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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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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부터 먹어라!

등록 2013-03-02 05:36 수정 2020-05-02 19:27

몇 해 전 일이다.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동료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국을 안 좋아하시나봐요?” “예? 왜 그러시지요?” “아니, 식사하실 때 국에 전혀 손도 안 대시는 것 같아서요.” 나는 밥과 반찬을 다 먹고 나서, 국을 나중에 음료수 마시듯이 한두 번에 들이켜는 습관이 있다. 식사 중에는 국에 입도 안 대니 오해 아닌 오해를 받을 법하다. 이 ‘기묘한’ 습관은 내 몸에 남아 있는 일본 생활의 ‘흔적’ 중 하나다.

1949년 일본 도쿄 미타카에서 열차가 폭주해 6명이 숨진 ‘미타카 사건’의 현장(오른쪽). 재심 청구 자료집에 실린 다케우치 게이스케의 사진. 소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철도 직원이 된 그는 단독범죄를 인정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참을성이 나를 파멸시켰다”고 토로했다. 한겨레 자료

1949년 일본 도쿄 미타카에서 열차가 폭주해 6명이 숨진 ‘미타카 사건’의 현장(오른쪽). 재심 청구 자료집에 실린 다케우치 게이스케의 사진. 소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철도 직원이 된 그는 단독범죄를 인정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참을성이 나를 파멸시켰다”고 토로했다. 한겨레 자료

미래의 희망, 절약의 근거

그렇다고 밥과 국을 따로 먹는 것이 일본인의 식생활 습관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정은 이렇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 생활을 시작했는데,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당시 일본에 사는 ‘외국인’은 누구라도 일본의 높은 물가 때문에 적잖은 곤란을 겪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교 식당에서 세끼를 해결하는 때가 많은데, 일본에선 밥이나 반찬을 ‘공짜’로 더 주는 경우가 없었다. 더구나 밥공기는 큰데 국그릇은 내가 보기에 ‘간장 종지’만 해서 한국에서 먹던 대로 밥과 국을 번갈아 먹다보면 항상 국이 모자랐다. 궁여지책(엄밀히 말하면, 머리로 생각해서 낸 대책이라기보다 몸의 반응이었을 것이다)으로 밥을 다 먹고 국을 나중에 한번에 들이켜는 식생활 습관이 몸에 배게 되었고, 이런 일본 생활의 ‘흔적’이 국을 양껏 먹을 수 있는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맛있는 국을 먼저 먹지 않고 나중에 먹는 버릇인 셈이다.

어릴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에는 귀했던 찌개 속의 명태알을 어머님은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줬는데, 머리 회전이 빠른 형은 명태알을 밥 속에 숨겨두었다가 밥을 다 먹고 나서 나중에 꺼내 먹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나 어릴 적 경험 모두 음식이 상대적으로 귀했을 때의 일이다. 국이 모자라지 않는다면, 명태알이 모자라지 않는다면, 굳이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의 욕구를 참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현재의 ‘결핍’에서 나온 소비법인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현재를 참는 행위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일 국이나 명태알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미래가 오지 않는다면 이런 소비법은 작동되지 않는다. 즉, 현재의 절약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근거한 것이다.

6명 숨진 열차 폭주, 범인은?

사적인 경험을 구질구질하게 끄집어내는 데는 까닭이 있다. 정치적 사건으로 1949년 체포돼 사형 판결을 받고 1967년 뇌종양으로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한 다케우치 게이스케가 남긴 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와는 다른 맥락이다. 그는 “나는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라났고 잘 살아보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가족끼리 밥을 먹을 때, 맛있는 것은 남겨두었다가 나중에 먹는 것이 즐거움이었다”고 고백한다. 다케우치는 산악지대인 나가노현의 가난한 양잠 농가에서 1921년 태어났다. 그는 가난 때문에 항상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를 참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는 절약하고 참고 노력했다. 소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철도 직원이 되려고 노력을 거듭해 시험에 응모한 것도 그 때문이다. 결과는 불합격. 하지만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1937년 도쿄로 와 인쇄회사에서 일하며 수험 공부에 매진한 그는, 결국 1938년 11월 도쿄철도국 직원 채용 시험에 합격해 당당히 꿈을 이루게 된다.

국철 직원은 징병 대상이 아니어서 전쟁터에 끌려갈 일도 없는 국가공무원 신분이었으니 인기가 높은 직종이었다. 그리고 2년 뒤 다케우치는 결혼해 자식 5명을 두며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큰 출세는 아니었지만, 중등학교 진학률이 20% 정도이던 시대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가난한 다케우치에게 국철 직원은 최고의 ‘입신출세’였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전쟁의 한복판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결핍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의 수기에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1945년 패전은 그에게 시대의 격랑으로 다가온 듯하다.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고 영국과 미국을 ‘악마’로 형용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돌변해 민주주의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가 일하던 직장에도 당연히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그는 노동조합에 참여했고 조합 활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한다. 그렇게 접한 공산당이나 사회주의가 그때까지의 소박한 입신출세를 대신하는 희망의 미래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린다. 1949년 7월15일 도쿄의 미타카역에 정차돼 있던 열차가 갑자기 폭주해 사망자 6명, 부상자 20명이 발생했다. 이른바 ‘미타카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다케우치는 동료 12명과 함께 체포된다. 다케우치를 제외한 11명은 모두 공산당원이었다. 다른 11명은 무혐의나 무죄판결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대법원은 이 사건을 다케우치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려 사형을 선고했다. 다케우치의 7번에 걸친 진술 번복이 문제였다. 당초에 다케우치는 공동모의를 주장했다. 그런데 공산당계 변호사의 설득을 받아들여 1심 법정에서 단독범행임을 주장해 결국 혼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2심에서는 다른 피고들이 1심과 마찬가지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다케우치만이 사형 판결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그는 옥중에서 병사할 때까지 줄곧 완전 무죄를 주장한다. 이 사건은 이 시기에 연이어 일어나는 의혹투성이의 사건과 관련 있다.

