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은 한국의 대표 재벌그룹인 삼성·LG·현대 그룹의 올 초 임원 승진자 772명을 대상으로 출신고교를 조사했다. 그 결과 특정 지역 편중이 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과 영남 지역이 두드러졌고 호남 지역은 7%에 불과했다.

이춘재 · 김수현 기자 cjlee@hani.co.kr

지난 2월 중순이었다. 40대 중반의 한 남자가 <한겨레21>에 전화를 걸어왔다. 국내의 한 재벌그룹 금융회사 간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좀 황당한 얘기일지도 모르는데, 끝까지 들어주시겠습니까?” “….” 그는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영식(가명)씨는 20년 전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전직’의 유혹이 많았지만, 김씨는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언젠가 빛을 보게 된다는 신념을 갖고 일했다. 그는 회사 동료들한테서 신뢰를 받았고, 다른 입사 동기들과 비슷한 시기에 지점장으로 승진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 삼성 사장단 회의. 삼성은 부회장이나 사장으로 승진한 15명의 사장단 중 13명이 서울과 영남 지역의 고교 출신인 반면, 호남 출신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호남 출신이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임원으로 승진할 때가 되면서부터 김씨의 회사 생활은 꼬이기 시작했다. 임원 승진 인사에서 한두 차례 탈락하더니, 2년 전부터는 명예퇴직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급기야 김씨의 회사가 수익성 악화로 최근 그룹 내의 다른 계열사와 통합되면서 그는 대규모 구조조정에 휩쓸릴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김씨에게는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20년 넘게 이 회사에 일하는 동안 호남 출신 임원을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호남 출신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임원 인사의 기준이 뭔지 의문이 들더군요. 실제로 회사 부실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한 간부는 다른 계열사로 영전해 갔는데, 그는 회사 오너와 같은 지역의 출신이었죠. 호남 출신인 다른 간부들은 임원 승진 인사에서 모조리 탈락했습니다.” 김씨는 회사에 문제제기를 했지만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곧 명예퇴직을 신청할 생각이다. “지역차별이 많이 없어졌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기업에는 그 잔재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재벌 총수와 같은 지역의 출신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혜택을 보게 마련이죠.” 그는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김씨의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어쩌면 김씨의 말은 승진에서 탈락한 사람의 ‘의례적인’ 변명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겨레21>은 김씨의 주장을 ‘검증’해 보기로 했다. 지역차별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될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씨의 주장을 검증하는 작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씨의 주장대로 재벌기업들에 지역차별이 있는지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실제 지역차별이 있다 한들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결국 김씨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간접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재벌기업 임원들의 출신 지역을 조사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조사 대상을 국내 3대 재벌인 삼성·LG·현대로 국한했지만, 이들 임원의 신상기록을 입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기업들은 임원의 신상기록은 물론이고 그 규모조차 대외비라는 이유로 알려주지 않았다.

△ 대표적인 국내 재벌그룹인 삼성(이용호기자) · LG · 현대(한겨레 이정용기자)의 사옥 전경. 재벌그룹의 고위직 출신지별로 영남과 호남간의 차이가 크지만, 서울과 지방의 격차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겨레21>은 삼성·LG·현대가 최근 임원 인사를 단행한 사실에 주목했다. 임원 승진자들만 조사해도 이들 기업 인사의 대체적인 추세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원 승진자들의 출생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한겨레>와 <중앙일보> 등 언론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인물 데이터베이스(DB)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의 자료를 다 뒤졌지만, 승진 임원의 출생지가 전부 기록된 자료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분류 기준으로 출생지 대신 출신고교를 선택하기로 했다. 한국 사회의 인맥은 주로 출신고교를 매개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것으로 판단했다.

