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축제 땐 술 대신 물을!
여러 달 전, 오랜 ‘가출’ 끝에 방콕으로 돌아온 다음날 시장가방 두 개를 메고 슈퍼로 향했다. 깨알 목록에 없는 주류 코너를 도는 찰나 멈칫하다가 들어섰다. 타이산 허브와인을 집는데 점원의 손가락이 살며시 선반 위 안내판을 가리킨다. 아차, 술을 살 수 없는 오후 3시다. 타이에서는 오후 2~5시, 자정~오전 11시에 주류 판매가 금지된다. 야간 판금은 그렇다 치고 낮술 판매를 금하는 이유는 아리송하다. 술이 고픈 이는 식당 가면 되고, 10ℓ 홀세일은 가능하니 말이다.
3월 초 방콕 시장 뽑던 날, 하필 집에 놀러온 친구는 맥주를 “커피나 한잔…”쯤 여기는 영국인이다. 술을 팔 수 없다며 난감해하는 구멍가게 주인에게 ‘저는 이 나라 투표권이 없어요’라고 꼬드겨 배낭 안에 ‘대자’ 한 병 담아왔다. 타이에서는 선거일, 불교 4대 기념일에도 주류 판매가 금지된다.
이쯤 되면 백성들 술상에 왜 나라님이 간섭하느냐고 구시렁댈 수 있겠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나면 술상 무게 조절하려는 나라님 심정 이해할 만하다. 골목과 대로변을 누비는 오토바이가 술을 만나 크고 ‘잦은’ 사고를 낳기 때문이다. 음주사고의 심각성은 송끄란(동남아 새해) 물축제 기간에 잘 드러난다. 4월13일부터 시작되는 3일간의 공휴일은 앞뒤로 부풀어 6~7일 홀리데이가 되기 십상인데, ‘위험한 7일’로 불리는 이 기간에 방콕 전역은 ‘물바다’가 된다.
올해 ‘물바다’를 앞두고 더욱 긴장감이 조성된 건 3월 말 발표된 ‘도로사고조사센터’ 보고서가 타이 도로를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도로 6위’에 올려놓은 탓이다. 당국은 고심에 빠졌다. 송끄란 기간에 주류 판매를 전면 금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궁여지책으로 나온 건 전국 86곳 ‘금주구역’ 설정. 효과? 별로다. 사고 2828건, 사망 321명, 부상 3040명. 올해의 송끄란 성적표다. 지난해보다 1명 더 죽었다. 물론 헬멧 미착용, 과속 등 복합 요인도 있다.
한때 물싸움에 정신줄 놓던 내가 ‘물총 거부자’가 된 건 8년 전. 북부 빠이에서 치앙마이로 곡예길 버스를 달리는데 물세례가 끊이지 않았다. 아찔했다. 물총 싸움 현장에서 전사하는 게 아닐까 하고. 치앙마이에선 원고 전송차 노트북 들고 인터넷 카페로 향하며 ‘두 손 들고’ 살금살금 걷는 내게 물대포가 쏟아졌다. ‘월중 행사’까지 치르던 몸은 화딱지에 부들거렸다. 그즈음 물과 술이 범벅된 ‘송끄란 사상자’의 진실까지 알아버렸다. 아, 과해도 너무 과하네.
물총, 물바다. 물바가지 다 좋다. ‘구악’(舊惡) 쫓는 물의 여신이 몸 쓸어주는 기분 짜릿하다. 하나, ‘항복 자세’도 소용없는 공격성. 경제성장을 탄 오토바이 구매력이 알코올과 만나 일으킨 몹쓸 화학작용. 40년 전 축제에는 없었을 ‘신악’(新惡)들이 내게서 그 촉촉한 물맛을 앗아갔다.
방콕 통신원·방콕에서 ‘방콕하기’ 10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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