1949년 7월5일, 당시 국철 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출근 도중에 갑자기 실종됐다가 다음날 철로변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시모야마 사건). 그로부터 열흘 뒤에 미타카 사건이 일어났다. 또 약 한 달 뒤인 8월17일 동북 지역 마쓰카와에서 열차 탈선 사고가 일어나 3명이 숨졌다(마쓰카와 사건). 이 밖에도 후쿠시마현 니와사카에서 1948년 4월27일 발생한 열차 탈선 사건(사망자 3명), 가가와현에서 1949년 5월9일 발생한 열차 탈선 사고(사망자 3명)를 더하면 1948년부터 약 1년 동안 5건의 철도 관련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 셈이다. 이 중 시모야마 사건, 미타카 사건, 마쓰카와 사건을 합쳐 일본에선 ‘국철 3대 미스터리’라 부른다. 그런데 세 사건 중 유일하게 법원이 범인을 특정한 사건이 바로 미타카 사건이다. 다른 사건들은 범인으로 특정된 사람들이 모두 무죄판결을 받거나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 사건들은 동북아시아에 냉전의 광풍이 휘몰아쳐 미국의 대일정책이 반동화되던 시기와 겹친다. 노동조합 탄압이 본격화됐고 구조조정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 정부는 행정기관 정원법을 제정해 약 28만5천 명의 공무원 인원 감축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국철에서만 9만5천 명의 인원 감축이 예정돼 있었다. 공산당과 노동조합, 미군정과 일본 정부의 대립이 최고조에 달했다. 공산당은 당시 요시다 정권을 타도해 인민정부를 수립한다는 이른바 ‘9월 혁명’을 내세웠다. 국철에서 발생한 의문의 사건들은 이런 시대 상황을 반영한 측면이 있다. 미타카 사건 직후 요시다 총리가 “공산당이 불안을 조장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것처럼 미군과 일본 정부는 이 사건들을 모두 일본 공산당과 좌익이 일으켰다고 했고, 공산당 등은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를 탄압하려고 미군과 일본 정부가 날조한 사건이라 했다.

1948~49년 잇따라 철도와 관련된 사건이 터졌다. 미제로 남겨진 사건을 추적한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 3대 의혹 사건을 담은 ‘일본의 검은 안개‘. 이 책은 ‘일본의 밤과 안개’로 번역되기도 한다. 모비딕 제공

1948~49년 잇따라 철도와 관련된 사건이 터졌다. 미제로 남겨진 사건을 추적한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 3대 의혹 사건을 담은 ‘일본의 검은 안개‘. 이 책은 ‘일본의 밤과 안개’로 번역되기도 한다. 모비딕 제공

“공산당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 셈”

그런데 왜 공산당원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다케우치만 사형을 선고받았을까? 그는 처음에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자백했다. 왜일까? 그는 “다른 동료들을 구하기 위한 바보 같은 영웅주의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봄을 기다리는 목숨’이라는 자작시에서 “죄도 없는데 당할 바에야 그나마 다른 동료의 목숨, 이 사람들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을 구해주려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켜 인민정부가 들어서면 다른 동료들을 구한 자신이 인민의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산당 쪽의 설득도 한몫했을 것이다. 공산당은 1949년 1월 총선거에서 의석 35석을 획득해 대중적 기반을 넓히고 있었다. 미타카 사건으로 입을 정치적 타격을 줄이고자 공산당원이 아닌 다케우치의 단독범행으로 몰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을 추리소설 기법으로 재구성해 이를 ‘일본의 밤과 안개’로 명명한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에는 이 3대 의혹 사건 중에 유독 미타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미타카 사건이 ‘안개’가 아니라, 다케우치의 단독범행이거나 공산당이 일으킨 사건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찌됐든 다케우치는 사형 판결 뒤 당과 노조에 대한 배신감을 수기 곳곳에 남겼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약한 인간이다. 약하기 때문에 금방 사람을 믿어버린다. 당과 노조가 모두 몰려와서 너를 전면적으로 신용한다고 해서 아주 기뻤다. 그래서 바로 믿어버렸다. 이게 잘못의 원천이었다. 결국 일본 공산당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 셈이다.” “나는 당의 지시대로 행동하고 변호사와 상담해왔다. 당에서는 절대로 괜찮다며 지령을 하나하나 전해왔다. 그래서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 나 하나만 사형이다.”

44년 만에 법정에 선 ‘홀로서기’

사형수 문제를 추적해온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가가 오토히코는 “다케우치의 정신이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흔들린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인간과 조직·권력 간의 피투성이 다툼”이라고 말한다. 타인이나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는 다케우치의 삶에 대한 태도가 파멸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케우치는 말한다. “힘든 것, 고통을 이겨내고 견딘다는 것의 부자연스러움이 이렇게도 나와 가족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성이 강하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파멸시킨다고 생각한다. 분하고 억울하다.” 그래서 선언한다. “앞으로는 난 맛있는 것부터 먹겠다. 여러분에게도 맛있는 것부터 먹으라고 권한다.” 2011년 11월10일, 다케우치의 유족과 변호단은 다케우치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재심을 청구했다. “맛있는 것부터 먼저 먹겠다”는 다케우치의 주체적 ‘홀로서기’ 선언이 44년 만에 다시 법정 문턱에 서게 된 것이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권혁태 교수의 ‘또 하나의 일본’ 연재를 잠시 쉽니다. 3개월여 뒤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연재를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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