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영남 편중 현상은 그동안 영남이 호남보다 ‘사회자본’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였기 때문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우리가 20∼30년 전 첫 입사할 때부터 성향이 달랐다. 호남 출신은 주로 고시쪽을 선호했고 상대적으로 재계에 들어오는 수가 영남에 비해 적었다.” <한겨레21>의 조사 결과 대기업 임원의 경북·경남 출신 집중 현상이 확연히 드러난 데 대한 한 재벌그룹 상무의 개인적 분석이다. 그는 “그룹에서 특정 지역을 차별하거나 우대하는 인사는 한번도 없었다”며 자신도 임원급의 영남 편중 현상이 왜 나타났는지 궁금하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특정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실 재벌기업의 인사 관행에서 다른 요소는 빼고 오직 출신 지역에 따라 우대하거나 푸대접하는 끈끈한 ‘지역주의’가 작동한다고 보는 건 단편적 시각일 수 있다. 기업은 어디까지나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 따라서 실적과는 무관하게 능력이 뒤처지는 사람을 특정 지역 출신이라고 승진·발탁한다는 건 기업의 생리에 비춰볼 때 맞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돈이 되지 않는 사람을 임원으로 중용할 기업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그렇다면 거의 모든 영남 출신 임원이 호남 출신에 비해 개인적 능력이 훨씬 더 출중한 것일까? 이것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면, ‘실적’과 ‘지역’을 서로 이어주는 고리가 필요하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이른바 ‘사회자본’이다. 사회자본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증폭시키는 사회적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출신 지역으로 얽힌 ‘연줄’이 대표적이다. 정치인 및 관료와 ‘잘 안다’는 것은 부와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에 남보다 더 접근해 있다는 뜻이다. 특히 출신 지역을 배경으로 형성된 연줄은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개인적 자산 노릇까지 하는데 재벌기업일수록 개인적 연줄은 실적, 즉 돈과 직결된다. 왜 그럴까?
정치권력이 경제개발을 주도하던 개발 연대에 기업 혼자서 공장 세우고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회사를 키우기 어려웠다. 자연히 재벌기업들은 저마다 정치권력 및 관료와의 로비 채널을 구축해 막대한 이권사업을 따내거나 숙원사업 해결에 나섰다. 특히 재벌기업 성장 과정에서 영남지역이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정치권과 정부에는 영남 파워 엘리트 인맥이 두텁게 형성돼 있었다. 조영호 아주대학교 교수(경영대)는 “이런 정치적 환경에서 재벌기업마다 영남 출신 인맥이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남 출신 임원은 지역적 연줄을 통해 정치권으로부터 특정 사업권을 따내는 등 탁월한 실적을 냈다”며 “이런 실적이 다시 인사평가에 반영되는 상승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호남 출신이라는 태생적 배경이 굴레로 작용한다기보다는 영남이라는 연줄이 ‘또 다른 막강한 실력’으로 작용해 임원으로 끌어올려주는 메커니즘이다. 호남 출신일수록 연줄망을 타지 않고 혼자 출세할 수 있는 통로, 예컨대 고시에 주력했다는 설명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이 또한 사회경제적 구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재벌기업 임원의 영남 편중 현상은 우리나라의 정치·사회 환경이 경제적으로 왜곡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DJ 정부 시절 재벌들의 딜레마
재벌기업의 임원이 하는 일 자체도 임원의 지역 편중 현상을 낳은 한 원인으로 꼽힌다. 재벌기업 임원의 업무가 상품의 시장경쟁뿐 아니라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줄 사업권을 따내는 데 집중돼 있었고, 시장원리보다는 정부가 자원배분을 주도했기 때문에 정치권과 교감할 수 있는 연줄을 감안해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치권력의 지역적 교체가 이뤄져 김대중 정부가 탄생하자 재벌들은 새 정권에 줄대기 위해 호남 출신의 전진 배치에 나섰지만, 이미 호남 인맥의 씨가 말라 구인난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에 재계의 한 임원은 사석에서 “정치권과 정부 부처에 등장하는 얼굴들을 보면 대부분 처음 보거나 젊은 사람들이다. 우리 회사에 새 정부의 실세들을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골치”라고 털어놓았다. 결국 재벌기업의 지역주의 인사는 고급 정보가 정상적인 채널보다는 주로 연고라는 끈을 통해 생산·소비·유통되는 한국적 현실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능력 외에 ‘경제외적으로’ 재벌기업의 이익을 확대재생산할 수 있느냐가 임원 승진의 잣대가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