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베트남계 타이 친구 폰이 ‘집에 놀러오라’는 문자를 날렸다. 고향에 다녀왔다며 엄마가 바리바리 싸준 베트남 음식을 같이 먹잔다. 제때 시간을 못 내 베트남 음식은 놓쳤지만 대신 스파게티, ‘카꿍’ 국, 샐러드로 근사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폰도 나처럼 부엌을 사랑했다. 콘도 사이즈도 같았다. 32㎡(약 10평). 하마터면 부엌이 없을 뻔한 사이즈다. 아니, 타이에는 이보다 숫자 몇 개 올라간 콘도라도 부엌 없는 곳이 적잖다. 그러니 부엌을 ‘보장’받으려면 사이즈부터 넉넉히 받쳐줘야 한다.
지구촌 사랑을 듬뿍 받는 타이 음식 이미지는 부엌 없는 살림집의 현실과 묘하게 괴리된다. 해먹는 게 지겨워서 하는 외식이야 별미일 수 있지만, 해먹을 수 없어 하는 외식은 더 지겨울 수 있다. 고만고만한 콘도 거주자들이 좋은 식당에서 매 끼니를 때울 리 만무하고, 식당에는 몸에 좋은 잡곡밥이 거의 없다.
2008년 금융위기 때였다. 장기 출장으로 여러 달치 월세를 선불할 때가 많은 내게 월세의 ‘용량’이 걸쭉해지기 시작했다. ‘사이즈를 줄이자.’ 이사를 결심하고 방콕을 뒤졌는데 결과적으로 ‘부엌 찾아 3만리’가 되고 말았다. 싸고 맛난 거리 음식을 두고 왜 굳이 부엌이 필요하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것도 아니면 “요리하고 싶으면 전기스토브 쓰시고요, 식재료 씻기나 설거지 같은 건 저기서 하면 되고요”라는 말이 고작이었다.
전기스토브는 쓰면 되는데, ‘저기’는 욕실이다. 이쯤 되면 사이즈를 넘어 식습관을 반영한 인테리어 문제로 넘어간다. 하물며 집에 음식을 사와 먹어도 접시 닦을 공간이 필요하거늘, 공간이 충분해 보여도 부엌은커녕 작은 싱크대 하나 아쉬운 콘도가 많았다.
여기에 ‘냄새론’까지 가세한다. ‘부엌 있느냐’는 질문에 내 국적을 묻는 아줌마가 있었다. (한국인이라 했더니) “미안하지만 요리는 안 돼요”라고 답하셨다. 한국인 세입자가 청국장쯤 끓여 먹은 탓에 트라우마를 겪고 계신가, 하고 이해했다. 지난 5월12일치 생활면 기사도 이 냄새 얘기를 했다. 타이 음식의 강한 냄새를 고려해 햇볕 들고 공기 통하는 타이 전통 부엌이 (콘도 내) 서구형 부엌보다 좋다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작은 콘도 부엌에서 된장찌개도 끓여먹고 스파게티도 해먹는 나로선 그런 냄새가 밸 수도 있는 게 집구석 아니겠느냐고 주장하고 싶다. 아무튼, 금융위기 조장에 공이 크신 조세피난처 ‘난민들’ 덕분에 치렀던 ‘부엌 찾아 3만리’. 결국 실패로 끝났고 난 부엌 없이 11개월을 지내다 탈출했다.
요 몇 달 타이 밧화가 계속 강세다. 굴하지 않고 부엌을 사수하리라 다짐을 거듭한다. 내일 금융위기가 올지언정 오늘 나는 장바구니를 채우마고. 그러다 오늘 김치까지 담가버렸다. 생강향 가득한 방 안은 건강한 향기도 한가득이다. 그 향기에 취해 이 글의 마침표를 꾹 눌러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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