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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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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 천국 총기 지옥

10명에 1명꼴로 소유한 총기, 가뜩이나 취약한 민주주의 위협
등록 2014-02-14 06:49 수정 2020-05-02 19:27
복면을 쓴 타이의 반정부 시위대원이 조기 총선을 하루 앞둔 2월1일 방콕에서 벌어진 시위대 간 무력 충돌 과정에서 친정부 시위대를 향해 포대 안에 감춘 소총을 겨냥하고 있다.

복면을 쓴 타이의 반정부 시위대원이 조기 총선을 하루 앞둔 2월1일 방콕에서 벌어진 시위대 간 무력 충돌 과정에서 친정부 시위대를 향해 포대 안에 감춘 소총을 겨냥하고 있다.

한때 나의 지축(地軸)은 이곳을 중심으로 돌았다. 방콕 카오산 로드, 전세계 배낭여행자들이 북적대는 카오산에선 의식주는 물론 아쉬운 물건들을 어지간히 해결할 수 있다. ‘우린 모든 걸 팝니다’ 혹은 ‘삽니다’라고 적힌 투박한 매직 글씨 간판(실은, 상자판때기) 아래 펼쳐진 좌판은 한 번쯤 뒤적여볼 만하다. 오래전 그중 한 곳에서 모 회사의 로고가 박힌 손목시계를 팔아 하루치 방값을 챙긴 적이 있다. 지금쯤 그게 누구의 손목에 채워져 있을지.

지축은 세월 따라 이동했다. 방콕, 아니 타이 전역이 ‘모든 걸 팔고 사는’ 세계라는 걸 아는 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짝퉁의 세계는 무한대고, 블랙마켓에서 팔리지 않는 ‘물건’은 없다. 개, 코끼리, 장기, 인간, 마약 그리고 총기류. 심지어 짝퉁 AK47까지 있다.

2012년 5월 공연차 방콕을 방문한 팝 가수 레이디 가가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트위트를 날렸다. “와우, 5만 팬들의 함성이 기다려져요. 짝퉁 롤렉스도 살 거라고요.” ‘짝퉁’에 맘 상한 한 누리꾼은 “우린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 맞받았고, 어떤 누리꾼은 ‘쿨’하게 넘겼다. “짝퉁 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장담컨대 당신 앨범 짝퉁 CD도 많을 거예요.” 농담이든 논쟁이든 주고받을 수 있는 요란한 짝퉁 세계와 달리 블랙마켓은 조용하고 어둡지만 만연하긴 매한가지다. 특히나 요즘처럼 어수선한 시국에 대낮 총격전까지 벌이는 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블랙마켓 ‘총기주가’가 꽤나 오르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타이에서 총기 소지는 ‘엄격한’ 심사를 거친 20살 이상 성인에게만 허용된다. 2012년 내무부 자료에 따르면 발행된 라이선스만 해도 620만 개, (복수 보유자가 있겠지만) 타이 인구가 6900만 명이니 10명 중 1명꼴이다.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블랙마켓까지 가세하면 총기 소지 인구는 ‘누구나’ 수준으로 뛸 수 있다. 그 여파는 타이 법무부 자료에서 가늠된다. 2003년 이래 근 10년간 불법 총기 소지로 체포된 20살 미만 인구가 32%나 증가했단다. 2011년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는 타이의 총기 살해율을 10만 명당 5.3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못지않게 총기 사고가 많은 필리핀이 10만 명당 0.2명이다. 동남아에서 총기 소지율이 가장 높고 아시아에서 총기 살해율이 가장 높은 나라, ‘미소의 나라’ 타이의 이면이다.

2012년 취임한 캄론윗 툽크라창 방콕 수도경찰청장은 방콕시 범죄의 주원인이 만연한 총기 소지라고 말했다. 이른바 ‘무기 제로 방콕’을 만들겠다고 다짐한 그해 경찰이 6월부터 9월까지 수거한 불법무기류는 767개. 가장 많이 수거된 구역 중 하나가 딘댕이었다.

지난 2월2일 조기 총선일, 그 딘댕에서 총성이 울렸다. 투표소를 가로막은 반정부 시위대원과 200m쯤 떨어져 경찰 통제선에 막혀 있던 ‘동네 유권자’들이 마침내 경찰 통제선을 뚫고 씩씩대며 투표소로 나아갔다. 양쪽 간에 고성과 투척물이 오가던 중 반정부 사수대 한 명이 권총을 뽑았다. 탕! 딱 한 발. 전날 방콕 북부 락시에서 42발이나 튕겨나온 지옥 같은 총격전은 연출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의 꽃은 산산이 부서졌다.

전날 (각종 총기류를 선보인) 락시 총격전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제 타보 소총(TAR-21)까지 등장했다. 블랙마켓에서도 구하기 어렵다는 무기다. ‘팝콘’(Pop Corn)이라 쓰인 포대를 소총에 뒤집어씌운 채 카메라 옆에서 대범하게 쏘던 ‘팝콘 총잡이’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걷힐 줄 모르고 짙어만 가는 안개 시국에 인파로 북적거리던 ‘짝퉁 상가’들도 한산한 모양이다.

이유경 방콕 통신원·방콕에서 ‘방콕하기’ 10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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