삼성 사장단 15명 중 13명이 서울 · 영남 출신

그 결과, 국내 3대 재벌그룹의 임원직은 서울과 영남 인맥의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영남과 호남간의 차이가 크게 났고, 서울과 지방의 격차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3대 재벌그룹의 올해 임원 승진 인사의 규모는 900명에 육박했는데, 이 중 출신고교가 파악된 772명 중 325명(42%)이 서울 지역 고교 출신인 것으로 조사됐다. 부산을 포함한 영남 지역 고교 출신은 259명으로 전체의 34%에 이른 반면, 호남 지역은 55명으로 7%에 불과했다. (이런 추세는 지난해 상장회사협의회가 분석한 결과와 비슷하다. 상장회사협의회가 676개 상장회사 임원 1만여명의 출신지를 분석한 결과, 서울(32.1%)·경북(12.4%)·경남(11.7%)·경기(7.2%)·부산(7.1%)·충남(6.3%)·전남(5.3%) 등의 순이었다.)

그룹별로 보면 삼성그룹은 승진 임원(상무보급 이상) 중 서울지역 고교 출신 임원의 비율이 전체(조사 대상자 393명)의 43%(169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은 영남 지역(부산 포함) 고교 출신 임원의 경우 전체의 34%(127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과 영남 두 지역을 합하면 75%에 이른다. 반면 호남 지역은 16명으로 5%에 불과하다. 삼성은 특히 부회장이나 사장으로 승진한 15명의 사장단 중 13명이 서울과 영남 지역 고교 출신인 반면, 호남 지역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지난해 연말과 올 초 250여명 규모의 승진 인사를 단행한 현대그룹(현대차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 합산)은 출신고교가 파악된 241명 중 93명(39%)이 서울 지역 고교 출신이다. 영남 지역은 80명으로 33%를, 호남 지역은 25명으로 10%를 차지했다. LG그룹은 141명 중 서울이 60명으로 41%, 영남 지역은 52명(37%), 호남 지역은 13명(10%)이었다. 3대 재벌 모두 서울과 영남 인맥의 인사들이 고위직을 장악하고 있고, 호남은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었다.

△ 월급쟁이가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실력보다 출신 지역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한겨레21)

국내 기업들의 고위 임원 자리를 서울과 영남 출신이 ‘독점’했고, 호남은 상대적으로 소외됐다는 것은 재계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영·호남이 그룹별로 적게는 3배에서 많게는 7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영·호남의 인구 격차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영·호남의 인구 비율은 2000년 기준으로 10(영남) 대 7(호남)에 불과하다.

전통적으로 호남 사람들은 영남에 비해 공직에 진출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분석도 있지만, 이 또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오히려 고위 공직자 수도 영남 출신이 더 많다. 실제로 중앙인사위원회가 지난해 54개 중앙행정기관 1∼4급 공무원 7600여명을 조사한 결과, 1∼3급 실·국장 요직 120개의 출신지별 분포는 영남이 32.5%로 가장 많았고, 호남은 29.1%로 그 뒤를 이었다.

글로벌 인재 육성, 공허한 외침 될라

기업 임원의 영·호남 격차를 재벌그룹의 발생지나 창업주의 고향과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재계 인사들은 이런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영·호남 격차가 가장 큰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이 대구와 구미 등 경북 지역에서 시작된 기업이기 때문에 초창기에 영남 출신들이 많이 입사했다”며 “아무래도 자기 고향과 가까운 직장에 입사하기를 더 원하게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 창업주의 고향도 영·호남 격차와 일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삼성그룹은 고 이병철(왼쪽) 회장이 경남 의령 출신이고, LG는 창업주 구인회(오른쪽) 회장의 고향이 경남 진양이다.

창업주의 고향도 영·호남 격차와 일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삼성그룹은 고 이병철 회장이 경남 의령 출신이고, LG는 구씨 일가의 고향이 경남 진양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20년 전만 해도 취업 시즌이 되면 호남 사람들은 반골 기질이 있어서 안 뽑는다거나, 어떤 기업은 입사원서에서 본적만 보고 호남 출신을 걸러낸다는 둥 풍문이 많이 돌았다”며 “하지만 지금은 출생지나 본적을 아예 기록하지 않는 기업들이 많다”고 말했다.

<한겨레21>의 이번 조사는 국내 전체 기업의 임원을 모두 조사하지 못한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들의 새로운 리더로 등장한 임원들의 인맥을 가늠해봤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삼성을 비롯한 국내 재벌들은 최근 경쟁적으로 ‘글로벌 인재 육성’을 외치고 있는데, <한겨레21>은 이들의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