 시설의 폐가스에서 나오는 나노 크기의 검댕까지 제거할 수 있는 민감한 세정기가 개발되기도 했다. 게다가 초미세 제품들이 실용화된다면 원료물질과 폐기물도 줄어들기에 지구 생태계를 지킬 수 있다. 물론 이런 가설은 어디까지나 나노기술의 가능성일 뿐이다. 최근 나노기술의 역기능에 대한 연구는 나노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거대한 재앙으로 바뀔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